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6 16:10:27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PUBLIUS LICINIUS CRASSUS
파일:비너스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데나리우스.jpg
<colbgcolor=#800080><colcolor=#ffffff> 출생 미상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로마
사망 기원전 53년
파르티아 제국 튀르키예 하란
지위 노빌레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조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아버지)
테르툴리아(어머니)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형)
코르넬리아 메텔라(아내)
직업 로마 공화국 레가투스

1. 개요2. 생애
2.1. 가문2.2. 유망한 젊은이2.3. 뛰어난 지휘관2.4. 파르티아 원정과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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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레가투스, 제1차 삼두정치를 이끌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들이다.

2. 생애

2.1. 가문

리키니우스 씨족은 플레브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축에 속하는 가문이었다. 기원전 494년 성산 사건이 발발한 후 플레브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도입된 호민관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고, 이 가문에 속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 에스퀼리누스가 파트리키의 전유물이었던 집정 무관에 플레브스 출신으로서 2차례(기원전 400년, 기원전 396년) 선임되었으며, 기원전 364년에는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가 가문 최초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이후 리키니우스 가문은 고위 행정관에 여러 차례 이름을 올리며 노빌레스로 거듭났다.

리키니우스 씨족의 지파인 크라수스 가문은 폰티펙스 막시무스(기원전 212년), 기병장관(기원전 210년), 감찰관(기원전 210년), 집정관(기원전 205년) 등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를 시작으로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하면서 리키니우스 씨족 중 가장 유력한 집안으로 거듭났다. 푸블리우스의 고조부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171년 집정관을 맡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군을 지휘했고, 증조부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127년 또는 126년에 법무관을 역임했다.[1] 또한 친척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당대 최고의 웅변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조부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97년 집정관을 역임한 뒤 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루시타니아인들과의 전쟁을 치러 승리를 거둔 뒤 기원전 93년에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레가투스를 맡아 전장에서 활약했다. 기원전 89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어 2달 안에 무기를 내려놓고 귀순한 모든 이탈리아인을 로마 시민으로 인정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켜 로마에 반기를 든 동맹시들의 명분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편에 서서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대적했다가 마리우스, 킨나 일당의 숙청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기원전 97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베눌레이아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또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낳았는데, 이중 막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가족이 피살당할 때 먼 히스파니아 속주에 가까스로 피신했다. 이후 큰 형 푸블리우스의 미망인인 테르툴리아와 결혼하여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낳았다. 이중 차남 푸블리우스가 이 문서의 주인공이다.

2.2. 유망한 젊은이

푸블리우스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원전 80년대에 출생한 것만은 분명하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와 동년배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부모님 집에서 보냈다. 수에토니우스플루타르코스는 테르툴리아가 남편을 속이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과 불륜을 맺었다고 기록했지만,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크라수스와 종종 반목하면서도 그와 아내 테르툴리아가 매우 모범적인 가정을 꾸렸다며 칭찬했다. 두 사람이 30년 이상 함께 살았고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것을 볼 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세기 독일 역사가 프리드리히 뮌처는 푸블리우스가 기원전 86년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면서, 그는 적어도 기원전 70년 경에 성인 남성용 토가를 입었고, 키케로가 로마 정계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된 가이우스 베레스 재판(기원전 69년)을 목격했으며, 기원전 67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지중해에서 활개치는 해적들을 토벌할 때 참전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잉글랜드 역사가 로널드 사임은 크라수스의 아들들 중 한 명 또는 두 아들 모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법무관으로서 먼 히스파니아 속주에 부임했을 때 동행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기록이 없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푸블리우스는 키케로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키케로에 따르면, 푸블리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두번째 아버지처럼 여겼으며 자신에게 웅변술을 배우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키케로는 그가 선조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처럼 위대한 웅변가가 될 만한 자질을 가졌으나 군공을 세우겠다는 열망이 지나쳐서 군대로 방향을 틀어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또한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푸블리우스를 "오만함은 일절 없고 매우 겸손하면서도 소심한 면은 없는 잘 교육받은 청년"이라고 극찬했다.

기원전 58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키케로를 추방하자, 푸블리우스는 매우 안타까워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애도를 표하는 의미로 검은색 토가로 갈아입고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아버지 크라수스는 클로디우스를 후원했기 때문에, 아들 크라수스가 이러는 것은 보기 좋아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아들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착수한 갈리아 전쟁에 보낸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푸블리우스가 갈리아 전쟁에서 활약해 명성을 쌓고 리키니우스 일족의 미래를 개척해주길 기대했을 것이다.

2.3. 뛰어난 지휘관

기원전 58년, 푸블리우스는 카이사르 휘하 기병대의 지휘를 맡아 로마인과 갈리아인으로 뒤섞인 기병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수에비족의 지도자 아리오비스투스와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보주 전투에서 맞붙었을 때, 푸블리우스는 적 우익부대가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 로마군 좌익 부대를 거의 압도하는 모습을 보고 3열에 포진한 로마군을 쪼개 좌익에 합류시켰다. 이리하여 좌익부대는 군세를 회복했고, 좌익이 돌파당한 적 부대는 전의를 급격하게 상실하고 패주했다. 로마 기병대는 약 5마일 떨어진 라인강까지 추격해 대거 살육했고, 많은 게르만 장병이 강을 건너다 익사했다. 아리오비스투스 본인은 소수의 신봉자들과 함께 가까스로 강을 건너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에서 푸블리우스가 적절한 지시를 내렸다고 칭찬했다.

기원전 57년 사비스 전투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은 제7군단의 레가투스로 선임되었다. 이후 대서양 연안 부족들을 항복시키는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다. 기원전 56년 초, 그는 겨울 숙영을 위한 식량확보를 위해 장교들을 주변 부족에 파견했다. 그런데 베네티족은 이 장교들을 억류한 뒤 카이사르가 복종의 대가로 거둔 볼모들과 맞교환하자고 요구했다. 푸블리우스의 보고를 받은 카이사르는 루카 회담을 마무리하고 휘하 7개 군단을 이끌고 대서양 연안으로 진격했다. 그는 티투스 라비에누스에게 기병을 주어 전해에 평정한 벨가이인들의 영토로 보냈고 크라수스에겐 12개 대대(1군단 = 10개 대대)를 주어 갈리아 서남쪽으로 보내 다른 갈리아 부족들이 준동하는 것을 막게 했다. 이후 카이사르의 부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모르비앙 해전에서 베네티 족 해군을 격파하자, 베네티족은 카이사르에게 재차 복종했다.

기원전 56년 말 또는 기원전 55년 초, 카이사르의 지시에 따라 1,000명의 갈리아 기병을 이끌고 로마로 돌아와서 아버지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기원전 55년도 집정관으로 선출하는 데 기여했다. 그 후 그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 메텔라와 결혼했다. 일부 학자들은 원로원 보수파가 크라수스를 회유하기 위해 이 결혼을 추진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동전을 주조했다. 앞면에는 월계관을 쓴 비너스의 두상이 있으며, 뒷면에는 말을 이끄는 창을 가진 여성의 이미지가 새겨졌고 그 위에 P. Crassus M. f. (마르쿠스의 아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그는 아마도 이 시기에 화폐 주조관 또는 재무관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푸블리우스는 아우구르의 일원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기원전 56년에 사망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뒤를 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2.4. 파르티아 원정과 최후

기원전 55년, 아버지 크라수스는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뒤 파르티아 원정을 개시했다.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54년 말에 수천 명의 갈리아 기병을 이끌고 시리아에 도착했다. 기원전 53년 봄, 로마군은 시리아에서 사막을 가로질러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했다. 원정의 목표는 파르티아의 겨울 수도인 셀레우키아였다. 그러나 로마군은 행군하는 내내 물을 구할 수 없었고 적 경기병이 소규모 습격을 줄기차게 가해왔기 때문에 매우 지쳤다. 그러다가 카르헤 인근에 이르렀을 때,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 기병 10,000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장교 대부분은 물가에 캠프를 치고 하룻밤 쉰 다음 공격하자고 제안했지만, 푸블리우스는 지체하지 말고 진격하자고 주장했다. 카이사르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군사적 역량이 뛰어났던 푸블리우스가 왜 이런 제안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켈트인, 게르만인 기병과 파르티아 기병의 질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가능한 한 빨리 적을 몰아내야 한다고 오판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크라수스는 아들의 주장을 따라 전투를 치르기로 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카르헤 전투에서 로마군이 궁지에 몰리자, 아버지 크라수스는 아들에게 아군 주위를 빙빙 돌며 화살을 퍼붓는 적 궁기병들을 격퇴하라고 명령했다. 푸블리우스는 기병 1,300명, 궁수 500명, 보병 8개 코호르스를 이끌고 파르티아군을 공격했다. 파르티아인들이 즉시 후퇴하자, 푸블리우스는 이들을 멀리 내쫓기 위해 추격했다. 그러나 파르티아 기병대가 멀리 후퇴하다가 순식간에 모여서 푸블리우스의 기병대를 에워싸버렸다. 푸블리우스는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병사들을 인근의 모래 언덕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항전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리스인 두 명이 푸블리우스에게 인근 도시로 도망치라고 권했다. 그러나 푸블리우스는 이렇게 말하며 거부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버리는 것만큼 끔찍한 죽음은 없다."
그 후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 기병대를 상대로 수 시간 동안 항전했지만, 오른손에 화살을 맞아서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자 노예에게 검으로 자신을 찌르라고 명령했다. 주변에 있던 나머지 로마인들은 하나둘씩 파르티아군에게 살해되었다. 파르티아인들은 푸블리우스의 머리를 베어 창에 꽂고 로마군 진영에 보여줬다. 크라수스와 로마군은 이 광경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전의를 급격히 상실했고, 그날 밤 부상병들을 모조리 내버리고 카르헤 성채로 피신했다. 그러나 수레나스가 카르헤 성채를 포위하자, 크라수스는 협상에 응하라는 병사들의 강요에 못 이겨 협상장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로마군은 대개 살해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1] 이 인물은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아겔라토스(ἀγέλαστος: 우울한, 음산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