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8b7c7,#a8b7c7><colcolor=#36383e,#36383e>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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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774년 9월 5일 |
| 사망 | 1840년 5월 7일 (향년 65세) |
드레스덴 | |
| 최종 국적 | |
| 직업 | 화가 |
| 사조 | 낭만주의 |
| 가족 | 아돌프 고틀리프 프리드리히 (아버지) 소피 도로테아 베흘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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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자 | 카롤리네 프리드리히[2] |
| 자식 | 엠마 요한나 프리드리히 (딸, 첫째) 아그네스 아델하이트 프리드리히 (딸, 둘째) 구스타프 아돌프 프리드리히 (아들, 셋째) |
1. 개요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강렬하고 웅혼한 마티에르 속에 쓸쓸하고 고독한 분위기를 담아낸 오묘하고도 서정적인 작품들을 선보여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프리드리히는 1774년 9월 5일 신성 로마 제국 스웨덴령 포메른 그라이프스발트에서 태어났다. 열 남매 중 여섯째였던 그는 양초 제조업자이자 비누 제조업자였던 아버지 아돌프의 엄격한 루터교회 신조에 따라 자랐다. 그의 집은 그렇게까지 가난하지는 않아서 자식들을 사교육을 받게 할 수는 있었다.하지만 엄한 가정과 주위 사람의 죽음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 부터 조용하고 고독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 소피는 그가 일곱 살이었던 1781년에 사망했고 1년 후, 그의 누나 엘리자베스가 천연두로 사망으며, 1791년 둘째 누나 마리아가 1791년에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그의 어린 시절 최대의 비극은 1787년 다비드가 열여섯 살 때 얼어붙은 호수에서 놀던 중 얼음이 깨져 빠지게 되었고 그의 열세살 동생 요한 크리스토퍼가 그를 구하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갔다가 카스파가 보는 앞에서 익사했다. 카스파는 이 일로 평생 죄책감과 슬픔에 시달리게 되었고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죽음, 고독, 안개, 겨울, 그리고 자연 앞에 선 인간의 미약함을 작품에 넣는 계기가 되었다.
3. 미술 철학
종교적이면서도[3] 인간과 자연의 강렬한 대비가 돋보이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이는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자연을 인간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 근대적 세계관에 기초했으며, 또한 칸트의 진/선/미 구분에 기초하여 미술의 존재 의의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일면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작업'으로 보았다.4.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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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Der Wanderer über dem Nebelmeer) 독일 쿤스트할레 함부르크 |
광대한 자연과 그 앞에 독자에게 등을 보이고 굳게 선 인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며 이 등을 보이고 선 사람과 그 앞에 펼쳐진 거친 세상이라는 아이코닉한 구도는 인간 정신의 상징이 되어 오늘날까지 여러 그림에서
해당 작품의 배경이 된 장소는 독일의 작센 지방과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걸쳐진 엘베 사암 산맥이며, 그림 속 사람이 서 있는 곳은 독일 작센에 있는 카이저크로네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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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가의 수도승 (Der Mönch am Meer) 독일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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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의 바다 (Das Eismeer) 독일 쿤스트할레 함부르크 |
작품이 완성된지 얼마 안 되었던 초창기에는 '수북한 빙괴 위의 난파선이 있는 북극해의 이상화된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에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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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겐의 백악 절벽 (Kreidefelsen auf Rügen) 스위스 빈터투어 예술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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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마귀들의 나무 (Krähenbaum)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
[1] 화가가 태어난 해의 2년 전에 태어났지만, 출생 한 달도 안 되어서 일찍 세상을 떠났다.[2] 혼전 이름은 '크리스티아네 카롤리네 봄머'. 당시 푸른색 염료로 옷감 및 각종 직물들을 물들이는 염색장 '크리스티안 봄머'의 딸.[3] 흔히 낭만주의 미술은 종교적 색채를 탈피하여 인간의 본연적인 상상력,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모토로 하는 미술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독일의 낭만주의는 민족주의와 합쳐져 15세기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와 신성 로마 제국을 모티브로 하여 고전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프리드리히의 그림엔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 많다. 독일뿐 아니라 다른곳도 마찬가지다. 종교적 색채를 탈피하려 한 건 오히려 그 전 시대의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고전주의 미술이다. 낭만주의는 이에 반발하여 다시 강렬한 종교성으로의 회귀를 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