최근 수정 시각 : 2025-03-17 21:56:52
1. 개요2. 상세3. 다른 연구자들과의 견해 차이4. 저서5.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6.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7. 최명길 평전8. 기타 저서 1. 같이 보기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교육자, 역사 강연 전문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외국어대 강사 등과 규장각 특별연구원을 역임했다.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한국측 2분과 위원, 동북아역사재단 자문위원, 역사비평 편집위원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이자 인문대학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KBS, EBS, Jtbc 등 각 방송에 다수 출현했고, 동아일보·서울신문·한겨레신문·중앙일보 등 다양한 언론 매체에 많은 역사 칼럼 등을 연재한 바 있다. 나아가 중앙공무원교육원, 국립외교원 등 공공 기관과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의 최고위 과정, 그리고 삼성과 현대차 등 여러 기업에서도 역사학, 인문학 강의를 했던 경험이 있다.
한명기 교수는 석사논문으로 「광해군대 대북세력과 정국의 동향」이란 주제로 광해군대 정치사를 탐구한 이후 주로 임진왜란∼병자호란 시기 조선의 정치사와 대외관계사를 천착해 왔다.
1990년대 초 잠시 『조선정치사 1800∼1863』(청년사)의 공저자로 참여하여 19세기 민중운동과 관련된 논문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19세기 하동괘서(河東掛書) 사건을 다룬 논문은 종래까지 전혀 활용되지 않았던 『하동괘서초발(河東掛書初跋』 등 규장각 자료와 지방 감영의 계록류(啓錄類) 등 다양한 사료들을 폭넓게 이용함으로써 19세기 민중운동사 연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후 석사 논문 이래의 주 관심 대상인 조선중기로 연구 중점을 옮겨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전후의 대외관계와 외교 관련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천착했다. 특히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출간한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년, 역사비평사)는 한국 대외관계사 연구의 한 획을 그은 역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실제로 손승철 교수는 서평(2000년, 『역사와 현실』 35호)에서 이 책을 가리켜 “조선시대 한중관계사를 진일보시키고 한국사의 영역을 동아시아로 넓히는데 한 획을 그은 명저”라고 극찬한 바 있다.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이 책은 2000년 제25회 월봉저작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저술 활동은 계속되어 『광해군』(2000년, 역사비평사),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09년, 푸른역사),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2013년, 푸른역사), 『최명길 평전』(2019년, 보리), 『원치 않은 오랑캐와의 만남과 전쟁』(2020, 동북아역사재단) 등 연구서와 대중서를 꾸준히 발표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전쟁에 주목하면서도 전쟁 그 자체, 즉 전투사를 직접 다루기보다는 전쟁의 발생 배경, 전쟁을 통해 변화되거나 형성된 정치사, 관계사, 관념사 등에 주목해 왔다. 특히 임진왜란 시기 명군의 조선 참전을 계기로 조선 사회에서 형성된 ‘재조지은(再造之恩)’이 이후 병자호란 시기 뿐 아니라 조선후기까지 조선의 내부 정치와 대외적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그의 지론은 학계 안팎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국사 연구의 시야를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시켰다는 평가를 받은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09) 또한 문제작이다. 이 책에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발생 과정과 배경, 두 전쟁을 전후한 시기 조선과 일본의 관계, 이신(貳臣) 문제, 조선 지식인들의 대청인식(對淸認識), 북학론(北學論)의 단초라고 할 수 있는 김종일(金宗一, 1597~1675)의 대외인식 등 종래까지 역사 학계에서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주제들을 광범한 사료들을 기반으로 선구적으로 천착했다.
일각에서는 그의 저술에 나타난 몇몇 오류나 미흡함 등을 확대하고 부각시켜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 평가절하하려는 움직임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동안 발표한 저서들에서 제시한 논지의 새로움이나 인용한 자료의 방대함 등을 고려할 때 한명기는 1990년대 이후 국내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포함한 대외관계사 연구 분야의 선구자이자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임진왜란 등을 자국 중심의 논지를 바탕으로 ‘施惠者’ 차원에서만 바라보면서 조선(-한국)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려는 중국 학계의 연구 동향에 학문적으로 맞설 수 있는 논지를 제시한 연구자라고 할 수 있다.
역사학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도 한명기의 활동은 주목할 만 하다. 우선 자신의 연구 주제와 관련된 저술, 강연, 방송 출연 등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광해군 재평가를 위해 2000년 저술한 『광해군』은 출간된 지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스테디셀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 2013년 출간한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는 역사서로는 드물게 5만 부 이상 판매되어 출판계는 물론 언론에서도 커다란 화제가 된 바 있다. 특히 조선일보 김태익 논설위원은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를 ‘인문학의 위기 시대’에 인문학자들이 어떤 방향으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지 전범을 제시한 책이라고 찬양한 바 있다.
대중을 상대로 했던 강의 가운데 달랑 분필 한개만 들고 임진왜란사와 그와 관련된 동아시아 관계사를 10시간 이상 연속으로 강의했던 「임진왜란 얼마나 아십니까」(도올 TV) 강연은 특히 유명하다. 한명기 교수의 역사 강의는 내용이 충실하고 전달 능력이 탁월하다고 정평이 나 있다. 과거 역사를 오늘의 현실과 적절히 연결시켜 설명함으로써 청중들의 공감과 호응을 이끌어 내는 강의 역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같은 평판 덕분에 한명기 교수는 「Jtbc 차이나는 클래스」에 역사학자로서 가장 먼저, 그리고 세 번이나 출연한 바 있다.한명기 교수는 2008년부터 국립중앙물관회의 연구강좌 프로그램에서도 다양한 주제들을 강의해 왔다. 2년간 격주로 계속되는 「조선시대사」를 비롯하여 「격변기에 돌아보는 한반도의 국제관계」, 「조선 왕을 어떻게 볼 것인가」 등의 강좌는 수강생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지금까지 국립중앙박물관회의 간판 강좌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명기 교수는 2018년에는 주 프랑크푸르트 한국 총영사관의 초청으로, 2021년에는 주 워싱턴 한국대사관의 공식 초청을 받아 각각 독일 교민과 주미 한국대사관 직원들과 조지워싱턴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출장 강연을 다녀오기도 했다.
한명기 교수는 2016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의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했던 강의 평가에서 「베스트 강사상」을 수상했다. 또 2015년과 2016년 국립외교원의 외교관 후보생들이 뽑은 「올해의 교수상」을 2년 연속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한교수의 역사 강의의 탁월함은 다른 강사들도 인정하고 있다. 근래 대중 강연에서 폭발적인 인기와 명성을 구가하고 있는 황창연 신부님은 강연 도중 청중들에게 “한국인이 반드시 들어야 할 역사 강의”로 한명기 교수의 강연을 추천한 바 있다.
3. 다른 연구자들과의 견해 차이
병자호란과 관련해서 다른 학자들과 견해 차이를 보이는 것이 일부 있다. 대표적으로 오항녕 교수와 구범진 교수.
한명기 교수는 ‘광해군 재평가’를 표방하면서 『광해군 탁월한―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를 집필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광해군의 내치는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광해군의 외교는 오늘날에도 배울 점이 있다고 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외교와 내정은 분리될 수 없다’는 지론을 가진 한교수는 전체적으로 광해군 정권을 실패한 정권으로 인식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인조 정권이 비록 광해군 정권의 난정(亂政)을 비판하면서 등장했지만, 집권 이후 광해군 정권의 문제점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광해군대의 리더십을 능가하는 역량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고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광해군 옹호론과 광해군 비판론 양측을 대표하는 학자들이다 보니 견해가 대립되는 것이 많다. 한명기 교수가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칭송한 반면, 오항녕 교수는 1만 3천 명의 병력 중 8천 명을 잃었는데 그것이 과연 실리냐며 비판했다. 오항녕은 한명기를 직접 겨냥해서 이나바 이와키치의 논지로 회귀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인조에 대한 평가에도 다소 차이가 있다. 한명기 교수가 인조 정권을 강하게 비판한 반면 오항녕 교수는 인조를 재평가하려는 논조가 있다. 여러 가지로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는 연구자다.
한명기 교수는 인조 정권의 내치와 외교 실패를 강조하면서 특히 병자호란 발생 무렵 조선이 취한 대외 정책과 외교적 행보를 비판적으로 본다. 2013년 출간된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와 2019년 출간된 『최명길 평전』에서 한교수는 병자호란에서 항복하는 등 인조 정권의 ‘실패’는 이미 1624년 이른바 이괄(李适)의 난을 겪으면서 예고되어 있었다고 본다. 즉 ‘반정’을 통해 어렵게 잡았던 정권을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괄의 난’ 때문에 잃을 뻔했던 인조 정권이 이후 ‘정권 보위’에 모든 것을 걸면서 파행의 길로 빠져들었다고 강조했다. 내전(內戰)이라 할 수 있는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크게 훼손된 데다 이후 권력을 지키는 데만 몰두하면서 ‘반정’ 당시 내세운 개혁 의지는 사실상 사라졌다고 비판했다. 그 귀결이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후금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이렇다 할 대책 없이 후금과 화의(和議)를 맺는데 급급했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정묘호란 이후에는 ‘명의 신하’이자 ‘후금의 아우’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아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가 격렬한 갈등을 벌이는 와중에 근본주의적인 대외인식을 바탕으로 미봉책으로 일관하다가 병자호란을 맞아 항복하는 비극을 맞았다는 것이다.
구범진 교수가 청의 강력한 의지와 조선의 군사적 열세 때문에 병자호란 발생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데 비해 한명기 교수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는 우선 1636년 봄 칭제건원 사실을 알리려 청 사신들이 서울에 왔을 때 조선의 척화파들이 ‘오랑캐 사신의 목을 치자’고 주장하는 등 모험주의에 가까운 대응을 보였던 것을 문제 삼는다. 이어 청 사신 일행이 도주하고 왕래가 끊겨 청이 곧 침략해 올 것이라고 나라 전체가 두려워하고 있던 상황에서도 이렇다 할 대책이나 외교적 노력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던 것도 문제 삼는다. 당시 최명길 등은 청의 침략을 피해 보고자 ‘사신을 보내 청의 동향과 의도를 탐지하여 타협을 모색하자’고 외쳤지만, 척화파들은 최명길의 주장을 ‘명을 배신하고 국시(國是)를 내팽개치는 행위’라고 매도한 바 있다.
한교수는 특히 ‘오랑캐 사신의 목을 치자’는 주장이 청 사신들에게 누설되었던 것과 청 사신 도주 이후 청에 대한 적개심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을 담은 인조의 유시문(諭示文)을 갖고 평양으로 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한창 도주하고 있던 청 사신 일행에게 붙잡혀 유시문을 빼앗겼던 것 등을 당시 인조정권이 드러냈던 중대한 문제점으로 지적한다.병자호란과 관련하여 구범진 교수가 ‘조선은 아무런 대책 없이 그저 청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라고 보는 데 비해 한명기 교수는 1636년 봄 이후 조선의 대청정책과 행보에 주목하면서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과 관련하여 ‘조선의 의지와 능동성’을 중시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만주어와 청사 전문가인 구범진 교수는 2019년 2월에 출간된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이라는 책에서 병자호란은 조선의 위정자들이 자초한 인재가 아니라 홍타이지의 조선을 복속시키려는 굳은 의지 때문에 조선이 어떤 태도를 취했든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군사력의 열세로 인해 필연적으로 질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인조 정권의 외교, 내치 실패를 집중적으로 부각하는 한명기 교수와는 다소 견해 차이가 있다.
한명기 교수는 조선 중기를 다룬 학술 논저 여러 편을 썼다.
''4-1.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1999년 역사비평사에서 출간한 책이다. 우선 제목부터 임진왜란을 조선과 일본의 전쟁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대세였던 당시 풍토에서 학계와 일반에 신선한 충격을 준 책이다. 이 책은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조선 참전이 조명관계(朝明關係) 전반에 남긴 영향을 정치외교, 사회경제, 문화적 측면을 망라하여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한교수는 이책에서 일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이 명군의 참전과 원조를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숭앙하게 되고, 그 재조지은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까지 조선 지배층의 사고와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 즉 임진왜란 이후 조선 지식인들은 ‘재조지은’을 베푼 명을 숭앙하고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되었고, 그 같은 자세가 임진왜란 이후 명청교체(明淸交替)라는 대변혁을 맞이했을 때 조선의 대외적 행보를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한명기 교수는 이 같은 논지를 바탕으로 대외정책의 특성을 고려하여 선조, 광해군, 인조대의 성격을 각각 ‘재조지은의 형성기’, ‘재조지은의 변형기’, ‘재조지은 복구기’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당시까지 국내 연구자들이 거의 이용하지 못했던 『명실록(明實錄)』,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 『거위재집(去僞齋集』, 『동사잉언(東事剩言)』, 『동강시말(東江始末)』, 『변사소기(邊事小紀)』, 『석은원장고(石隱園藏稿)』, 『양조종신록(兩朝從信錄)』, 『유헌기사(輶軒紀事)』 등 중국 측의 방대한 자료를 최초로 본격적으로 활용하여 논지를 전개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월봉집(月峯集)』, 『관감록(觀感錄)』, 『문흥군공우록(文興君控于錄)』, 『송담집(松潭集)』, 『유연당집(悠然堂集)』, 『화음집(華陰集)』 등 규장각 등지에 숨어 있던 조선시대 사료들을 대대적으로 인용하여 그 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을 대거 발굴해 논지를 펼쳤다.
1593년 1월, 명군이 벽제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명은 전투가 아닌 협상을 통해 일본과 강화(講和)를 맺고 전쟁을 끝내려 했다. 그 과정에서 명은 조선의 반대를 철저히 무시하고 일본과 밀실협상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게도 자신들의 협상에 동의하고 자신들의 허락없이 일본군을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고 강요했다. 선조가 ‘원수(怨讐) 일본과 협상은 있을 수 없다’고 끝까지 거부하려 하자 명에서는 선조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조선을 명의 직할령(直轄領)으로 삼아 통치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분출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명의 일방적인 강화 협상 추진에 격하게 반대했던 선조는 전쟁이 끝난 뒤 ‘재조지은’을 숭앙할 것을 누구보다도 강조했다. 공신(功臣) 선정 과정에서 ‘명군이 없었으면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없었다’고 단언하면서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군 장졸들의 활약은 평가절하하는 자세를 보였다. 한교수는 이 대목에 주목하여 ‘일본군과 싸움을 포기한 명군을 그토록 비판했던 선조가 종전 이후 이렇게 재조지은을 강조했던 것은 전쟁 초반 의주(義州)로 피난했던 것 말고는 국난 극복 과정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보여주지 못했던 그가 정치적 곤경에서 벗어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교수에 따르면 재조지은을 강조하면 할수록 임진왜란 극복 과정에서 명군의 역할은 절대화되고, 이순신 같은 조선 영웅들의 활약이 갖는 의미는 축소되면서―국난 극복 과정에서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해 이순신의 빛나는 활약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선조가 정치적 곤경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설파했다. 즉 ‘재조지은’ 강조에 깔린 정치적 복선(伏線)에 주목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에서도 은(銀) 경제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아지고 중상론(重商論)이 확산되었던 것을 밝혀낸 것도 이 책의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이렇게 임진왜란 당시 명군 참전이 남긴 영향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것과 함께 이책의 백미는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조명관계에 미친 파장을 생생하게 밝혀낸 사실이다. 한명기 교수는 명의 신료들이 『양조종신록』 등에서 ‘인조반정’을 ‘반정’이 아닌 ‘찬탈(簒奪)’로 기술했던 사실 등에 주목하여 1623년 정변 발생 직후 명나라가 보인 반응을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특히 『경정집(敬亭集)』, 『명희종실록(明熹宗實錄)』 등 관련 사료는 물론 국내 연구자 가운데 최초로 명의 호부시랑 필자엄(畢自嚴)의 『석은원장고』에 실린 「조선정형소(朝鮮情形疏)」를 치밀하게 분석하여 명나라가 ‘인조반정’에 보였던 대응을 양면적이라고 규정했다. 즉 명은 조선의 정변을 ‘반정’이 아닌 ‘찬탈’로 규정하면서 인조정권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당시 후금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던 현실에서 인조정권을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명에서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동림당(東林黨) 계열의 신료들이 전자의 주류였다면 조선을 후금과 군사적으로 대결시켜 이용하려 했던 엄당(奄黨) 계열의 신료들은 후자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양면적 분위기 속에서 명은 대국(大國)이자 책봉국(冊封國)으로서의 명분과 조선을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실리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인조를 조건부로 책봉했다는 것이다. 즉 인조반정을 ‘찬탈’로 비판하면서도 인조정권이 후금과 적극적으로 싸워 줘야만 인조를 책봉한다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한명기 교수는 “인조 정권은 출범 직후부터 이 같은 의도를 지닌 명에게 내내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모문룡(毛文龍) 같은 ‘시한폭탄’을 어쩔 수 없이 끌어안게 되고 끝내는 후금과의 관계가 위기로 치닫게 되고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본다.
한명기 교수가 이책에서 제시한 ‘재조지은 체제’라는 개념은 일부 연구자들로부터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이 시기를 다룬 연구서들은 한명기 교수의 주장을 능가하는 새로운 논지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명군 참전이나 ‘인조반정’을 둘러싼 조명관계와 관련하여 활용 자료의 폭과 깊이에서 이책을 넘어서는 연구서는 아직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한명기 교수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출간된 지 26년이 지났지만 전문 학술서로는 이례적으로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 역사비평사에서 출간된 「역비한국학연구총서」 가운데 단연 가장 많은 판매 부수를 기록하고 있다.
4-2. 광해군-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한명기 교수가 2000년 출간했던 첫 대중서이다. 정식 제목은 『광해군―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이다. ‘쫓겨난 군주’라는 이유 때문에 광해군을 ‘혼군(昏君)’, ‘폐주(廢主)’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종래까지의 분위기에 커다란 충격을 준 책이다. 이책의 출간을 계기로 학계와 대중들 사이에서 광해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일각에서는 ‘광해군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이 책은 제목만 보면 광해군을 긍정 일변도로 평가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광해군이 임진왜란 직전 왕세자로 전격 책봉된 이후 분조(分朝) 활동을 통해 전란 극복에 크게 기여했던 것, 즉위 초반 정치적 안정을 통해 민생을 회복하고 전란의 상처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것, 명과 후금의 대결 국면을 맞아 양단(兩端)을 걸치면서 실리외교를 펼쳤던 것 등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광해군이 이이첨(李爾瞻) 등 측근 세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폐모논의(廢母論議) 등에 휘말려 정치적으로 균형 감각을 잃었던 것,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미신에 빠져 토목공사에 몰두하다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려 결국 몰락하게 된 것 등은 맹렬하게 비판했다.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가깝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광해군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한편 이 책에 대한 비판과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오항녕 교수는 기본적으로 이책이 ‘혼군’이자 ‘폭군’인 광해군을 미화했다고 본다. 특히 한교수가 광해군의 토목공사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지 않았다고 몹시 부정적으로 본다. 뿐만 아니라 한교수가 광해군의 실리적인 양단 외교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 오교수는 ‘1619년 심하(深河) 전투 당시 조선군 1만 3천 병력 중 8천 명을 잃었는데 그것이 과연 실리냐?’며 비판했다. 오항녕 교수는 또한 한교수가 일본인 학자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의 논지로 회귀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오항녕 교수의 비판은 일부 측면에서는 경청할 내용도 있다. 그는 실제로 한교수의 이 책을 의식하여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하지만 오항녕 교수의 비판이나 책의 내용은 문제점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광해군 연구와 관련하여 기본 사료인 방대한 분량의 『광해군일기』를 꼼꼼하고 치밀하게 읽은 바탕 위에서 비판을 하거나 책을 쓴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 예로 오교수는 “1619년 심하전투 당시 수천 명의 조선군이 전사하자 명 황제가 유가족들에게 은(銀) 1만냥을 하사했는데 광해군은 그것을 유가족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자신이 착복했다”고 단정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전후의 기록을 보면 광해군과 신료들은 당시 조선의 농촌에서 은이 제대로 유통되지 않는 현실을 염두에 두고 유가족들에게 은 대신 다른 물자를 나눠주는 문제를 논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오항녕 교수의 비판과 저술에는 이런 식의 문제점들이 적지 않다.
4-3.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한명기 교수가 2009년에 출간한 학술서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상처’로 점철된 조선중기 대외관계사의 내러티브를 다룬 책이다. 개별적으로 발표했던 기존 논문들을 수정하거나 보완하고 새로운 원고를 추가하여 책을 구성했다.
이 책은 한중일을 아우르는 정묘·병자호란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주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정묘호란과 조선·후금 관계」, 「정묘 화약의 균열과 병자호란의 발생 과정」, 「병자호란과 조청관계」, 「정묘호란과 조일관계의 추이」, 「병자호란 무렵 조선의 대일정책과 인식」, 「병자호란 직후 대청인식의 변화 조짐」, 「병자호란 시기 조선인 피로인(被擄人) 문제 재론」, 「정묘·병자호란 시기 이신(貳臣)과 조청관계」,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대청 ‘순치(馴致)’ 과정」 등이 그것이다.한교수는 종래까지 정묘호란의 원인을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 때문이라고 설명했던 통설과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집권 이후 인조 정권이 친명을 한 것은 맞지만 배금을 실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 방식으로 어렵게 권력을 잡은 상황에서 인조정권은 대외적으로 ‘모험’을 벌일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상 광해군 정권의 대외정책과 유사하게 ‘배금’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모문룡(毛文龍) 문제 등에 휘말려 후금의 침략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본다.
한교수는 병자호란이 인조대 정국에 남긴 영향에도 주목했다. 구체적으로 청이 삼전도에서 항복을 받은 이후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간시켜 청에 대한 충성 경쟁을 유도했다고 분석했다. 소현세자를 심양에 안치시켜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그에게 제시하면서 때로는 인조를 입조(入朝)시키겠다고 협박하면서 조선을 길들이려 했다는 것이다. 청은 그 과정에서 인조를 ‘이미 죽은 임금〔旣亡之君〕’으로 치부하거나 때로는 소현세자를 즉위시켰어야 했다는 이야기를 흘리면서 인조를 결국 친청주의자(親淸主義者)로 변신시키는데 성공하게 된다.
주목되는 것은 정묘·병자호란이 기본적으로 조선과 후금(청) 사이의 전쟁이었음에도 한교수의 시선과 문제의식이 당시 조선과 일본 관계에까지 미치고 있는 점이다. 한교수에 따르면, 임진왜란을 도발하여 조선으로부터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로 매도되었던 일본은 두 차례 호란을 계기로 발 빠른 행보를 보인다. 위기에 처한 조선에 ‘조총과 화약 등 무기를 원조하겠다’고 접근하는가 하면 조선이 곤경에 처한 상황을 교묘히 활용하여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최대한으로 챙기려는 자세를 보인다.
한교수에 따르면 1627년 조선과 후금이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지만 이후 정세의 변화에 따라 양국 관계는 요동쳤다. 실제로 후금이 조선을 향후 어떻게 대할 것인지 방향을 확정한 것은 1633년 6월의 일이었다. 당시 후금은 명으로부터 귀순한 공유덕(孔有德), 경중명(耿仲明) 등을 통해 상당한 수의 전함과 수군(水軍), 홍이포(紅夷砲) 등을 획득하여 군사적 역량이 이전보다 크게 신장된 상황이었다. 자신감이 커진 후금 군신들은 명나라, 몽골, 조선 가운데 어디를 먼저 정복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회의를 열었다. 회의의 결론은 이러했다. 조선을 언젠가는 정복하되, 명과 몽골을 복속시키기 전까지는 회유하고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취한다는 방침을 정했다는 것이다. 즉 조선은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그들의 침략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과연 어떻게 했어야 할까? 한교수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탐구하는 과정에서 이 책이 나오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또한 17세기 초 명을 버리고 청으로 투항한 한족(漢族) 출신 이신(貳臣)들의 존재에도 주목한다. 이전까지 한국 학계에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교수에 따르면 이들 이신들이 청군의 일원으로 병자호란에 가담하고, 전쟁 이후 청이 조선을 ‘길들이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즉 이신들이 청 조정에 ‘과거 명이 조선을 길들이던 노하우를 전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주족은 그렇지 않았는데 오히려 한족 출신 이신들이 조선에 대한 악감정을 품고 조선 사람들도 치발(薙髮)해야 한다고 채근했던 사실 등의 자료도 꼼꼼히 찾아냈다.
이밖에 병자호란 당시 청으로 끌려간 조선인 피론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복원한 것, 피로인으로 끌려간 지 각각 28년과 37년 만에 탈출해 돌아왔다가 다시 버림받았던 안추원(安秋元)과 안단(安端) 관련 역사적 사실을 발굴해 낸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을 한중일을 동시에 아우르는 동아시아 전체의 시각에서 접근하려고 한 점이 돋보인다.
한교수는 이 책에서 또한 조선 지식인들의 대청인식(對淸認識), 북학론(北學論)의 단초라고 할 수 있는 김종일(金宗一, 1597~1675)의 대외인식 등 종래까지 역사 학계에서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주제들을 광범한 사료들을 기반으로 선구적으로 천착했다. 요컨대 이 책 또한 한국사 연구의 시야를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시켰다는 평가를 받은 문제작이다.
4-4.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
한명기 교수가 2013년 출간한 두 번째 대중서이다. 병자호란을 ‘국제전쟁’으로 조망한 최초의 본격 통사(通史)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한교수가 출간했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09) 등 학술서 등의 내용을 바탕으로 2007년1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서울신문』에 2년 동안 매주 연재했던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원고를 합쳐 재정리하고 보완한 것이 이 책이다.
잘 알고 있듯이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9일(음력) 시작되어 1637년 1월 30일에 끝난 청의 조선 침략 전쟁이다. 1592년의 임진왜란, 1627년의 정묘호란으로 인해 이미 쇠락해진 조선은 청이 침략한 지 두 달여 만에 항복하고 만다.
1627년 정묘호란 뒤 후금은 조선과 형제 관계를 맺으면서 평화 유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점차 조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워졌다. 거기에 조선 집권층의 강렬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이 더해지면서 조선과 후금 관계는 파탄을 향해 치닫는다. 급기야 후금은 1636년 4월,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홍타이지〔皇太極〕는 제위에 오르는 즉위식을 갖는다. 그런데 즉위식에 참석했던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은 홍타이지에게 절을 올리는 예를 거부했다. 격분한 홍타이지는 조선이 왕자를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조선 조정은 격분했다.
청군은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밀려든다. 청군 철기(鐵騎)의 가공할 기동력과 전투력을 당해 내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45일 만에 항복했다. 삼전도(三田渡)에서 인조는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치욕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고통은 처참했다. 10만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청에 포로로 끌려가 노비로 전락했다. 비싼 속환가(贖還價)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어려웠지만 돌아온 후에도 ‘정절을 잃은 여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렇게 전쟁은 백성들에게 돌아갈 ‘조국’마저 앗아갔다.
한교수는 정묘호란 이후 조선을 명과 청,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국이자 ‘종속변수’라고 규정했다. ‘끼어 있는’ 약소국이 자존을 유지하며 생존하려면 역량을 키우는 것이 절실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시간 안에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극히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하지만 인조정권은 그러지 못했다.
한교수는 먼저 ‘정권 안보’에만 급급했던 인조 정권의 난맥상을 지적한다. 인조반정은 분명 나름대로 명분과 정당성이 있는 정변이었다. 광해군 정권에게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정 주도 세력들은 집권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광해군대의 ‘부정과 비리’를 소리 높여 질타했지만 그들 또한 집권한 뒤에는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적산(賊産) 탈취, 권력 남용, 인사의 난맥상 등이 잇따라 불거졌다. 그 귀결이 이괄의 난이었다. 이괄의 난 진압 이후에는 어렵사리 되찾은 정권을 보위하는 데 급급하다가 날이 새고 말았다. 새 정권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의 실망은 컸다. ‘당신들과 그들이 무엇이 다른가?’라는 냉소와 비아냥이 번져갔다.
한교수는 병자호란 전후한 시기에도 이 같은 문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썼다. 인조 정권은 ‘유사시 강화도로 들어가 청에 저항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막상 청군의 침략이 시작되자 입도(入島)조차 못했다. 무능력과 무책임의 산물이었다. 청군의 기만전술에 속아 침략 사실조차 제때 보고하지 않고 한번 패한 뒤에는 근왕을 포기하고 숨어버렸던 김자점, 사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아들을 강화도 검찰사로 임명하는 데 동의하고 병사(兵事)의 기본조차 모르면서 장졸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김류, 자신의 가족과 인척들을 강화도로 가는 배에 먼저 태우고 세자빈마저 김포 쪽에 방치했던 김경징 등의 행태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적과 싸우겠다고 호언장담만 했을 뿐 국정 전반은 ‘나사가 풀린 상태’였던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교수는 무엇보다 인조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인조는 ‘명을 배신한 패륜 정권을 응징한다’는 명분과 공약을 내세워 집권했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면서 일관성 없는 즉흥적 대책으로 안팎으로 곤경을 자초했다. 광해군이 생모(生母)를 추숭했던 것을 맹렬히 비난했으면서도 자신은 생부(生父) 추숭에 더 강하게 집착했다. 국방 대책 마련과 민생 안정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것들을 위해 꼭 필요한 정책 실천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내수사(內需司)와 궁가(宮家)들에게 부여했던 경제적 특권을 줄이거나 철폐하라는 요청에는 귀를 닫았다. 그리고 일이 터져 나올 때마다 백성들에게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사과’로 점철되어 있던 시대였다.
한교수는 인조 정권을 가리켜 “과거 정권을 뒤엎는 ‘파괴’에는 성공했지만, 집권 이후 새로운 차원으로 ‘건설’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건설은커녕 ‘정권 안보’에만 급급하다가 ‘국가 안보’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 피해는 온통 백성들이 뒤집어썼다. 조선 역사의 비극이었다.
한교수는 또한 인조 정권이 대외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주관적으로 규정하려 한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그러다 보니 명과 후금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후금에 대한 대책 또한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1619년(광해군 11) 명의 강요에 떠밀려 조선군이 참전했던 사르후(薩爾滸) 전투에 대한 인조 정권의 시각과 해석이었다. 광해군은 후금과 원한을 맺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원정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인조는 명의 거듭된 압박과 신료들의 집요한 채근에 밀려 1만 3천의 병력을 파병했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넌 뒤 명 장수 유정 휘하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1619년 3월, 심하(深河)에서 후금군의 기습에 휘말려 병력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왜 이런 참극이 빚어졌을까? 그것은 전적으로 명군의 난맥상 때문이었다. 당시 명군은 절대로 후금군을 이길 수 없었다. 병력, 무기, 작전, 기율, 지휘관의 역량, 인화인화(人和) 등 모든 측면에서 명군은 열세였다.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집중시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판에 명군은 병력을 넷으로 나누는 실책을 저질렀다. 네 부대를 지휘했던
두송,
마림,
이여백,
유정 등 장수들은 서로 전혀 화합하지 못했다. 특히 두송은 공을 독점하려는 욕심 때문에 일제히 출전하기로 약속했던 날짜를 어기고 먼저 출전했다가 사르후에서 후금군에게 전멸되었다. 그 때문에 나머지 부대들 또한 후금군에게 각개격파되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군은 유정의 강압에 떠밀려 군량 보급로도 확보하지 못한 채 무조건 전진하다가 후금군의 기습에 휘말렸다. 참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한교수에 따르면, 실상이 이러함에도 인조 정권은 사르후 전투 참패의 원인을 오로지 조선군 탓으로 돌렸다. ‘광해군이 미리 투항을 지시하고 기밀을 누설했기 때문에 명군이 참패했고 요동 전체가 넘어갔다’고 말이다. 이전 정권의 ‘허물’을 부각시켜 자신의 집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명 조정으로부터 승인을 얻어내려는 목적이었다. 이 대목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인조는 즉위 직후―명이 공식적으로 출병을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명사(明使)에게 출병 기일을 알려주면 병력을 동원하여 후금 토벌에 동참하겠다고 다짐한다. 명과 후금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했던 섣부른 약속이었다. 당시 명은 후금을 공격할 의지나 여유가 없었다. 천계 황제의 무능, 환관 위충현의 전횡 아래서 명의 내부는 곪아 터지기 직전이었다. 반면 후금의 정치, 군사적 역량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즉위 직후 인조가 후금을 치겠다고 섣불리 약속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타고난 존명(尊明) 의식에 권력을 잡은 직후 넘쳐났던 자신감에서 비롯된 언사였을 것이다. 그와 함께 명과 후금의 역량과 정세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부터 부정확한 정보에 주관적인 해석까지 더해지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매몰되어 실현 가능성이 없는 약속이나 공약을 남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문룡(毛文龍)을 비롯한 명측 인사들에게 ‘후금을 토벌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먼저 다짐했다가 역풍을 맞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요컨대 인조 정권은, 광해군 정권이 아무리 밉더라도 사르후 전투와 관련된 사실은 ‘사실’대로 인지했어야 했다. 하지만 싸움의 주체인 명군의 문제점이나 후금군의 장점은 전혀 알려하지 않고, 원정 실패의 모든 책임이 광해군 정권에 있다고 규정해버렸다. 이렇게 ‘팩트Fact’에 눈감고 그것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자세를 지속하면서 문제점은 계속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한교수는 이 책에서 병자호란을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닌 ‘전략적인 오늘을 위한 거울’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교수는 유사 이래 변하지 않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을 거론한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 상황을 ‘복배수적腹背受敵’이라고 표현했다. ‘배[腹]와 등[背] 양쪽에서 적이 몰려오는 형국’이라는 뜻이다. 조선은 정면의 중국 대륙과 배후의 일본 열도 사이에 ‘끼인 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정면이나 배후에서 기존 질서의 판이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면 ‘끼인 자’ 한반도의 처지는 심각해진다.
기존의 패권국이 쇠퇴하는 조짐을 보이고, 새로운 강국이 떠올라 패권국에게 도전하는 상황이 되면 ‘끼인 자’는 위기를 맞는다. 조선 역시 그랬다. 몽골족의 원이 쇠퇴하고 한족의 명이 떠오르던 14세기 후반에는 왜구(倭寇)의 발호가 극심해지고 홍건적(紅巾賊)이 고려로 밀어닥쳤다. 명이 쇠망의 조짐을 드러내고 일본이 굴기하던 16세기 말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으로 명이 더 쇠약해지고 누르하치의 만주가 떠오르던 17세기 초반에는 병자호란을 겪었다. 아편전쟁 이후 청이 쇠퇴하고 일본이 다시 굴기하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한반도를 할퀴었다. 14세기 후반 이래 주변에서 힘의 전이가 벌어지면 한반도는 어김없이 전쟁터가 되었다.
한교수는 병자호란 무렵의 ‘복배수적’의 상황이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오늘날 격화되는 미중 경쟁 속에서 트럼프 재선 이후 한반도 주변의 정세는 예측 불가의 상황을 맞고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과거처럼 약소국은 분명 아니지만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비하면 여전히 ‘끼여 있는 처지의 상대적 약속국’임은 변한 것이 없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끼여 있는 ‘약소국’이 복수의 강대국 모두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강대국들끼리의 관계가 계속 적대적이 되면 ‘끼인 자’는 결국 선택의 기로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한교수는 1627년 정묘호란 이후 조선이 ‘황제의 나라’ 명, ‘형의 나라’ 후금, ‘원수의 나라’ 일본과의 관계를 ‘모두’ 우호적으로 유지하려다가 끝내는 파국으로 내몰렸던 전철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오늘 대한민국은 최악의 경우 다시 ‘선택의 기로’로 내몰릴지도 모르는 위기를 맞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교수는 전략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미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활로를 찾으려 애쓰되 우리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일정 정도 이상의 독자적인 역량이 없을 경우, 외교적 노력은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군사력을 비롯한 국가적 역량이 변변치 못한 상태에서 명과 청의 대결 속으로 속절없이 휘말렸던 병자호란의 전철을 돌아보면 ‘역량 확보’는 절박하다. 경제적 실력, 군사적 역량, 문화적 매력 등에서 주변 열강이 무시할 수 없는 ‘근사한 민주국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책의 소재는 병자호란이라는 과거이지만 한교수의 궁극적인 관심은 오늘 현실에 맞춰져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이렇게 썼다. “병자호란은 ‘과거’가 아니다. 어쩌면 서서히 진행되는 ‘현재’일 수 있으며, 결코 ‘오래된 미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 시대의 비망록”이라고 말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는 광범위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사는 물론 중국사, 일본사의 연구 성과까지 흡수하여 확고한 시야의 국제성을 지닌 역사책이다. 또 ‘과거’이자 ‘역사’로서 병자호란을 다루면서도‘오늘’의 우리가 직면한 ‘과제’를 푸는 데 필요한 반면교사로서 승화시킨 문제작이다. 나아가 복잡하고 전문적인 역사적 사실을 간결하면서도 유려한 문체로 재구성해 낸 스토리텔링의 매력이 넘치는 책이기도 하다.
이 같은 장점을 인정받아 이 책은 2013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하는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이책에 대해 일각에서는 나만갑의 『병자록』을 무 비판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교수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는 『병자록』에서 나만갑이 김류나 김자점 등을 악의적으로 서술했다고 보지 않는다. 인조 초에 나만갑이 김류 등과 대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병자호란 발생 직후나 남한산성, 강화도에서의 농성 과정에서 김류나 그의 아들 김경징이 보여준 난맥상과 문제점에 대해 비판한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병자호란의 전황을 서술할 때 민감한 부분에서도 병자록을 무 비판적으로 인용했다’는 비판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또 ‘만주어 사료를 거의 인용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는데 한교수는 기본적으로 병자호란의 개전 사유에 대해서는 별로 비중을 두고 서술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주로 병자호란 전후의 동아시아 정세와 조선의 내치, 정책 결정 과정, 강화 협상 과정, 피로인 문제, 조일관계 등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측 사료에만 기반한 병자호란 개전 사유 및 전황 서술은 구멍이 뻥뻥 뚫린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는 비판은 정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여전히 병자호란 전후의 동아시아 정세와 조선의 내치, 전황, 강화 협상 과정, 전쟁 중의 조선과 일본의 관계 등 병자호란과 관련된 다방면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서술한 책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이 책이 역사서로서 드물게 이미 5만부 이상 판매되고 여전히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4.5. 최명길평전2019년 11월 출간한 한명기 교수의 세 번째 학술서 겸 대중서이다.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가 전쟁을 둘러싼 시대와 상황, 대외관계, 외교정책, 사상의 변화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면 이 책은 그야말로 최명길(崔鳴吉)이라는 당시를 살았던 문제적 인간을 정면에서 조망한 인물전(人物傳)이자 평전(評傳)이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최명길을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金尙憲) 등 척화파(斥和派)와 대비되는 주화파(主和派)의 핵심 인물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교수는 최명길의 『지천집(遲川集)』을 비롯하여 한중일 3국을 아우르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치가, 관료, 외교관, 사상가, 경세가(經世家) 등 다양한 얼굴을 지닌 인간 최명길의 복합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 책에서 한교수가 그려내고 있는 최명길의 삶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모습이다. 최명길은 기본적으로 난세를 살았던 사람이었다. 1586년 생으로 어려서는 임진왜란을 겪었고 벼슬에 나아간 뒤에는 ‘인조반정’에 참여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20세에 생원시와 진사시,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머리가 명석했지만 어려서부터 체구도 작은 데다 병약하여 평생 약을 달고 살아야 했다. 문관이지만 군사훈련을 직접 실행하고 전차(戰車)까지 만든 실천적인 지식인이었던 아버지 최기남(崔起南), 전국의 관찰사를 역임하여 행정 실무와 변방 사정을 잘 알았던 장인 장만(張晩), 주자학이 판치던 시대에 주역에 통달하고 양명학에 조예가 깊었던 스승 신흠(申欽),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추앙받던 친구 장유(張維)는 최명길의 삶과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4인의 인물들이었다. 최명길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일생 동안 자기 소신이 뚜렷하면서도 유연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
최명길은 광해군 때 벼슬에서 쫓겨난 뒤 경기도 가평 대성리에 머물면서 주역 공부에 매진하여 수천 번을 읽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인간과 세상을 보는 눈이 트이고, 심지어는 ‘인조반정’ 거사의 날짜를 직접 뽑는 경지까지 이르게 된다.
인조반정 이후 민완한 관료이자 개혁가로서 광해군대 자행된 난정(亂政)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나라와 민생을 개혁하고자 했던 최명길은 늘 ‘자기 관리’에 엄격했다. 이른바 ‘반정’ 성공 이후 권력과 부와 명예를 차지했던 대다수 공신들이 사익(私益) 추구에 몰두했던 것과는 기본적으로 결이 다른 인물이었다.
한교수가 특히 주목했던 것은 그가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지만, 집권 이후 광해군 정권의 장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계승하려고 시도했던 사실이다. 즉 최명길은 ‘폐모살제’, ‘토목공사 몰두’ 등 광해군의 내정(內政)에 대해서는 비판했지만, 광해군이 취했던 실리외교에 대해서는 나름의 성과를 인정하고 절대 비판하지 않았다. 한 예로 ‘반정’ 성공 이후 인조와 대다수 공신들이 광해군 정권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엽(朴燁)을 곧바로 처단하려고 했지만 최명길은 강하게 반대했다. 최명길은 “박엽이 기본적으로 전 정권의 인물이고 포학하다는 평판이 있지만 오랫동안 명과 후금과의 외교 일선에서 활약하여 상당한 역량을 갖춘 외교관이자 무장”이라고 평가했다. 최명길은 인조정권 출범 직후 후금의 침략이 우려되던 시기에 ‘노련한 외교관’이자 오랫동안 ‘대후금 창구’ 역할을 해온 박엽을 다시 등용하여 국가적 위기를 막아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비록 행실에 하자가 있고 지난 정권의 인물일지라도 현재의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주저없이 기용하자는 유연하고 실용적인 사고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한교수는 이어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점철되는 인조대의 격변을 맞아 최명길이 담당했던 역할, 나아가 리더십의 특징을 크게 3가지로 요약하여 서술한다.
1636년 12월 14일, 침략자 청군이 지금의 녹번동까지 도달하고,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인조와 조정 신료들이 숭례문 부근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최명길은 자발적으로 적진으로 달려간다. 주군 인조에게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살신성인의 행동이었다. 최명길이 보인 리더십의
첫째 덕목은 투철한 희생정신이다. 최명길은 청과의 전쟁이 임박하여 척화파들이 ‘청과의 결전’을 주장하면서도 유사시에는 강화도로 들어갈 것을 주장했을 때 유일하게 반대했다. 진짜 싸울 의지가 있으면 압록강 변에서 싸우자고 주장했다. 나아가 “청에 사자를 보내 적정(敵情)을 정확히 파악하자”고 강조했다. 그리고 실제로 남한산성에 포위된 상황에서도 수시로 적진을 오가며 적정을 파악하고 협상을 주도했다. 최명길 리더십의
두번째 덕목은 철저한 실사구시와 ‘정보 마인드’였다.
수많은 여성 피로인들이 청으로 끌려가 고통받고 있을 때 진심을 다해 그들을 구호하면서 조선으로 데려오려고 노력했던 유일한 인물도 최명길이었다. 실제로 종전 이후 대다수 신료들은 ‘전쟁 책임’ 문제 등에 매달려 공허한 설전만 벌이고 있었다. 최명길은 피로인 여성들을 심양으로부터 조선까지 안전하게 데려오기 위해 진력하고, 여성들이 본래의 남편과 이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척화파들은 그에게 ‘매국노’라는 오명에 더해 ‘강상윤리를 망친 인물’이라고 매도했지만 최명길은 개의치 않았다. 전란의 최대 희생자인 여성 피로인들이 직면했던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고통에 유일하게 눈을 돌렸던 인물이 바로 최명길이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려 했던 최명길 리더십의 세번째 덕목은 구체적 대안을 제시했던 經世家였다.
한교수는 이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그는 종래까지 병자호란을 ‘삼전도의 굴욕’으로 대표되는 치욕적 전쟁이라고 가르치면서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것을 문제 삼는다. 그러면서 병자호란을 이해하는 틀을 바꿀 것을 주장한다. 김상헌, 최명길을 평가할 때도 누가 더 백성을 위했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남한산성에서의 저항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김상헌 등 척화파들이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에 항복하느니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다 죽어도 장렬하게 옥쇄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명길은 “나라가 살고 백성이 살 길이 있는데 왜 옥쇄하느냐?”고 맞섰다.
최명길이 옳았다. 만주족의 청은 인조를 무릎 꿇리고 7년 뒤 명나라를 접수했다. 그리고 이후 1911년까지 만주족의 청제국은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호령했다. 하지만 오늘 만주족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 그들은 사실상 한족에게 동화되어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견디기 어려운 비난과 오명을 감수하면서 투철한 희생정신, 실시구시와 ‘정보 마인드’, 그리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한 경세가’ 최명길 덕분에 조선은 살아남았다. 오늘의 대한민국도 그래서 존재한다.
최명길을 재발견하게 해준 한명기 교수는 『최명길 평전』의 뒷 표지에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다.
“모두가 그가 연 문을 통해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모두가 그를 비난했다”고.
그랬다. ‘세상 사람 모두를 살렸지만 그래서 세상 사람 모두의 비난을 받았던 사람, 하지만 꺾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 바로 최명길이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이야기’가 바로 한명기의 『최명길 평전』이다.
나만갑의 『병자록』을 너무 무비판적으로 인용한 감이 있다. 나만갑은
인조반정 공신 세력인 공서파와 첨예하게 대립한 청서 세력에 속한 사람이었고, 이 때문에 병자록에 공서의 영수인
김자점이나
김류 등에 대해 악의적인 기술을 해 놓았다. 그런데 한명기는 병자호란의 전황을 서술할 때 민감한 부분에서도 병자록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였다.
게다가 후금/청측의 만주어 사료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는데, 구범진의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이 만주어 사료를 매우 광범하게 인용하여 병자록을 비롯한 조선측 사료에만 기반한 병자호란 개전 사유 및 전황 서술은 구멍이 뻥뻥 뚫린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드러내면서 이제는 "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나만갑의 『병자록』을 무 비판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교수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는 『병자록』에서 나만갑이 김류나 김자점 등을 악의적으로 서술했다고 보지 않는다. 인조 초에 나만갑이 김류 등과 대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병자호란 발생 직후나 남한산성, 강화도에서의 농성 과정에서 김류나 그의 아들 김경징이 보여준 난맥상과 문제점에 대해 비판한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병자호란의 전황을 서술할 때 민감한 부분에서도 병자록을 무 비판적으로 인용했다’는 비판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또 ‘만주어 사료를 거의 인용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는데 한교수는 기본적으로 병자호란의 개전 사유에 대해서는 별로 비중을 두고 서술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주로 병자호란 전후의 동아시아 정세와 조선의 내치, 정책 결정 과정, 강화 협상 과정, 피로인 문제, 조일관계 등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측 사료에만 기반한 병자호란 개전 사유 및 전황 서술은 구멍이 뻥뻥 뚫린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는 비판은 정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여전히 병자호란 전후의 동아시아 정세와 조선의 내치, 전황, 강화 협상 과정, 전쟁 중의 조선과 일본의 관계 등 병자호란과 관련된 다방면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서술한 책으로는 『역사평설 병자호란』만한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이 책이 역사서로서 드물게 이미 5만부 이상 판매되고 여전히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5.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2000년에 출간된 광해군의 평전으로, 부제가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라서 광해군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책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아니다.
임진왜란 때 분조를 성공적으로 이끈 것과 중립 외교를 한 것 외에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비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궁궐 공사와 같은 민생에 폐를 끼친 정책에 대한 비판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광해군을 평가했다는 평이 다수를 이룬다.
하지만 한명기 교수답게 인조반정 역시 ‘반정인가 찬탈인가’, ‘반정의 명분은 지켜졌는가’ 라는 소제목을 쓰며 맹렬히 비난했다.
2018년에 2판이 출간되었다. 우선 디자인이 깔끔하게 개선되었고, 2000년과 2018년의 상황이 달라진 것을 고려하여 편집자가 주를 달아 놓았으며, 그 외에는 딱히 달라진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6.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2009년에 출간되었다. 사실상 한명기 교수가 병자호란에 관해 쓴 논문을 모은 책이라 해도 무방하다. 여기에 전황과 협상 과정을 적절히 섞어 대중역사서로 변모시킨 게 역사평설 병자호란이라 할 수 있다. 읽어 보면 전황이나 협상 과정은 나오지 않고 정묘호란의 원인, 이 시기 각국의 관계, 이 시기 조선의 대청관계나 대일관계 같은 것을 논하고 있다. 병자호란에 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면 역사평설 병자호란의 후속편으로 읽어 보는 것을 추천.
7. 최명길 평전
2019년 11월, 신간으로
최명길 평전을 출간하였다.
8. 기타 저서
이 외에도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는데, 특히 공저가 많다. 대부분 병자호란 파트를 전담한다. (...)
1998년에 출간된 첫 저서. 제목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이지만 사실상 조선 중기의 한중관계를 다룬 논저라 해도 무방하다. 선조 - 인조 시기의 조명관계를 다룬다. 책 목차는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임진왜란과 대명관계
2. 광해군대의 대명관계
3, 인조대의 대명관계
-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한국역사연구회 소속 학자들의 논문을 엮은 책으로 한명기 교수는 '조청관계의 추이'라는 논문을 집필했다.
- 왕과 아들: 가장 최근에 출간된 책으로 한명기는 소현세자 파트를 맡았다.
- 정유재란사: 정유재란을 다룬 학술 논저로 역시나 공저이다. 한명기 교수는 맨 마지막의 정유재란의 교훈 파트를 맡았다. 한명기다운 파트 설정이다.
- 대통령의 책 읽기: 대통령에게 권하는 고전 책을 모은 것으로, 한명기는 징비록 파트를 썼다.
- 차이나는 클라스: 차이나는 클라스의 주요 강의를 모은 책인데 이 중 한명기 교수의 강의가 실렸다.
1.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