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폴 게티 Jean Paul Getty | |
출생 | 1892년 12월 15일 |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 |
사망 | 1976년 6월 6일 (83세) |
영국 잉글랜드 서리주 길퍼드 서튼 플레이스 | |
직업 | 기업인 |
모교 | UC 버클리 옥스퍼드 대학교 |
배우자 | 지네트 드몬트 (1923년 ~ 1926년; 이혼) 알렌 애쉬비 (1926년 ~ 1928년; 이혼) 아돌핀 헬름레 (1928년 ~ 1932년; 이혼) 앤 로크 (1932년 ~ 1936년; 이혼) 테디 린치 (1939년 ~ 1958년; 이혼) |
자녀 | 5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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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석유 재벌 기업인이자 게티 재단의 설립자이다.2. 생애
1892년 미니애폴리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할아버지 때에 미국으로 이민온 북아일랜드 출신의 스코틀랜드 장로회를 믿던 집안이었다. 부모대에 감리회를 믿기 시작해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었고 철저히 금주를 했으며 게티도 엄한 감리회의 교육 방식대로 자라났다.[1]1903년경에 변호사로 성공해 보험업으로 재산을 쌓은 그의 아버지 조지 게티가 석유붐을 맞아 오클라호마주로 이사를 갔고 진 폴 게티도 UC 버클리 대학을 졸업하고 일찍 아버지를 도와 사업에 참여하여 23세에 100만 달러 이상을 번 부호로 성장했다. 어학에 재능이 있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그리스어에 능통했고 아랍어와 라틴어도 익혔다. 그리고 인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고전 예술을 좋아했다. 그는 석유사업에 인생을 걸어 게티석유를 설립하고 사업을 성장시켰다. 대공황 때는 전 직원을 해고시켰다가 싸게 재고용하기도 했다. 한편, 독일에서 사업을 하면서 나치와 친하게 지내기도 해 FBI의 감시대상이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는 중동 투자를 위해 아랍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중동 왕족들이나 권력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게티는 1949년 사우디 국왕 이븐 사우드에게 석유가 나오지 않는 곳의 황량한 땅을 천만 달러나 현금으로 주고 개발권을 얻었다. 3년 동안이나 석유가 나오지 않아 실패한 투자라고 사람들이 말했으나 4년째에 석유가 터져 나오면서 1년에 1600만 배럴을 생산했고 진 폴 게티는 막대한 부자가 됐다. 사우디 아라비아 외에도 이란과 쿠웨이트의 유전 개발권도 얻었으며, 중동전쟁 때는 석유가격이 폭등하여 엄청난 액수의 돈을 벌 수 있었다. 중동 석유 사업의 성공 이후 부동산 투자와 호텔 사업에도 투자한 결과, 1956년경 포춘지에서 세계제일의 부자로 선정했다.
그는 억만장자 임에도 구두쇠 기질 탓에 이렇다할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 그가 축적한 재산을 아끼지 않은 유일한 분야는 다름 아닌 예술이었다. 게티는 미술품을 애호하여 게티 재단을 설립하고 미술관, 박물관 등을 운영했다. 그리고 그리스-로마 양식의 건축물에도 관심이 많아 거대한 그리스-로마풍의 게티 빌라를 지어 각종 유물들을 보관했다. 그리고 그가 축적한 재산과 수집한 미술품들은 게티 사후 설립된 게티 재단으로 이관되었다. 게티 재단은 게티의 컬랙션과 유산을 바탕으로 LA에 미술관 게티 센터와 게티 빌라를 설립하고, 운영 중에 있다. 미술관은 주차 요금은 따로 있지만 입장료는 무료이다.
1976년 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재산은 사망 당시 60억 달러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70억 달러(약 31조 원)에 육박한다. 사후 유족에 의해 재산 분쟁이 일어났고 대부분의 재산이 상속된 재단 싸움으로 또 진통을 겪었다. 게티석유는 유족들에 의해 텍사코(쉐브론 계열)에 매각되었고, 2012년에 파산한 이래 지금은 이름만 남은 상황이다.
3. 일화
3.1. 손자 납치 사건
1973년 당시 16세의 손자 존 폴 게티 3세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악명 높은 마피아 은드랑게타에 납치되는 일이 발생했다. 1700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납치범들에게 맞서 처음엔 진 폴 게티는 손자가 할아버지한테서 돈을 뜯어내려는 자작극인 줄 알고 미온적으로 반응했다. 또 만약 테러범, 납치범한테 돈을 주면 그들의 기를 살려줘 더 많은 유괴 피해와 나머지 13명의 손자들도 납치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제대로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납치범들은 2번째 요구사항을 쓴 편지를 또 보냈으나 하필이면 이탈리아 우편 파업 때문에 제때에 전달되지 못했다. 결국 은드랑게타가 귀를 잘라서 보내고 몸값을 320만 달러로 줄였다. 진 폴 게티는 협상에 응하면서도 끝끝내 몸값을 깎아내고 300만 달러까지 깎았다. 그 돈도 소득공제 한도인 220만 달러만 주고 나머지는 아들 존 폴 게티에게 연 4% 이자로 빌려주었다.[2] 이 때문에 여론으로부터 손자 다친 것보다 돈이 중요한 미친 짠돌이라며 욕을 들었고, 납치범들조차도 게티에게 미친놈이라고 욕했을 정도였다. 납치범들도 뒷세계에서 쌓은 경력이 있음에도 그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손자 존 폴 게티 3세는 다행히 목숨을 건져 풀려나와 치료와 귀 재건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고문과 납치 후유증으로 알코올, 마약 중독에 빠져 부작용으로 1981년 뇌경색이 와서 폐인이 돼버렸다. 장애를 얻어 목소리도 안 나오고 시력도 상실되었으며 필사의 재활 끝에 어느 정도 회복은 됐으나 결국 건강을 해쳐 2011년 54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자식으로 로스트 하이웨이에 출연했던 배우 발타자 게티가 있다.[3]
납치범 일당들 9명은 대대적인 수사로 체포되었으나 그중 2명만 유죄 판결이 나서 감옥으로 갔고 나머지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몸값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3.2. 악명높은 자린고비
진 폴 게티는 무서울 정도로 돈에 집착했고 지독한 자린고비로 유명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일화도 많이 남겼다.- 호텔의 세탁서비스로 나가는 돈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서 화장실에서 자기가 직접 손빨래를 했다.
- 문구류를 여러번 재활용하고 메모지도 앞면 쓰고, 뒤집어 쓰고, 조금의 여백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썼다.
- 류마티스로 아파하는 친구에게 좋은 약이 있다고 하고 튜브 끝까지 짜낼 정도로 거의 다 써서 조금밖에 남지 않은 연고를 선물로 줬다.
- 가장 악명 높은 건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전화를 사용해서 전화비가 많이 나오자 화를 내며 전화마다 자물쇠를 달아 쓰지 못하게 한 뒤에 공중전화 부스를 만들어 손님들은 그걸 쓰도록 했다. 물론 요금은 손님 부담이었다.
- 옷이 낡아서 떨어질 때까지 입는 건 기본이고 10년 이상 새옷은 신발과 넥타이 정도밖에 사지 않았고 셔츠의 소매가 떨어질 정도가 되자 새로 사는 게 아니고 다듬고 덧붙여서 수선해 입었다.
- 손자의 납치사건에도 돈을 내려고 하지 않아 냉혈한이라고 크게 비난 받았다. 물론 납치범들에게 무작정 몸값을 내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할 경우, 자칫하면 몸값을 노린 납치 범죄를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게티 역시 손자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마냥 돈벌레여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런 계산 역시 들어가 있었던 것이며 진 폴 게티의 손자 납치 사건을 다룬 영화 올 더 머니에서도 몸값을 주면 오히려 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묘사가 나온다. 각국 정부가 자국민을 납치한 테러리스트들을 포함한 인질범들과 웬만하면 협상을 잘 안 하는 이유와 같다. 다만 거기에다 몸값으로 낸 돈을 이용해 세금 공제를 시도한 건 빼도박도 못한 돈벌레 인증.
- 영국의 대저택인 서튼 맨션은 원래 5대 서덜랜드 공작이 쓰던 건물이었는데 진 폴 게티는 40년 전 공작이 산 가격의 절반으로 매입했다. 서튼으로 이주한 것도 런던에 비해서 물가가 쌌기 때문이다.
- 미술품 애호가였으나 어떻게든 미술품 값을 최대한 깎기 위해 애를 썼다.
- 친구 5명과 런던의 도그쇼에 갔는데 1인당 5실링의 전체 가격을 지불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블록을 10분 정도 돌아다니게 한 뒤 오후 5시에 도그쇼가 열려서 가격이 반값이 되자 그때 입장했다.
- 마지막이자 다섯번째 부인의 아들이 말기병에 걸리자 희망도 없는데 돈이 너무 많이 나간다며 그녀를 꾸짖었다. 결국 막내아들은 뇌종양으로 눈이 멀어서 1958년 12살에 사망했고 그 해에 부인은 게티와 이혼했다.
- 1960년 진 폴 게티는 새로 구입한 서튼 플레이스에서 집들이 파티를 열었는데 16대 노포크 공작과 여러 명사들을 초대해 놓고도 담배도 제공하지 않고 휴대용 화장실을 밖에서 사용하라고 하여 모두들 게티의 인색함에 진절머리를 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까지 몰려 홀에 2만 파운드의 피해를 냈고 귀중한 물병도 도난 당했다가 반환되었다. 이러한 엉망진창 파티에 게티는 조롱거리가 됐다. 그 후 그는 다시는 파티를 열지 않았다.
4. 여담
- 보수적인 신앙을 가져온 부모와 달리 바람둥이에 난잡한 사생활을 즐겼다. 사생아도 있었고 공식적으로 5번 결혼하고 모두 이혼했으며 4명의 아내에게서 5명의 아들을 두었다.
-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사진 제공 업체인 게티 이미지를 설립한 마크 게티가 진 폴 게티의 게티의 손자 중 한 명이다. 참고로 납치 사건으로 유명해진 존 폴 게티 3세가 그의 친형이다.
- 손녀 에일린 게티가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아들과 결혼한 적이 있다. 그리고 1985년 콘돔 없이 외간남성과 성관계를 가졌다가 에이즈에 걸린 뒤 이혼했다. 에일린 게티를 본인의 딸처럼 여기던 테일러는 오히려 이를 계기로 에이즈 연구를 위한 기금 마련에 더욱 몰두하게 된다.
에일린 게티는 "게티 집안에서 받은 압력" 때문에 "정신병원에 7번 들어가고, 충격 치료를 12번 받고, 7번 유산했으며, 거식증과 자해 증상이 있었다"고 고백하며 오히려 에이즈에 걸린 걸 계기로 해방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에일린 게티는 납치를 당했던 존 폴 게티 3세의 여동생이다.
5. 어록
돈을 셀 수 있으면, 당신은 부자가 아니오.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경험은 최악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은행에 100달러를 빚졌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입니다. 은행에 1억 달러를 빚졌다면 그건 은행의 문제입니다.
성공을 위한 공식은 일찍 일어나고, 열심히 일하고, 석유를 뿌리는 것입니다.
석유는 야생동물과 같다. 누구든 잡기만 하면 그의 것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팔 때 나는 산다.
나는 실패하는 것이 싫다. 나는 내 결혼의 실패를 후회하고 미워한다. 나는 단 한 번의 지속적인 결혼생활을 위해 기꺼이 수백만 달러를 기부할 것이다.[4]
[1] 그의 돈에 대한 집착이 감리회의 절약정신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반면에 엄한 감리회의 엄숙주의에 반발로 색(色)에 집착했다는 말도 있다.[2] 아들 존 폴 게티가 돈이 없는 이유는 아들을 로마 지사에 일하게 하고 월급만 줬기 때문이다.[3] 참고로 존 폴 게티 3세도 연기 경력이 있다. 라울 루이즈의 1981년작 영역(The Territory)과 빔 벤더스의 사물의 상태에 출연했다. 참고로 사물의 상태는 빔 벤더스가 영역 촬영 도중 곤란해진 루이즈를 도와주러 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영화라, 영역과 제작진, 출연진이 겹친다. 존 폴 게티 3세도 그중 하나[4] 계속된 이혼과 결혼생활 실패를 자조하면서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