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07 04:30:50

채원준

파일:채원준.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니카와 겐슌(仁川元俊)[1]
아백(我伯)
출생 1924년 3월 25일[2]
경상북도 경산군 남산면 사월리 192번지
(현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
사망 1978년 4월 14일 (향년 54세)
경상북도 경산군
묘소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
본관 인천 채씨[3]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924년 3월 25일 경상북도 경산군(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 192번지에서 아버지 채경모(蔡敬模, 1885 ~ 1935)[4]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수생(金水生, 1896.3.8. ~ ?)[5] 사이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6] 이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44년 7월 15일 밤 경산군 자인면 원당리 강둑에서 안창률·채찬원 등 28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 제국징용·징병제에 대해 결사 반대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7월 26일 새벽 남산면 남곡리·사월리·산양리·송내리에서 모인 동지 25명과 함께 대왕산(大王山)[7]으로 올라간 뒤 결심대(決心隊)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결심대 제3소대장 최외문(崔外文) 휘하의 제3소대원으로 편제되었다. 이튿날인 7월 27일부터 남산면주재소 소속 일본 제국 경찰이 대왕산으로 올라와 회유했으나 모두 물리쳤고, 8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공격이 시작되자 죽창을 들고 투석전으로 대응하였다. 이후 대왕산 동북쪽에 있는 용산(龍山)으로 근거지를 옮긴 뒤에도 교전이 있을 때마다 투석전으로 항거하였다.[8]

이후 남산면주재소를 직접 공격하여 주재소를 파괴하고 주임을 살해하고자 계획하였으나, 식량 공급이 끊기자 8월 9일 어쩔 수 없이 마을로 내려와 몸을 숨겼다. 그러나 8월 10일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13일까지 다른 대원들이 모두 검거된 뒤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간 조사를 받았다. 이후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었고,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44년 10월 4일에는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8.15 광복 직후인 8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에 대해 검사국에서 소송을 취소하면서[9] 곧 석방되었다.

1978년 4월 14일 경상북도 경산군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에 안장되었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


[1] 1945년 8월 17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2] 인천채씨족보 제5권 639쪽에는 1923년 1월 15일에 태어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3] 소감공파(少監公派)-양정공파(襄靖公派) 30세 찬(燦) 항렬. 족보명은 채찬명(蔡燦明).[4] 자는 경백(敬伯).[5] 김경영(金慶永)의 딸이다.[6] 디지털경산문화대전[7] 채원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大山으로 기재되어 있다.[8] 이 사건을 디지털경산문화대전에서는 대왕산 죽창의거라고 하였다.[9] 1945년 8월 17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