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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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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r-Admiral Sir John Franklin
(1786. 4. 16 ~ 1847. 6. 11)

1. 개요2. 일생3. 죽음4. 미디어

1. 개요

영국탐험가이자 해군 제독이다. 사망 당시 계급은 소장이다.

2. 일생

어릴 때부터 항해에 관심이 있어서 14살의 나이로 영국 해군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였다. 당시에는 나폴레옹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1801년 덴마크 해군과 교전한 코펜하겐 해전, 그리고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지휘로 유명한 트라팔가르 해전에도 참전하였다. 이외에도 여러차례 해전에 참전하였다.

1822년 시인인 엘리너 앤 포든(1795~1825)과 결혼했으나 3년 만에 결핵으로 사별하고, 포든의 친구였던 제인 그리핀(1791~1875)과 1828년 재혼했다.

이후, 여러차례 남반구북반구의 탐험을 실시하였고, 이 공적으로 1829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태즈메이니아 총독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비극적으로 끝난 북극 탐험이었다.

3. 죽음

프랭클린 제독은 오스트레일리아북극을 여러차례 탐험하였으며 1845년 영국 해군본부의 주도로 계획된 북서항로[1]를 개척하기 위한 탐험에 59세라는 비교적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지휘자로 선발되었다. 이 탐험은 해안포 등으로 무장한 성곽 너머를 공략하기 위해 박격포를 탑재하여 내구성이 높아 탐험선으로 자주 차출되었던 투폭함(Bomb Vessel)인 헤클라급(Hecla-class) 투폭함 HMS 에레부스(Erebus) 함(함장 제임스 클라크 로스(Sir James Clark Ross) 대령)을 기함으로 해 베수비우스급(Vesuvius-class) 투폭함 HMS 테러(Terror) 함(함장 프랜시스 크로지어(Francis Crozier) 대령)을 동반하고 해군 장병 등 139명의 탐험대원들을 포함한 함대가 동원된 프로젝트였다. 이들 중 5명은 그린란드에서 하선해서 최종적으로는 134명의 대원이 참가하였다. 두 척의 는 모두 증기기관을 함께 갖춘 기범선이었다.

이들은 1845년 5월 영국을 출발하여 그해 7월 그린란드와 캐나다 사이의 배핀 만에서 다른 배들에 최종적으로 목격된 이후, 소식이 끊겨버렸다. 이후,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했다.

그의 탐험대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구조단은 그의 대원들이 남긴 기록을 찾아내어 프랭클린 제독이 1847년 6월 11일에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나, 나머지 대원들도 결국 모두 굶주림과 추위에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영국 해군 본부는 이들이 3년분의 식량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3년이 지나고 나서야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탐험대를 보내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탐험 첫해 사망한 세 탐험대원인 HMS 에레버스 함의 해병대원 윌리엄 브레인(1814-1846)과 존 하트넬(1821-1846) 일등수병(Able Seaman), HMS 테러 함의 화부병장(Leading Stoker) 존 토링턴(1825-1846)의 시체를 묻은, 비치 섬(Beechey Island)에 위치한 무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2] 그 와중에 이들을 찾기 위한 원정에 참여한 일행 한 명도 여기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같이 묻혔다.

아내인 제인은 그의 시체를 찾아오는 것에 막대한 상금을 걸었고 영국 왕실도 그녀의 애원에 상금을 보태주며 여러 탐험대를 보내 이들의 흔적을 찾도록 주선했다. 그렇게 영국에서 보낸 여러 탐험대가 가서 수색했으나 허탕만 쳤다. 그러다 출발한지 거의 10년이 지난 1854년이 되어서야 그들의 행방이 조금씩 밝혀졌고, 다른 탐험가인 존 레이(John Rae, 1813~1893)는 이누이트들로부터 그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몰살당했다는 증언을 확보하였다. 이후, 프랜시스 매클린턱(1819~1907)이 이끈 탐험대는 프랭클린 탐험대가 남긴 돌무더기에 남긴 기록을 찾아내어 프랭클린 제독의 사망일자를 확인했고, 생존자들은 유빙에 갇혀 항해가 불가능한 배를 버리고 남하한다는 메시지를 입수하였다. 아마도 이들은 이렇게 남하하다가 모두 굶주림과 추위에 전멸했을 것이라고 추정되었다. 북극을 수색하던 탐험가 윌리엄 파커 스노(William Parker Snow/1817~1895)는 프랭클린 탐험대는 전멸했고 시체는 북극곰이 먹어치웠거나 동물들 먹이가 되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미국 탐험가인 찰스 프랜시스 홀(1821~1871)도 그렇게 생각했으며 세계적으로 점점 제독이 이미 죽었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제인은 남편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여 포기하지 않았다. 호주와 여러 오세아니아 지역을 여자로서 처음으로 탐험하고 여장부이던 제인이었지만 그녀는 이누이트를 야만인이라고 혐오했기에 야만인들이 백인을 거슬려 왜곡했다고 억지를 부리며 믿지 않았다고 한다. 제인은 전 재산을 쏟아 부었기에 1870년대까지 여러 탐험대가 수색을 나갈 정도였다. 이에 매클린턱은 쓸데없는 짓이라면서 그녀가 억지를 부린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끝내 더 이상 흔적을 찾지 못하고 1875년 제인은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80년대에 위 3명의 무덤을 발굴했는데, 이 시체들[3]은 기후 덕분에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 바싹 마른 것 말고는 썩지 않아 미라화되어 있었다. 덕분에 이들의 시체를 부검할 수 있었던 연구팀은, 시체에서 결핵의 흔적과 정상 수치의 10배가 넘는 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당시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통조림을 밀봉하기 위해 사용된 납땜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보인다. 위 세 탐험대원들의 미라는 연구팀의 의복 및 조직 샘플 채취 등이 끝나고 다시 정비된 무덤에 재안장됐다.

2010년대의 조사에 의하면 납땜은 납 중독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시체에 남아 있던 기준치 이상의 납은 질병으로 인해 신체 조직이 분해되면서 조직에 함유되어있던 납이 혈액으로 흘러들어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여기에 괴혈병아연 결핍을 비롯한 영양 실조까지 겹쳐 프랭클린 탐험대는 최악의 상태에 처하게 되는데, 배까지 항해불능에 빠지면서 배를 버리고 육로로 남쪽을 향하게 되지만, 이미 악화된 건강과 식량 사정 때문에 모두 사망하는 것으로 끝장나게 되었다. 최종적 단계에서는 식량이 없어서 이들은 식인에 의존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탐험대원들로 추정되는, 추가로 발견된 인간의 뼈에서 골수까지 파먹기 위해 뼈를 끓여 부러뜨린 흔적이 감식되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다른 탐험가들이 조사한 그 일대의 이누이트들의 증언들에 따르면, 생존자들은 물범과 조류를 사냥하거나 이누이트들과 최소한의 교류를 하면서 배를 버리고도 최소한 1년 이상은 생존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누이트들은 딱히 이들에게 생존방법을 가르쳐주거나 하진 않았고 그저 멀리서 지켜만 봤다. 미국 측 탐험대를 이끈 찰스 프랜시스 홀은 이누이트들이 그들을 돕지 않은 것 때문에 환멸을 느끼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영국 탐험대가 이누이트들과의 공조도 없이 불완전한 신기술들만 믿고 원정에 나섰기 때문이다. 애초에 탐험대에는 이누이트어를 할 줄 아는 인물이 없었고, 사태가 악화된 이후에도 이누이트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이누이트들에게 수백명에 달하는 탐험대를 도와줄 여력조차 없었다. 참고로 1871년 홀은 북극 탐험 도중 갑자기 돌연사로 죽었는데 이들은 그나마, 이누이트를 길라잡이로 고용하여 이 길라잡이가 먹을 게 떨어지면 바다표범을 사냥한다든지 길잡이도 잘 해서 홀이나 몇몇 죽은 이들 빼고 탐험대 다수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러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이 탐험의 전모는 대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며, 특히나 프랭클린 제독과 두 함장들을 비롯한 여러 주요 인물의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고, 짧은 쪽지를 제외한 이들의 항해일지나 탐험 일지 등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북극 지방을 다니며 이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연구팀도 있다. 그러다가 2014년 9월 2일 기함 HMS 에레버스의 잔해가 윌모트 앤 크램튼 만에서 발견되었고, 2016년 9월 3일에는 168년 만에 나머지 탐사선 HMS 테러의 잔해가 테러 만에서 발견되었다.#

사실, 이누이트 사냥꾼들은 대대로 HMS 테러와 기함 HMS 에레부스가 침몰한 위치를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백인들이 무시해버렸다. 위에 상술하듯이 이누이트들이 목격한 것을 프랭클린 미망인부터가 믿지 않았다. 이누이트들은 프랭클린 원정대 생존자들의 유품을 주워서 자신들이 쓰거나 난파선이 된 배에 가서 쓸만한 물건을 가져가기도 했다.[4] 2009년에도 이누이트 사냥꾼인 새미 코그빅(Sammy Kogvik)이라는 사람이 사냥을 하던 중에 얼음에 꽂힌 마스트 파편으로 처음 찾아내는등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까지 했으나, 그만 카메라를 잃어버려서 증거를 댈 수 없었다고 한다.

4. 미디어

어쨌든 프랭클린 제독은 로버트 스콧 해군 대령과 마찬가지로 영웅[5]으로 남았지만, 이 탐험은 북극탐험 사상 최악의 참사로 꼽히고 있다. <히페리온의 몰락>을 쓴 소설가 댄 시먼스가 이 사건을 바탕으로 <테러호의 악몽>이라는 소설을 썼다. 현재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는 상태이다.

다나카 요시키 소설인 월식도의 마물에서도 언급된다. 1857년이 배경인 당시, 이 사건은 아직도 화제가 되었고 당시 살아있던 제인 프랭클린 부인이 상금을 걸고 남편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1901년대를 배경으로 과거를 회상하던 주인공은 끝끝내 제인 여사는 남편의 흔적을 더 이상 보질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한다.

10월 1일자 서프라이즈에서 이 사건에 대해 그려진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2018년 3월 26일 AMC에서 상술한 댄 시먼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드라마를 방영했다. 제목은 원제인 The Terror. 자세한 내용은 더 테러(드라마) 참조.

리들리 스콧의 기획과 위에서 언급된 소설 "테러호의 악몽"을 바탕으로 제작부터 큰 관심을 모았다.

유비소프트의 게임인 ANNO 1800에서도 오마주되었다. 이 게임의 3번째 DLC "The Passage(길)"의 메인 퀘스트가 바로 '제인 페이스풀' 여사의 북극항로 개척 탐험에서 실종된 남편 '존 페이스풀'을 찾는 퀘스트라인이다. 이름과 북극 항로 개척에 나섰다가 실종되었다는 점에서 바로 제인 프랭클린 여사의 일화를 오마주했음을 알 수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Lost in the Arctic라는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탐험에 사용된 군함의 발견과정과 탐험대원들의 시신발굴 과정 등이 자세하게 나온다. 국내에서도 디즈니+를 통해 자막판을 볼 수 있다.


[1] 유럽에서 출발 캐나다쪽 북극해를 지나 베링 해협을 빠져나와 아시아쪽으로 가는 항로.[2] 한때 한국에서 존 토링턴이 최초의 냉동인간으로써 다시 부활했다는 루머가 떠돈 적이 있었는데 위클리 월드 뉴스 발 가짜뉴스다. 애초에 부검 결과 토링턴의 시신은 무덤을 파는 동안 배에 보관되었던 걸로 보이며 그로 인해 상당한 세포 손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심지어 뇌는 거의 녹아버려서 노란색 과립밖에 안 남았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런 시신이 얼어 있었고 썩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녹이니까 살아났다는 게 어찌 보면 더 이상하다. #[3] 구글에서 john franklin explorer mummy를 검색하면 이들 3명의 썩지 않은 시체들의 사진이 적나라하게 검색되는데, 부패하지 않았지만 수분이 전부 빠져나가서 감겨뒀던 눈이 떠져 눈동자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입술이 말라서 입이 벌어져 치아가 드러나 보이는 등 상당히 무서운 표정으로 남아있으므로, 보는 이에 따라서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다. 검색할 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보는 것이 좋다. 관을 꺼내서 뚜껑을 열었을 때, 시체에서 나온 습기가 얼어 위를 덮고 있어서, 연구팀은 뜨거운 물을 부어 이 얼음을 녹여서 시체들을 꺼냈다.[4] 현재 남겨진 탐사대원들의 유품도 대부분 이렇게 이누이트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이다.[5] 스콧의 실패에 대해서 여러 논쟁과 비판은 있지만, 스콧을 옹호하는 작가들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