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칼라 성채와 시가지
성채에서 바라본 시가지
1. 개요
그리스어 Τρίκαλα터키어 Tırhala
영어 Trikala
그리스 중북부의 도시. 인구는 약 7만 8천명으로, 라리사와 함께 테살리아 지방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그리스인이나, 아로마니아인 공동체도 상당수 공존한다. 중세 초기까지는 중소 도시였으나, 13세기 이후 테살리아 왕국의 실질적 수도가 되었고 오스만 제국기 산작의 중심지가 되며 발전했다. 시내에는 동로마 시기 성채와 오스만샤 모스크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서북쪽 20km 거리에 메테오라 수도원이 있기에, 메테오라로 가는 관광객들이 경유한다.
2. 역사
아스클레피온 유적
선사 시대부터 마을이 있었고, 기원전 3천년 경에 그리스 신화 속 페네우스 혹은 아소푸스의 딸 트리케에서 유래한 도시가 세워졌다. 리타이오스 강변의 언덕에 들어선 도시는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고향으로 알려져 그 신전인 아스클레피아가 세워지는 등 신성시 되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따르면 트리케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들들이 이끄는 30척의 선단을 제공하며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다. 미케네 문명기에는 테살리아 일대에 있던 왕국의 수도였다. 다만 도리아인의 남하 후에는 중요성을 잃었다가, 그리스 문명기에는 테살리아의 에스타이오티스[1] 지역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480년, 일대는 아케메네스 제국령이 되었다가 10년 후 테살리아 경제 연맹에 가입했다. 기원전 352년에는 필리포스 2세에 의해 마케도니아 왕국령이 되었고, 필리포스 5세 시기 로마에 맞서는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하지만 결국 기원전 168년에 일대는 로마령이 되었고, 로마 제국 하에서는 라리사에 가려진 소도시로 유지되었다.
2.1. 중세
트리칼라 성채
로마 제국의 후퇴기에 테살리아 지방은 여러 차례 유목 민족들의 침공을 받았다. 트리케 역시 396년 고트족, 447년 훈족, 577년 슬라브족의 침공을 받았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성벽이 세워졌다. 986년에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이 정복하여 1000년까지 지배했다. 동로마 제국이 수복한 후에도 1082년 보에몽의 노르만 족이 일시 점령했다가, 이후로는 2세기 이상 안정을 누렸다. 한편 11세기 케카우메노스의 스트라테기콘 (장군)에 의해 트리칼라 지명이 처음 언급되었고, 안나 콤니니의 알렉시아드에서도 트리칼라의 블라크 부족이 언급된다. 12세기의 아랍 지리가 알 이드리시는 트리칼라가 포도원과 정원이 많은 농업 거점이라 묘사했다. 1204년 4차 십자군에 의한 동로마 제국의 붕괴 후 일대는 에피로스 친왕국령이 되었고, 1259년의 펠라고니아 전투 후 니케아 제국이 일시 점령했으나 곧 물러갔다.
2.1.1. 테살리아의 중심지
왕궁으로 쓰인 트리칼라 성채 내부
1268년 에피로스 친왕국에서 갈라져 나온 테살리아 왕국은 1302년에 어린 군주 요안니스 2세 두카스가 즉위하며 약화되었다. 서부 테살리아에서 자립한 세바스토크라토르 (왕공) 스테파노스 가브리엘로풀로스는 트리칼라를 사실상의 수도로 삼았고, 도시는 1309-11년간 카탈루냐 용병단의 점거를 거쳐 30여년간 그의 수중에 있었다. 1318년 요안니스 2세 두카스가 후손 없이 사망하며 테살리아 왕국이 멸망하자, 스테파노스는 동로마에 복속했다. 1332년 스테파노스의 사후 일대는 에피로스 친왕국의 조반니 2세 오르시니가 점령했으나, 얼마 못가 안드로니코스 3세가 점령해 다시 동로마 령이 되었다.
그러다 1348년 테살리아 전역은 스테판 두샨에게 점령되어 세르비아 제국령이 되었고, 세르비아 장군 프렐류브가 서부 테살리아의 총독이 되어 트리칼라에 주둔했다. 1359년에는 스테판 두샨의 사후 테살리아에서 자립한 시메온 우로시가 트리칼라에 궁정을 두어 사실상의 수도로 삼았고, 1366년 경에는 메테오라 수도원을 세웠다. 1370년 시메온의 사후 아들 조반이 계승했으나, 2년만에 수도승이 되어 퇴위했고 그리스 귀족 알렉시오스 & 마누엘 앙겔로스 필란트로페나스가 동로마에 복속한 채로 통치하다가 1394년 오스만 제국이 테살리아를 정복했다. 따라서 13-14세기에 트리칼라는 사실상 테살리아의 중심 도시였다.
2.2. 오스만 제국기
1570년에 미마르 시난의 설계로 완공된 오스만 샤[2] 모스크
1575년에 세워진 아이고이 아나르기로이 성당의 프레스코화
오스만 시기 도시는 트르할라 (Tırhala)로 불렸고, 자체적인 산작 (주)의 치소였다. 1400년 경에는 에브레노스 베이의 아들 아흐메드가 총독이었다가, 15세기 중반에는 투라한 베이가 장기 재임했다. 후자는 현지 그리스 주민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면서도 무슬림 이주민들을 유입시켰고, 아들인 오메르 베이는 건설 사업을 벌여 여느 오스만 주요 도시들과 같은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때 모스크, 마드라사 (학교), 하맘 (목욕탕), 이마레트 (구호소), 칸 (상인회관), 카라반사라이 (여관) 등이 기존 성채와 기독교도 구역 (바로쉬) 밖에 세워지며 새 시가지를 형성했다. 1454년 기준 주민은 약 2천 5백이었고 260여 무슬림, 210여 기독교도 가구가 거주했다. 1538년에는 3백여 무슬림, 340여 기독교도 가구에 더해 80여 유대인 가구도 집계되는 등 인구가 늘어났다. 1543년에는 그리스어 학교인 트리케 학당이 세워져 테살리아 내륙의 학문 거점이 되었고, 철학자 디오니시오스가 강의했다.
또한 현지 기독교도 남자 아이들은 종종 예니체리 등을 위한 데브시르메 징집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7세기의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는 주택 2천 3백채가 있고 무슬림 구역 16개, 기독교도 구역 8개가 있다고 기록했다. 또한 모스크 8개, 테케 (수피 회관) 6개, 하맘 4개가 있고 상점은 1천개에 달했다고 덧붙였다. 시내에는 그외에도 지붕이 덮힌 시장인 베제스탄이 있었다. 1749년 대화재로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는 피해가 있었고, 1770년에는 오를로프 봉기 후 진압에 투입된 알바니아 민병대가 도시를 약탈했다. 그럼에도 19세기 초반 트리칼라의 인구는 2만 5천 수준으로 유지되었지만, 그리스 독립 전쟁 후 갑자기 거의 국경 도시가 되며 인구가 1만 정도로 줄었다. 1878년 통계에서는 트리칼라 산작 전체 인구가 2만 5천이었다. 그리스 민족주의의 확산과 함께 1854년과 1878년, 주민들이 봉기해 성채를 파손하기도 했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2.3. 근현대
1853년에 세워진 파나기아 파레노메니 성당
1886년에 세워진 트리칼라 기차역
1881년 8월 23일의 콘스탄티노플 조약 후, 트리칼라는 테살리아 전체와 함께 그리스 왕국령이 되었다. 1897년의 그리스-오스만 전쟁 당시 오스만 군이 일시작으로 도시를 점령했으나 전후 철수했다. 20세기 초엽 트리칼라에서는 억압적인 지주들에 대항하는 농민들의 단체가 형성되었고, 이는 1906년 그리스의 첫 농협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비슷한 시기 베제스탄 등 여러 오스만 시기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1930년대의 근대적 도시 계획이 시행되며 많은 유적들이 사라졌다.
3.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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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샤 (쿠르숨)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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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관광지인 메테오라 수도원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