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8:30:16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

그리스어: ο μαθητης ον ηγαπα ο Ιησους (ον εφιλει ο Ιησους)
영어: Disciple whom Jesus loved(Beloved Disciple)

요한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 그 정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요한 복음서의 저자에 대한 논의의 떡밥으로 작용했다.

1. 출처2. 인물상3. 정체?
3.1. 사도 요한3.2. 요한 마르코3.3. 라자로3.4. 아폴로3.5. 사도 토마스3.6. 상징설3.7. 그 외

1. 출처

성경에는 이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에 대한 언급이 오직 요한 복음서에만 등장한다.
그 때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다.
(요한 복음서 13장 23절, 공동번역성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복음서 19장 26-27절, 공동번역성서)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달음질을 하여 시몬 베드로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가서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알려주었다.
(요한 복음서 20장 1-2절, 공동번역성서)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의 옆 자리에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 넘길 자가 누굽니까?" 하고 묻던 제자였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하지는 않으셨고 다만 "설사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그 제자는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글로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한 복음서 21장 20-24절, 공동번역성서)
 

2. 인물상

요한 복음서의 묘사로만 본다면 이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베드로보다도 더 우위에 있는 제자라고 볼 수 있다. 요한 복음서 13장의 최후의 만찬에서 그는 예수의 바로 옆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가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 가운데 나를 팔아넘길 사람이 하나 있다."라고 말하자 감히 베드로도 나서서 물어볼 엄두를 못내고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넌지시 물어보라고 신호를 줄 정도였다. 이런 면모는 요한 복음서 19장에 나오는 예수의 십자가 수난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도망친 가운데 오직 이 제자만이 예수의 어머니와 함께 십자가 앞에 왔고, 예수는 이 제자에게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한다.

성격은 상당히 지적이고 차분하며 신비로운 느낌마저 감도는 것으로 묘사된다. 요한 복음서 20장에서 예수의 무덤 문이 열렸다는 소식에 베드로와 함께 달려가서 무덤을 보는데, .(세마포와 머리를 싼 수건이 따로있는걸 발견한건 베드로이다.) 21장에서 고기를 잡으러 나간 제자들 중에 제일 먼저 예수를 알아본 이도 이 제자였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이 제자를 통해서 예수의 이야기가 전해진 것으로 묘사한다. 21장의 마지막에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이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요한의 공동체(혹은 학파, 교회)에 예수의 이야기를 전수한 사람이고, 적어도 그 공동체에서는 베드로보다도 더 우위에 놓는 인물이었으며, 정체를 확실히 밝히지 않은 가운데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면서 지적이고 차분한 면모를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반 우스갯소리로 자기가 쓴 복음에서 자기를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지칭하는 걸 보면 겸손한 인물은 아닌 것 같다는 소리를 듣는다. 베드로와 무덤 문이 열린 걸 확인하러 갈 따도 자기가 먼저 도착했다는걸 부각하는 등 얼핏 보면 은근히 자기를 띄우는 듯한 대목들이 있다.

3. 정체?

요한 복음서에서 이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정체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가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3.1. 사도 요한

가장 널리 알려진 입장이자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가설. 성 이레네오영지주의로 인해 논란에 빠진 요한 복음서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해 제베대오의 아들인 요한이 이 책을 썼다고 주장한 이래,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도 요한이 이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일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1]

하지만 사도 요한과 요한 복음서의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동일시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많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우선은 요한 복음서가 리용의 성 이레네오가 옹호하기 전까지는 영지주의자들이 주된 떡밥으로 사용해왔다는 점에서, 만약 사도 요한이 기록한 거라면 왜 영지주의자들 말고는 요한 복음서를 읽은 자가 없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또한 고대 교회의 교부들이 이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사도 요한으로 보긴 했지만 그가 사도 요한과 동일인이라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근거로 제기된다.

무엇보다도 다른 복음서에 묘사된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과 요한 복음서에 묘사된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서로 인물상의 차이가 난다는 점도 문제다.
  • 사도 요한갈릴래아 출신으로 갈릴래아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었으며, 예수의 갈릴래아 여행에 자주 언급된다. 하지만 요한 복음서에서는 갈릴래아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만약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이 저자라면, 왜 갈릴래아에 대해 관심이 없는지가 문제가 된다.
  • 사도 요한은 어부 출신이다. 다른 복음서들에는 고기를 잡는 모습이나 혹은 고기잡이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오지만, 요한 복음서에는 거의 없다. 21장 딱 한 군데에서 베드로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물고기를 잡았다는 묘사가 전부.
  • 다른 복음서들에는 베드로, 야고보, 사도 요한을 예수의 3대 제자로 중요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요한 복음서에서는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가장 중요한 제자로 묘사되며, 베드로는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보다 중요성에서 밀리는 걸로 나온다.
  •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야고보와 사도 요한을 보아네르게스, 즉 "번개의 아들들"이라 칭한다. 그 이유는 이 두 형제의 성격이 상당히 급하고 과격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심지어 예수를 환영하지 않은 마을에 격분해서, 예수에게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마을을 불지르게 할까요??"(…)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상당히 차분하고 신비로운 인물로 묘사된다.[2]
  •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대사제와 아는 사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확한 인용은 다른 제자 한 사람 으로,[5] 요한 복음서 18장 15절에 그 제자는 대사제와 잘 아는 사이여서 예수를 따라 대사제의 집 안뜰까지 들어갔으나…'라고 나온다.[6] 이 제자가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 또는 요한 복음서의 저자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만약 대사제와 아는 사이라면 레위지파에 속해 대사제와 친척이거나 아니면 바리새파나 사독파와 관련된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다.
  • 결정적으로 요한 복음서에는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유일하게 언급되는 대목이 21장인데, 21장에서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와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을 동일한 인물로 볼만한 근거를 주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사도 요한인 것은 맞지만, 그의 행적을 후대에 누군가 정리하고 다른 누군가가 편집하여 기록된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특히 마지막 장인 21장은 후대에 추가됐다는 주장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요한 복음서 참고.

그러나 요한 복음서는 여전히 저자가 사도 요한일 것이라는 강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어 넘어가기는 힘들 것이다. 리옹의 주교 성 이레네오는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카르포스의 제자였고[7] 각종 복음서들이 난무하던 초대 교회에서 공관복음서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정황,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한 복음서에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무시할 수는 없다.

3.2. 요한 마르코

이름이 요한이었다는 점에서, 바르나바의 조카이자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진 요한 마르코가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요한 마르코는 예루살렘에 집이 있었고, 그의 집 다락방에서 예수최후의 만찬을 했으며,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그의 집에서 모이곤 했다.

그렇게 본다면, 요한 복음서에서 사마리아와 유태지역의 지리를 잘 묘사하는 반면 갈릴래아의 지리는 잘 모르는 것은, 요한 마르코가 예루살렘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요한 복음서에서는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와 베드로 두 사람이 함께 활동하고 밀접한 관련을 맺는데 사도행전에서도 요한 마르코와 베드로가 함께 활동하기 때문에 이와 무관하지 않을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또한 요한 마르코가 예루살렘의 사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 대체적으로 인정되는데, 그렇게 본다면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대사제장과 아는 사이라는 것이 해명된다.

하지만 약점도 있다. 다른 복음서들은 요한 마르코를 사도로 보지 않지만, 요한 복음서에서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베드로보다도 더 우위에 있는 제자로 나온다. 게다가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가 요한 마르코라면, 그가 어떻게 요한 복음서도 쓰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만약 2개의 복음서를 요한 마르코가 전부 쓴 거라면 마르코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에 유사한 부분이 있어야겠지만, 둘을 비교해보면 유사한 특징을 찾을 수 없다.

3.3. 라자로

예수가 살린 라자로가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라자로가 유다 지역인 예루살렘 근처 베타니아에 살았기 때문에 사마리아와 유다 지역의 지리를 잘 알았을 것이고, 또한 예수가 특별히 사랑하는 자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8], 그리고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에 대한 요한 복음서의 언급이 초중반부에는 없다가 라자로가 살아난 뒤의 부분에서야 등장한다는 점, 요한 복음서 21장 말미에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는 라자로가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하지만 라자로와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동일한 인물이라면, 앞에서는 이름을 언급하고 뒤에서는 이름을 감추는 것이 해명되지 않는다. 또한 대사제와 아는 사이라는 점과 학문의 소양이 깊다는 점은 해명되지 않는 약점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라자로의 여자 형제들인 마리아와 마르타에 대한 서술[9]에 비추어 보아 예루살렘에서 머지 않은 곳에 살던 부유한 상류층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대사제와의 친분 및 학문적 소양도 설명된다는 해석이 있다.

3.4. 아폴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태인 아폴로가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일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우선 아폴로는 알렉산드리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출신이기 때문에, 유대교의 율법과 고대 그리스 철학에 지식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하지만 아폴로가 요한 복음서의 저자라면, 다른 요한 문서들인 요한 1·2·3서와 요한묵시록에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사도행전에서 아폴로가 세례자 요한의 물 세례만 알고 성령으로 받는 불 세례는 몰랐다고 말하는데 요한 복음서에 엄연히 성령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면 모순된다는 점, 요한 복음서에 등장하는 반유태주의적 성향이 아폴로가 활동하던 시점과는 상반된다는 점 등이 약점이다.

3.5. 사도 토마스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토마스라는 설. 사실 다른 복음서에는 이름만 나올 뿐인 토마스가, 요한 복음서에서는 구체적으로 3번이나 언급된다는 점, 토마스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가 심오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요한 복음서의 저자가 토마스가 아니겠느냐는 설이 상당히 비중있게 나오고 있다.

하지만 토마스로 보는 데에도 문제는 있다. 만약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토마스라면, 왜 어느 때는 이름을 숨기고 어느 때는 이름을 드러내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토마스는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다가[10] 부활한 예수가 나타나자 그분의 손발을 만져보고서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Dominus meus et Deus meus)!!"이라고 고백하는데, 정작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베드로와 함께 맨 처음 예수의 빈 무덤을 목격한 증인이다. 토마스의 이런 의심은 요한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와의 위상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토마스가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아니라고 해도 토마스 혹은 토마스 공동체가 요한 복음서를 형성한 요한 공동체와 뭔가 관련은 맺었을 개연성은 있다.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토마스가 꽤 비중 있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예수가 곧 주님과 동일하다는 것을 역설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던 토마스가 부활한 예수를 만난 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Dominus meus et Deus meus)!!"(요한 복음서 20장 28절)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요한 복음서 저자가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는 고백을 말하는 역할을 토마스에게 맡겼다는 점은, 적어도 토마스에게 중요한 뭔가가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토마스의 문제는 여전히 논란 중에 있다고 볼 수 있다.

3.6. 상징설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요한 공동체의 상징에 불과하다는 주장인데, 이 주장에 의하면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과 조합해보아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정체를 밝혀낼 수 없기 때문에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문서를 들고 있다. 사해문서에서는 쿰란의 에세네파 지도자의 이름을 의(義)의 교사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그가 신비로운 인물로 주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자임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의 최상의 가치가 의(義)임을 드러낸다. 이처럼 요한 공동체에서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칭호가 요한 공동체의 최고의 가치가 사랑임을 드러낸다고 본다.

또한 요한 복음서의 저자에 대해 성 이레네오와는 달리 오리게네스[11]"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오직 주님께서만 아신다"라고 했다는 점에서도, 실체적으로 요한 복음서의 저자가 존재하지는 않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추가로 요한 공동체를 넘어서서 "그냥 예수를 사랑하는 공동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요한 복음서 21장을 보면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제자'를 단순히 12사도로 볼 경우 제자는 '실체가 있는 누군가'이겠지만, 이때 '제자'라는 개념을 '어떤 특정한 단체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사람'이라고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는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지만, 그자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요한 복음서 9장 28-29절, 공동번역성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러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올가미를 씌울까 하고 궁리한 끝에, 자기네 제자들을 헤로데 당원 몇 사람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 (마태오 복음서 22장 15-16절, 공동번역성서).

그리고 세례자 요한을 따랐던 사람들도 제자로 불리고 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모습을 보이시는데, 이때의 제자 역시 그냥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을 의미한다. 성경의 신약에 넘어와서, '제자'라는 개념은 12사도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체를 가리키는 모호한 개념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보니, 거기에 많은 제자들과 함께 유다 각 지방과 예루살렘과 해안 지방인 띠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루카 복음서 6장 17절, 공동번역성서)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그냥 예수를 사랑하던 공동체를 상징한다"라는 주장이 있다. 더욱이 제사장과 잘 안다거나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레 섞여 있다. 당시 예수의 제자들 역시 다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만약에 이들이 1명이 아니라 다수의 따르는 자들을 표현한 것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의회 의원 중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올바르고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루카 복음서 23장 50절, 공동번역성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용기를 내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었고, 하느님 나라를 열심히 대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마르코 복음서 15장 43절, 공동번역성서)

제사장과 잘 안다고 하였는데, 만약 의회 의원이었던 요셉이었다면 이는 가능한 일이었다.
또 여자들도 먼 데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마르코 복음서 15장 40절, 공동번역성서)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계실 때 마리아 옆에는 작은 야고보가 있었다.

성경에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런 사람들을 그냥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과연 상징에 불과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학계의 주류 의견은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역사적 인물이었다고 보는게 다수설이다.[참고문헌] 요한 복음서가 일관된 표현과 논리를 보여준다는 점은, 적어도 저자가 실존할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칭호에 요한 공동체에 상징이 들어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제자의 존재까지 상징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3.7. 그 외

그 외에도 다음 사람들이 후보자로 올라와 있다.


[1] 아래 다른 후보들의 이야기에서도 나오듯, 요한 복음서에서의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지위에 걸맞은 사람이 사도 요한 외에 딱히 없다.[2] 개신교 일각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아마 사도 요한이 나이가 들어서 차분해졌을 거라고 말하지만, 성경에 묘사될 시점의 사도 요한은 젊었으므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예수와 함께 다니며 성령의 감화를 받아 성격이 변했다는 해석도 있다.[3]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유창하게 설교하자 대사제가 놀라는 대목이 나온다.[4]유대교의 율법은 당시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귀가 닳도록 듣고 체화되었을 것이고, 요한 복음서로고스 개념은 당시 에페소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사도 요한이 그곳에 살면서 교류하며 체득했다고 할 수 있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요한성모 마리아를 모시며 말년에 에페소에서 거주했다고 한다.[5] “And Simon Peter followed Jesus, and so did another disciple” ‭‭John‬ ‭18:15‬ ‭KJV‬‬[6] 헬라어 Ἠκολούθει δὲ τῷ Ἰησοῦ Σίμων Πέτρος καὶ ἄλλος μαθητής ὁ δὲ μαθητὴς ἐκεῖνος ἦν γνωστὸς τῷ ἀρχιερεῖ καὶ συνεισῆλθεν τῷ Ἰησοῦ εἰς τὴν αὐλὴν τοῦ ἀρχιερέως, καὶ ἄλλος:다른 μαθητής:제자[7] 많은 학자들은 폴리갑이 요한의 제자라는 설 자체가 근거가 부족하며 이레네오 등에 의해 후대에 윤색되었을 수 있다고 본다. 폴리카르포스가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한에 대한 언급이 없고 바울로 서간과의 연관성이 보이는 점, 요한과 폴리갑, 이레네오, 에우세비오의 나이 차이 추정 등이 근거이다. Kenneth Berding, "John or Paul? Who was Polycarp's Mentor?" Tyndale Bulletin 59.1 (2008): 135-143.[8] 요한 복음서 11:3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9] 마리아는 300데나리온[13]짜리의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어 닦아준 적이 있으며, 라자로가 죽기 직전 요르단 건너편에 있던 예수에게 보내 소식을 전달할 종도 거느리고 있었다.[10] a doubting Thomas라는 관용 표현의 유래[11] 마태오 복음서 19장 12절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고자되기를 실천한 인물인데, 그것을 안 주교사제서품을 철회하고 파문했다(…). 성인은 아니지만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실천가 중 하나.[참고문헌] Neirynck, Frans (1991). Evangelica II: 1982-1991 : Collected Essays. Uitgeverij Peeters. ISBN 9789061864530.

[13] 당시 일반 노동자의 300일치 임금에 상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