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9 12:08:53

토니 윌리엄스(드러머)

토니 윌리엄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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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롤링 스톤 로고.svg 선정 가장 위대한 드러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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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이 2016년 가장 위대한 드러머를 선정한 순위다.
1위2위3위4위5위
존 본햄 키스 문 진저 베이커 닐 피어트 할 블레인
6위7위8위9위10위
클라이드 스터블필드 & 존 자보 스타크스 진 크루파 미치 미첼 알 잭슨 주니어 스튜어트 코플랜드
11위12위13위14위15위
베니 벤자민 찰리 와츠 D. J. 폰타나 링고 스타 버디 리치
16위17위18위19위20위
빌 브루포드 테리 보지오 지기 모델리스테 토니 윌리엄스 버나드 퍼디
21위22위23위24위25위
이안 페이스 레번 헬름 엘빈 존스 스티브 갯 얼 팔머
26위27위28위29위30위
대니 케리 데이브 그롤 카마인 어피스 칼튼 바렛 클리프톤 제임스
31위32위33위34위35위
로저 호킨스 제임스 갯슨 토니 앨런 미키 하트 & 빌 크로이츠만 프레드 벨로
36위37위38위39위40위
스티브 스미스 제프 포카로 짐 켈트너 티키 펄우드 잭 디조넷
41위42위43위44위45위
카터 보포드 빌 워드 필 콜린스 제리 앨리슨 빌리 코범
46위47위48위49위50위
데이비드 가리발디 데이브 롬바르도 존 프렌치 비니 콜라이우타 코지 파웰
51위부터는 출처 참고
같이 보기: 명반, 명곡, 앨범 커버, 아티스트, 송라이터, 기타리스트, 보컬리스트 1 / 2, 베이시스트, 드러머, 듀오}}}}}}}}}


<colbgcolor=#20221F><colcolor=#fff> 토니 윌리엄스
Tony Williams
파일:Tony Williams.jpg
이름 앤서니 틸먼 윌리엄스
Anthony Tillmon Williams
출생 1945년 12월 12일
일리노이 주 시카고
사망 1997년 2월 23일 (향년 51세)
캘리포니아 주 달리 시티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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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드러머, 퍼커셔니스트
활동 1961년 – 1997년
장르 모달 재즈, 하드 밥, 포스트 밥

1. 개요2. 생애
2.1. 역대 최고의 드럼 신동2.2. 70년대 초중반, 라이프타임 시절2.3. 70년대 후반, V.S.O.P., Trio of Doom, 그리고 Great Jazz Trio2.4. 이후, 블루 노트 레코드로의 회귀와 죽음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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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재즈 드러머. 마일스 데이비스의 2기 퀸텟 드러머로 이름을 알렸으며, 이후 자신의 밴드 라이프타임(Lifetime)으로 퓨전 재즈에 큰 영향을 미친 아티스트. 비단 재즈라는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드럼이라는 악기의 역사 전체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롤링 스톤 선정 위대한 드러머 순위에서 19위에 선정됐고, uDiscoverMusic 선정 위대한 재즈 드러머 순위에서는 3위에 선정, 모던 드러머 선정 위대한 드러머 순위에서는 4위에 선정, Drumeo 선정 위대한 드러머 순위에서는 5위에 선정, 드럼 매거진 선정 역사상 가장 중요한 드러머 50인에도 선정됐다.

1986년에는 모던 드러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1997년 다운비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등 재즈/현대 드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드러머이다.

2. 생애

2.1. 역대 최고의 드럼 신동

토니 윌리엄스는 아프리카계, 포르투갈계, 중국계 핏줄을 이어받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드러머로써 재능은 어릴때부터 가히 역대급이었는데, 11살때는 드러머 앨런 도슨과 함께 공부하다가 이미 일찍이 13살에는 색소포니스트 샘 리버스와 프로로써 함께 연주한다. 16살때는 잭키 맥린에게 고용된다.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재능을 발산하던 17살의 그는 앞서 존 콜트레인캐논볼 애덜리라는 쌍두마차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팀을 구하던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발견되었고, 스카웃된다. 마일스의 자서전에 따르면 토니 윌리엄스는 17살의 나이에도 이미 '팀 사운드의 중심'으로 인정 받았으며, 똑같이 젊고 창의적이었으며 연주력에서 이미 정점을 찍은 천재들인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 베이시스트 론 카터, 색소포니스트 웨인 쇼터와 함께하며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마일스를 제외하고 다들 젊은 가운데 토니 윌리엄스는 아예 젊은걸 넘어 어린 편이었기에 클럽에서 공연하기 위해선 수염을 길러야했다.

이 역대급 신동이자 천재에겐 다행히도 리더 마일스는 멤버들의 부업에 몹시 관대했고, 토니 윌리엄스는 이 시기 블루 노트 레코드에서 자신의 리더작인 Lifetime(1964년), Spring(1965년)을 내는 한편 60년대 재즈계 고전으로 꼽히는 수많은 혁신적인 앨범들에 사이드맨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중요한 음반들 몇개만 뽑아도 에릭 돌피의 대표작 Out to Lunch!(1964년), 앤드루 힐의 Point of Departure(1964년), 허비 행콕의 Empyrean Isles(1964년), Maiden Voyage(1965년) 등 다수이다.


(1967년,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과 공연 중 토니 윌리엄스의 솔로. 토니 윌리엄스는 이 어린 시절보다 더더 어렸던 시절(..) 맥스 로치, 아트 블래키등의 연주들을 그대로 따라칠 수 있을 정도까지 어마어마한 연습을 했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전통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하고 그걸 또 넘어서 혁신적인 자신만의 사운드와 기법들을 개발해냈다. 그리고 이 때의 그는 달랑 22살...)

2.2. 70년대 초중반, 라이프타임 시절

파일:Tony Williams Lifetime.webp
(라이프타임 1기 시절. 오르간의 래리 영, 기타의 존 맥러플린)

이후 마일스가 점점 전자 악기와 록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이에 반발한 론 카터가 나가며 퀸텟이 해체되자, 토니 윌리엄스는 자신의 밴드 라이프타임을 결성한다. 이 밴드는 기타의 존 맥러플린, 오르간의 래리 영을 포함하였고 퓨전 재즈 초창기의 가장 혁신적이고 선구적인 밴드가 된다.

이 밴드는 버브 레코드에서 Emergency!(1969년), Turn it Over(1970년) 등을 내는데, 당시에는 록적인 요소가 많이 섞인 이 음반들은 재즈 팬들 사이에서 큰 논란이 되었으나 오늘날에는 퓨전 재즈 고전으로 인정받는다. 반면, 활동 중 멤버들이 일부 추가/빠지기도 하는데 Turn it Over에는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가 참여하여 베이스/보컬을 맡기도 하고, Ego(1971년)에선 존 맥러플린이 테드 던바로 대체되고 론 카터가 참여하기도 한다. 1972년엔 래리 영이 밴드를 떠난다.


(Emergency(1969년). 록적인 요소가 많이 섞여 당시 재즈계로썬 당혹스러운 작품이었으나 현재에는 퓨전 재즈의 고전으로 남았다. 그만큼 이들은 시대를 많이 앞서간 혁신적인 밴드였다.)

이후 라이프타임은 몇몇 앨범을 더 내며 투어도 하다가 해산하지만, 이후 1975년엔 The New Tony Williams Lifetime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밴드를 만들어 활동을 이어나간다.

파일:New_Tony_Williams_Lifetime_1976.jpg
(라이프타임 2기 시절. 왼쪽부터 토니 뉴턴, 앨런 파스쿠아, 토니 윌리엄스, 앨런 홀즈워스 1976년 사진.)

이 밴드는 Believe It(1975년)과 Million Dollar Legs(1976년)을 내는데, 1977년에는 멤버들과 헤어지고 이후로 몇년간은 완전히 새로운 라인업으로 멤버를 바꿔가며 활동한다.

2.3. 70년대 후반, V.S.O.P., Trio of Doom, 그리고 Great Jazz Trio

1976년엔 이전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의 동료들[1]과 여기에 프레디 허바드를 포함한 당대 최고의 연주력을 가진 멤버들과 V.S.O.P.[2]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한다.

1979년엔 존 맥러플린과 자코 파스토리우스와 함께 트리오를 결성해 하바나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하기도 하는데, 이 트리오는 이후 Trio of Doom[3]이라고도 불린다. 이 트리오의 하바나 공연은 에르네스토 후안 까스떼야노의 다큐멘터리에 남아있으나... 안타깝게도 녹음하려고 뉴욕에 모여서 작업하던 도중 토니 윌리엄스와 자코라는 두 천재가 싸우는 바람에 활동을 이어나가진 못한다. 대신 이들의 하바나 라이브 연주는 이후 2007년에 발매된다.


(Trio of Doom의 Dark Prince 라이브. 그야말로 야생마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나 완벽하게 사운드를 통제하는 토니 윌리엄스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한편, 70년대 후반에는 행크 존스론 카터를 포함한 The Great Jazz Trio라는 이름으로도 그는 비밥/하드밥 전통의 재즈를 연주하기도 했는데 이는 토니 윌리엄스가 전통에도 대단히 능숙한 연주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시기 그는 쳇 베이커, 소니 롤린스 같은 한 세대 이전으로 분류되는 연주자들에게도 불려 사이드맨으로 음반을 녹음했고 맥코이 타이너나 마일스 데이비스, 론 카터, 허비 행콕 등의 리더 작에도 꾸준히 함께 참여하는 등 다재다능함을 보였다.

2.4. 이후, 블루 노트 레코드로의 회귀와 죽음

80년대 초에는 토미 플래너건의 부름을 받고 함께 연주했던 토니 윌리엄스는, 85년엔 블루 노트 레코드로 돌아와 Foreign Intrigue(1985년)를 발매한다. 이 음반에는 피아니스트 멀그루 밀러와 트럼페터 월러스 로니가 참여하는데, 이후 그는 멀그루, 월러스를 포함해 색소포니스트 빌 피어스, 베이시스트 아이러 콜맨과 퀸텟을 결성하여 활동한다. 이 밴드는 토니 윌리엄스 자작곡들만 거의 연주하던 밴드였고(재즈 스탠더드 Poinciana나 비틀스의 Blackbird, 프레디 허바드의 Byrdlike 같이 극히 일부 예외는 있었다), 80년대 후반을 함께하며 투어도 하고 앨범도 남겼다.

토니 윌리엄스의 리더로써 마지막 작품 Young at heart(1996년)도 멀그루 밀러, 아이러 콜맨과 트리오로 남긴 것이었는데 이 음반은 멀그루 밀러의 일부 자작곡을 제외하면 On Green Dolphin Street, How My Heart Sings, You and the Night and the Music등 재즈 스탠더드들로 구성되었다.


(트리오로 연주한 You and the Night and the Music, 1996년. 토니 윌리엄스의 죽음은 상당히 급작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이 작품이 그의 최후반부 작품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년의 그는 빌 라스웰, 데릭 베일리를 포함한 Arcana라고 불리는 트리오와도 음반들을 남기고 있었고, 1987년엔 브랜포드 마살리스와, 1994년엔 미셸 페트루치아니와 음반을 남길 정도로 이후 세대의 뮤지션들과도 협연하는 등 왕성히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왔는데, 199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던 중 담낭 수술을 받았는데 여기서 뭔가 잘못되었는지 얼마 후 심장마비가 와서 51세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3. 여담

  • 파일:blushda.gif
    'Blushda'라고 불리는 드러밍 기술을 만든 사람이다. 원래는 토니 윌리엄스가 주로 쓰던 그만의 릭(Lick) 중 하나였으나, 비니 콜라유타등의 후대 수많은 드러머들에게 쓰이며 거의 루디먼트 중 하나로 취급받는 기술이 되었다.

[1] 허비 행콕, 웨인 쇼터, 론 카터[2] 코냑의 숙성도를 표시하는 단어로, 원래는 Very Superior Old Pale이라는 의미이지만 이들은 Very Special One-time Performance라는 이름으로 딱 한번 정도 공연하려고 했다. 문제는 너무 잘 되어서 몇 년 동안이나 공연하고 음반도 몇개씩 냈다(..)[3] 자코는 자신의 베이스에서 나오는 그라울링 사운드 때문에 그 베이스를 'Bass of Doom'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비롯된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