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성부(聖夫) |
출생 | 1876년[2] 2월 1일 |
경상도 진주목 사죽면 단동 (현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3] 768번지) | |
사망 | 1926년 12월 18일[4] (향년 50세) |
경상남도 진주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92호 |
본관 | 진주 하씨[5] |
가족 | 배우자 창녕 조씨 |
상훈 |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76년 2월 1일 경상도 진주목 사죽면 단동(현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768번지)에서 아버지 단파(丹坡) 하종원(河鍾源, 1849 ~ 1907.7.29.)[6]과 어머니 안동 권씨(1846 ~ 1919.3.6.)[7]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단파 하종원은 1889년(고종 26) 친군남영 초관(親軍南營哨官)[8], 1891년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9] 등을 지낸 무관이었다. 출생 이후 자식 없이 요절한 작은아버지 하정원(河正源, 1856 ~ 1874.8.23.)[10]의 양자로 입적되었다.1919년 4월 10일 진주 읍내에서 황종화(黃鍾和), 하남식(河南植)[11] 등 6명의 동지와 함께 경남단(慶南團)을 조직하고 6월 초순부터 9월 중순 사이에 하용제(河龍濟) 등 여러 명에게 가입을 권유하고 운동자금의 출자를 요구했다. 또한 6월 하순에 진주군 대곡면에 거주하는 하종식(河宗植) 외 8명을 경남단의 임원으로 임명한다는 의친왕 명의의 임명장을 경기도 경성부에서 돌아온 황종화로부터 건네받아 하종식 등에게 교부하는 역할을 맡았다.
1919년 7월, 진주군 평거면 귀곡리[12]에 거주하는 정태석(鄭泰奭)을 방문하여 경상남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부를 설치할 계획임을 말하고 원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8월 20일에 황종화와 의논하여 임시정부와 연락할 임무를 권태용 외 2명에게 맡겼다. 권태용은 무사히 중화민국 상하이시에 도착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경상남도 금전수입원으로 임명되어 9월 18일에 귀환했다.
이후에도 3차례 정태석을 찾아가 600원의 원조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지만, 정태석이 일본 제국 경찰에 고발하는 바람에 체포되었고,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사기미수 및 협박미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자택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1926년 12월 18일에 사망하였다. 유해는 경상남도 진주군 집현면 대암리에 안장되었다.
1993년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95년 5월 11일 배우자 창녕 조씨(1878 ~ 1942.5.11.)[13]의 유해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으로 이장되었다.
[1] 국립대전현충원 묘적부에는 하동노로 등재되어 있다.[2] 진양하씨대동보 4권 159쪽에는 1878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진주 하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하장환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진양하씨대동보 4권 159쪽에는 1925년 11월 14일에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5] 송강공파(松岡公派) 28세 동(東) 항렬.[6] 자는 성여(盛汝).[7] 권익봉(權翼鳳)의 딸이다.[8] 1889년(고종 26) 2월 17일 승정원일기 기사[9] 1891년(고종 28) 1월 29일 승정원일기 기사[10] 자는 명숙(明淑).[11] 독립유공자 하남식과 동명이인이다.[12] 현 진주시 귀곡동[13] 조기환(曺沂煥)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