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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차크 칸국-일 칸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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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베르케 칸과 노가이의 침공
2.1. 1차 침공2.2. 2차 침공
3. 전간기4. 탈라부가 칸대의 습격5. 갈등기6. 자니베크 칸7.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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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킵차크 칸국일 칸국 사이에 일어난 내전이자 전쟁, 대를 이어 지속되었다.

2. 베르케 칸과 노가이의 침공

2.1. 1차 침공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툴루이 가문 내전

중동 원정이 종결된 이후 훌라구는 킵차크 칸국의 칸이었던 베르케와 갈등을 빚게 된다. 킵차크 칸국은 일 칸국의 주요 통상로 및 페르시아의 목초지 획득에 관심이 있었는데다 명분도 있었다. 몽골은 장자에게 가장 먼 지역을 분봉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관습에 따르면 이란 지역은 주치 울루스의 영역이 되어야 했지만 바투와 사이가 나빴던 구유크 칸이 그가 직접 임명한 지방관들을 몰아냈고 그 틈을 훌라구의 툴루이 가문이 잘 파고들어 눌러 앉은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동유럽과 러시아는 개발도가 떨어져 확장할 맛도 나지 않았던 것과 때마침 무슬림이었던 베르케가 이슬람의 수장인 칼리프를 죽인 훌레구를 좋게 볼 수 없었던 것도 한몫했다.

경제 상황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훌레구인 울루스는 주치인 울루스에게 맘루크 왕조로의 노예 수출을 금지하라고 항의했다. 이는 슬라브인들을 잡아다가 맘루크 왕조에 노예로 파는게 주수입원이었던 주치인 울루스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리고 부유한 북부 이란의 부를 독점하고 있었던 홀레구인 울루스의 모습에도 화가 많이 났다.

결국 툴루이 가문 내전을 기폭제로 해서 두 칸국간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1] 본디 훌레구는 다시 한번 맘루크를 치려고 시도했었지만 이 전쟁 때문에 제대로 힘을 투사하지 못해 실패로 돌아갔다.

베르케 칸이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훌레구인 울루스군 내에는 선대 주치인 울루스 칸이었던 바투가 몽골의 서아시아-중동 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가 있었다. 그 군대는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세 방향으로 도망쳤는데, 두 무리는 도망쳤지만 한 무리는 훌레구에게 붙잡혀 많은 인원들이 처형되고 포로로 잡힌다. 베르케 칸은 이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한다.

1262년 8월, 베르케 칸은 지하드를 선언하고 자신의 조카인 노가이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약 3만명의 군대를 파견한다. 노가이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빠르게 수도까지 노렸지만, 수도 근처에서 격퇴당한다. 이후 1263년, 훌레구 칸은 반격하여 코카서스 북쪽까지 진군했다. 그곳에서 노가이의 진영을 급습했지만, 그 진영은 이미 비어있었다. 노가이가 버리고 간 진영을 약탈하는 사이 노가이가 군사를 이끌고 기습해 홀레구인 울루스의 군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다. 수천 명이 도망치려다가 익사했으며 많은 수가 아제르바이잔으로 도망친다.(테렉 강 전투, 1263)

1264년 8월, 쿠빌라이 칸툴루이 가문 내전에서 승리해 대칸 자리에 오른다. 원래부터 인정하던 홀레구인 울루스와 함께 주치인 울루스와 차가다이인 울루스는 쿠빌라이 칸을 인정한다. 그러나 제국 내의 갈등은 너무 깊었고 누구나 제국이 이전과 같이 통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전은 계속 이어진다.

2.2. 2차 침공

몽골 제국의 내전
툴루이 가문 내전
(1260~1264)
주치인 울루스의 제2차 훌레구인 울루스 침공
(1265)
제1차 차가다이인 울루스-우구데이인 울루스 전쟁
(1268~1269)

1265년 2월, 홀라구 칸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아바카 칸이 자리를 이어받는다.

1265년 중순, 노가이는 베르케 칸으로부터 다시 홀레구인 울루스를 공격하라는 명을 받는다. 노가이는 아바카의 동생과 치열한 전투를 치루던 중 야순타이라는 휘하의 장수가 겁을 먹고 5만명의 군사와 함께 도망가면서 포위되어 한쪽 눈을 잃고 애꾸가 되었지만 포위망을 뚫어 도망간다(쿠라 전투, 1265) 아바카의 동생은 노가이를 쫓아 섬멸하려고 했지만 베르케 칸이 친히 본국에서 군사를 이끌고 내려왔기 때문에 군사를 무를 수 밖에 없었다. 군사를 이끌고 내려왔던 베르케 칸은 그곳에서 급사한다(1267).

이후로 노가이는 뛰어난 무력으로 쌓은 공을 바탕으로 점점 세를 불리더니 마침내 칸의 자리까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니게 된다.

3. 전간기

1265년 이후로, 오랜시간 동안 두 국가 사이의 전쟁은 없었다.

4. 탈라부가 칸대의 습격

1290년, 아르군 칸은 주치 울루스 소속의 군대 5만명(5투멘)이 홀레구인 울루스를 공격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이 5만명의 군사는 주치 울루스 본국이 보낸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군벌로써 독단적인 침공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 당시 주치인 울루스는 노가이가 모든 권세를 쥐락펴락해 칸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제국은 혼란기를 맞이했던 시기였다. 아르군 칸은 군사를 보내 이들을 물리치고 지도자들을 사로잡은 후, 사방으로 승리 소식을 전달했다.

5. 갈등기

두 국가 사이의 사소한 약탈이나 전면전 근처까지 가는 시도 그리고 대규모 원정으로까지 이어지려는 시도는 존재했지만, 전쟁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마지막 대규모 원정은 홀레구인 울루스의 칸이 계획했지만 도중에 죽으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큰 전투가 없었다 뿐이지 분명히 두 국가 사이의 군사적 갈등은 존재했다.

6. 자니베크 칸

1355년, 킵차크 칸국의 자니베크 칸 치세때, 홀레구인 울루스를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침략했다. 자니베크는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하기 위해 루스 공국들에게도 출병하라고 요구했다. 그 당시 홀레구인 울루스는 내전으로 나라가 갈갈이 찢어져 독립국가만이 남아있었고 칸은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유력한 저항이 없어서 거의 무혈 입성으로 바그다드를 점령한 뒤 일부 유력자들을 처형하고 자기 장남에게 홀레구인 울루스를 다스리라고 정해놓았지만, 자니베크 칸이 사망하면서 정작 자기 나라에서 '대혼란'이 발생하며 나라전체가 내전의 수렁으로 빠져들어 홀레구인 울루스를 점령하지 못하였다.

7. 이후

티무르라는 인물이 역사에 등장하여 차가다이인 울루스를 통일하고 수많은 독립국가들이 존재하던 훌레구인 울루스를 침략해 점령한다. 그리고 주치 울루스의 '대혼란'을 수습한 토크타미쉬 칸을 상대로 전쟁을 걸어 승리하며 주치 울루스를 다시 혼란에 빠뜨렸다. 이후 주치인 울루스는 수많은 울루스들로 분할되어 오랜 시간에 걸쳐 오스만 제국, 자신들이 200년 동안 통치하던 루스 차르국 등에게 하나하나 정복당하며 멸망한다.
[1] 이 정면충돌과 몽케 칸의 오고타이, 차가타이계 숙청이 겹치면서 군주들끼리의 혈연관계를 통해 통일성을 유지하던 '몽골 제국'은 사실상 소멸하고 개별 칸국들이 병립(竝立)하는 시대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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