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8 09:17:34

중대장 야전삽 폭행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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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사건일지3. 반응4. 사건 이후5. 관련 문서

1. 개요


2020년 4월 1일 육군에서 상병이 중대장을 야전삽으로 폭행하고 목을 조르는 하극상을 저지른 사건.

2. 사건일지

4월 1일 오전 8시 쯤 경기도의 모 육군 부대에서 사격장 정비차원에서 제초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해당 부대 소속의 정 모 상병(22)이 '힘들어서 못 하겠다'는 식으로 강하게 불만을 표출하였고 이에 소속 부대 여군 중대장(대위)이 정 상병을 따로 불러 1:1 면담을 하였다. 그런데 면담 도중 분노가 극에 달해 이성을 잃은 정 상병이 '병력 통제가 너무 심하다'며 가지고 있던 야전삽으로 여군 중대장을 내려찍고 목을 졸랐다.

정 상병은 그 자리에서 진압된 직후 곧바로 긴급 체포되었고 항명, 상관특수상해 등으로 구속되어 수사를 받았다. 중대장은 전치 2주의 상해를 입고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다.

3. 반응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외출, 외박이 장기간 통제되면서 누적된 불만과 스트레스로 연일 군 사건 사고가 터지던 상황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튀는 사건이 터지면서 이목이 많이 쏠렸다.

군필자들 사이에서는 나도 위에놈들 이러저러해서 재수없었다는 등 자신이 겪었던 불쾌했던 경험담을 얘기하면서 사람을 폭행한 것은 잘못하긴 했지만 전쟁 터졌을 때 진짜 주적부터 뒤에서 총을 쏠 거라는 병사들이 많을 거라는 식의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이 돌았다. 물론 꼰대 기질이 있는 일부 군필들도 어김없이 등판해서 우린 월급 만원이었다, 복무기간이 30개월이 넘었다는 식의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해 요즘 군대 개빠졌다고 실컷 까고 더 쪼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의견도 많았다.

당연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매우 멍청한 생각이다. 더 쪼이면 쪼일수록 군 기강은 강인해지는 게 아니라 역으로 더더욱 해이해진다. 이는 이미 수많은 군대들과 역사 속에서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며 과거의 대한민국 국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정신적 보상이 없어지고 이러나저러나 고난뿐이라고 생각하면 사람이 더 거침없어진다. 훈련이 힘든 특전사들이 프래깅을 하지 않는 이유도 일단 월급이 병에 비해 많은 데다 국민들이 인정해 준다는 정신적 보상이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철두철미하고 빠릿한 열병식을 보고 이게 진짜 군대다운 군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제로 그 시절 군대를 경험했던 기성세대들, 특히 최전방에서 근무했던 어르신들에게 물어보면 "정말로 이게 군대가 맞나?" 라고 생각될 정도로 경악을 금치 못할 수준의 오합지졸이었다. 병장들이 물소위를 길들인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상관 폭행은 기본이고 선·후임을 때려죽이거나 총기난사,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져서 대량 살상을 저지르는 등 요즘으로선 매년 뉴스에 대서특필될 대형 사건 사고들이 끊임없이 터지면서 은폐되었으며 정말 살아서 전역하면 다행이라는 이야기까지 돌았던 시절이다. 당연히 상관에 대한 존중은 전혀 없었고 그저 원한만 가득 품고 있었으며 단지 즉결처분[1]의 두려움에 복종했을 뿐이었다.

초급 간부들도 고생을 많이 했고 특히 '하사관'들이 대표적이었다.[2] 소위들도 고생을 많이 하기는 했으나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온 장교 우위 분위기 때문에 일단 소위 이상의 장교면 상당한 권위가 있었던 시절이다. '자네가 주임원사인가?'가 신참 소위의 분위기 파악 못하는 기행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박정희 시절까지는 진짜였다.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된 당시에는 '초졸'만 되어도 국민 평균 학력 이상이었고 총알받이 소위로 유명했던 갑종도 요즘으로 치면 '고졸' 이상이 자격조건이었는데 1970년대 기준으로는 엘리트였다.[3] 그래서 당시 하사관은 그냥 못 배워 먹어 군대에 남은 무지렁이 취급을 받았다.

요즘에야 전문대에 부사관과도 있고 고학력 민간부사관이 활성화되었으나 당시 거의 대부분의 부사관은 군대에서 병으로 입대했다가 말뚝을 박은 경우였으며 의무복무 기간은 35개월이었다. 그렇다 보니 초급 하사관의 짬 자체가 선임 상등병, 특히 병장 급에게는 절대 못 미쳤다.[4] 그래서 선임 병사들이 하사들의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심지어 맞짱을 떠서 패 버리기도 하는 등 소위 '하사관 길들이기'를 하였다. 요즘 군대에서는 상상도 못 할 하극상이며 심각한 군기문란에 해당한다.

요즘 군대에도 비슷한 경우는 있다. 일등병 시기 임관을 하면 상말, 병장보다는 짬이 낮다. 임기제부사관 역시 대개 말년병장과 짬이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낮다. 물론 비슷하다일 뿐 요즘 군대에서는 뒤에서 뒷담화를 하거나, 사석에서 말을 편히 하거나, 정 하사의 행실이 여의치 않을 때 사적으로 불러 이야기하는 정도일 뿐 1970, 1980년대식 '하사관 길들이기'는 불가능하며 시도도 하지 않는다. 이찬희 병장이 하사를 하대하였던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며 그조차 이찬희가 하사에게 하극상을 저질렀던 사건도 아니다.

요즘 군대는 핸드폰도 쓴다면서 애꿎은 휴대폰을 걸고넘어지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보다는 폰이라도 있어서 이 정도였지, 그마저도 없었으면 이런 사고가 더 많이 터졌을 것이다. 결국, 좋든 싫든 사람이 죽어나가는 대형사고도 분명히 터졌을 것이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더 많았다. 이는 실제로 틀린 말이 아니다. 안 그래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매우 큰 군대라는 특수한 생활환경 속에서 휴대폰이 없어서 외부와의 연락 수단이 극히 제한된 채로 사실상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 된 휴가, 외출, 외박, 면회가 완전히 통제된다면 쌓여가는 스트레스는 자연히 비교적 만만한 대상인 하급자를 향하게 될 수밖에 없다. 결국 부당하게 상급자의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이 되어야 하는 하급자도 그 분노가 한계치를 넘어서 폭발하게 될 것이다.

당장 실제 역사 속에서 일본군이 특유의 폐쇄적이고 가혹한 병영문화 속에서 쌓여 가는 스트레스를 하급자와 정복지 주민들에 대한 잔인한 폭력으로 풀어냈고, 도저히 견디지 못한 하급자들의 탈영이나 자살 사고가 끊이지 않았으며 역으로 이에 반발한 하급자에 의해 프래깅을 당해서 죽어나가는 상급자들도 역시 끊이지 않았던 바가 있다.

상관 살해는 여전히 실제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며 미군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 병영부조리 같은 폐해에 분노한 미군 장병들이 얼마나 많은 상관들을 쏴 죽이고 때려죽여가면서 혼돈의 도가니로 치달았는지를 잊어선 안 된다.

물론 이런 이유만으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아니지만 프래깅을 비롯한 온갖 문제 덩어리들이 엉켜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현재의 미군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병영부조리나 상관의 권한 남발에 매우 엄격하고 강경하게 처벌하며 권한 남발 상관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는다. 우스갯소리로 전쟁 나면 난 우리 중대장, 대대장부터 쏠 거라는 우리의 주적은 간부 같은 말들을 흔히들 하지만 이게 농담으로 끝날 가능성은 낮을 수도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4. 사건 이후

사건 이후 하극상을 당한 여군 중대장은 정 상병의 부모가 간곡하게 용서를 빌고 정 상병을 선처해 줄 것을 부탁했고 최대한 선처했다고 한다.

결국 군에서는 사건이 터진지 며칠도 안 되어 병들의 외출 전면 통제를 해제하고 제한적으로 외출을 허용하기로 했지만 시행하지 않았다. 군대에서 터지는 대부분의 사건 사고가 은폐되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미 병들의 불만이 한계치에 근접했을테니 더 이상 원성을 감내하기는 벅찼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런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간부들은 잘만 외부에서 출퇴근하고 있는 상황에서 애꿎은 병들만 휴가를 못 나가게 잡아 놓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었음에도 손을 놓고 있다가 뒷북이나 친다는 비판은 피할 수는 없었으며 몇몇 부대에서는 사건이 터진 뒤부터 야전삽을 수거했다고 한다. 참으로 대한민국 국군다운 대처법인데 "그럼 전쟁났을 때 야전삽이나 나눠주고 있을거냐?" 같은 비아냥이나 받았다. 야전삽은 완전군장의 구성품 중 하나인데 이걸 수거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군대다운 대처법이다. "총기난사 사건 때는 아예 총도 회수하지 그랬냐?"는 비아냥도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임계점이 폭발하여 하극상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굳이 야전삽이 없었어도 상관없었고 손에 잡히는 것이 야전삽이 아니라 다른 물건으로 가격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5]

5. 관련 문서


[1] 여담으로 실제 군 간부 중에는 지금도 즉결처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작자들이 꽤 있다. 현재 국군은 상관에게 생사여탈권 따위는 당연히 부여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군법상으로도 아무런 언급도 없다. 애초에 즉결처분은 6.25 전쟁 당시에도 훈령으로 발령하여 마구잡이로 이용했을 뿐이었으며 당연히 훈령은 법위에 있지 않다. 이 훈령은 상관들이 사소한 기분 나쁨에도 부하들을 마구잡이로 총살하거나 상관의 즉결처분 남발과 이에 반발한 하급자의 상관 살해 같은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대표적인 간부의 프래깅 사건으로 유명한 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이 터진 적이 있다. 사건의 내면을 보면 조금 다른 사례지만 상관의 즉결처분이 두려워 먼저 쏴 죽였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정작 적과 전투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여기저기서 비전투 손실 사망자가 수도 없이 속출하여 부대가 개박살이 난 것이다. 결국 즉결처분은 1951년 7월 26일에 폐지됐다가 고작 20일 후 제약사항을 걸어 부활하는 중구난방식으로 이용됐는데 여전히 군기 확립이라는 명목으로 꽤 많은 장교들의 즉결 처분이 알게 모르게 자행되었고 마찬가지로 이에 반발하여 장교를 살해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물론 이를 당당히 상부에 보고하기에는 크나큰 치부인지라 대부분 전사 처리하여 은폐했다. 자세한 건 즉결처분 문서 참고. 결국 즉결처분은 군 기강을 잡는 게 아니라 국군을 오합지졸이 따로 없는 무식한 당나라 군대로 만들었고 쪽팔려서 차마 고개도 들 수 없는 호구같은 군대로 만들어버렸다. 현재는 전시상황이라도 처형은 반드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엄밀한 판결을 거친 뒤에 실행되도록 되어있으며 군법 그 어디에도 상관에게 생사여탈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은 없다.[2] 당시에는 부사관이 아니라 하사관이었다.[3] 고졸이 평균 학력으로 취급되는 것은 일러도 80년대 중반 이후다. 1980년대 고졸이 요즘 전문대 졸업자 급은 된다.[4] 당시에는 병장 쿼터제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상병으로 전역했다. 특히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는 우선적으로 진급시켜서 더한 부분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래서 상병 전역을 했다.[5] 만약 손에 잡히는게 총검이라도 되었다면 중대장은 크게 다치고 가해 병사는 군법상 상관살해나 그 미수범으로 최소 수십년 이상 교도소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