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01 01:43:35

존 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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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Garang de Mabior
1945 ~ 2005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성장기2.3. 반군 생활2.4. 수단군 시절2.5. 혁명의 지도자2.6. 분열의 시대2.7. 말년2.8. 사망
3. 여담4. 둘러보기

1. 개요

남수단 임시 정부의 대통령.

탄자니아미국에서 유학했고 1983년 귀국 후 제2차 수단 내전 기간 동안 수단 인민해방군(SPLA)을 이끌면서 남수단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2005년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수단 공화국의 부통령과 남수단의 대통령이 되었으나, 이후 헬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945년 6월 23일,수단의 나일강 유역 북부 지역에서 가난한 딩카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10살에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가 되었지만 친척이 학비를 지원해줘서 와우와 럼벡 지방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2.2. 성장기

제1차 수단 내전이 진행 중이던 1962년,가랑은 남수단 분리주의 반군에 들어갔다.그러나 반군 지도자들은 가랑과 동 나잇대 소년들에게 교육을 받을 것을 권했고[1] 이에 따라 가랑은 탄자니아로 유학해 중등 교육을 이수했고,이후 미국 아이오와그리넬 칼리지에서 유학해 1969년,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가랑은 성적이 우수했는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유학을 제안받았지만 탄자니아로 돌아와 토미스 J. 왓슨 재단의 지원을 받아 다르에스살람 대학교(UDSM)에서 동아프리카 농업경제학을 공부했다.이 시기 가랑은 대학생 아프리카 혁명전선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다.[2]

2.3. 반군 생활

하지만 가랑은 UDSM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냐냐 반군에 합류하였다.가랑은 남수단 독립운동가이자 반군 간부였던 고든 무오르타트 메이엔의 부대에서 종군하였으며 고학력 인재였기에 이스라엘에 유학하며 군사 훈련을 받기도 했다.

2.4. 수단군 시절

1972년 아디스아바바 협정이 체결되어 제1차 수단 내전이 종전되자,가랑은 다른 반군 장병들처럼 수단군에 흡수되었다.가랑은 미국 조지아 포트 베닝의 육군보병학교에서 고급 군사 교육을 받았고 11년의 복무 기간 동안 대위에서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 기간에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아 1981년,농업경제학 석사 학위를,몇 년 후 동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3년까지 옴두르만 중심에서 21km 떨어진 와디 사예드나 지역의 수단 육군사관학교에서 선임 교관으로 복무하며 4년 동안 사관생도들을 교육하는 등 야전보다는 주로 교육 분야에서 복무했다.하르툼에 위치한 수단군 육군본부의 군사 연구부에 발령이 나서 근무했다.

그는 이 시기에 신수단을 향한 세속적,민족적 철학을 기반으로 '수단주의'라는 사상을 정립했다.수단주의에 따르면 수단인들은 단결을 위해 민족,종교,인종 등으로 파벌을 형성해서는 안 되고 흑인,아랍인,기독교,이슬람이라는 가치가 아닌 수단인이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국가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남수단 분리주의자가 아닌 통합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2.5. 혁명의 지도자

파일:John Garang.jpg
1979년,이란에서 호메이니이란 혁명을 일으켜 팔레비 왕정을 뒤집고 이란의 샤(황제)였던 팔레비 2세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은 뒤,성직자 법정 체제라는 신정 체제를 수립했다.

중동의 이슬람 지도자들과 율법학자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아 시아파 등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을 가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이는 이슬람 인구 비중이 높은 수단의 율법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단 공화국 대통령 가파르 니메이리는 아랍 사회주의자였으나 정교일치 성향이 강한 이슬람교 특성상 수단 율법학자들의 비위를 맞춰줄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기독교도들이 많았던 수단 남부 지방에 샤리아를 강제했다.

니메이리는 수단 전체의 이슬람화를 위해 각종 강압 정책들을 추진했으며 군사 분야도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1983년,수단군 육군본부는 수단 남부 보르 지방에 주둔한 제105보병대대에게 순환 배치 명목으로 북부로 이동하라 명한다.이는 실은 비무슬림 비중이 높은 105대대 장병들에게 샤리아 세뇌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경악한 105대대원들은 이를 격렬히 저항하며 거부했고,가랑은 비밀리에 혁명을 지지했다.1983년 5월 16일,105대대장 케루비노 관인 볼 소령의 지휘 아래 105대대는 보르에서 수단 아랍군을 습격해 반란을 일으켰고,가랑은 볼 소령과 별개로 에티오피아로 이동했다.

아요트 지방에서는 비슷하게 비무슬림 장병들이 주축이었던 제107보병대대의 대대장 윌리엄 뇨온 반이 마차르 소령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볼 소령과 마차르 소령은 서로 협동해 수단 아랍군을 파죽지세로 썰며 에티오피아와의 길을 연결했다.당시 에티오피아는 남수단 독립 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집결한 볼 소령,마차르 소령,가랑 대령은 수단 인민해방군,SPLA를 결성하였고 총 병력은 3,000명 정도였다.SPLA는 에티오피아에 본부를 두고 수단에 대한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수단군 내부 타 부대들의 반란을 독려했다.

이가 바로 20년 동안 이어진 제2차 수단 내전의 시작이었다.이 전쟁으로 인해 20년 동안 150만 명이 사망했다.

가랑은 기독교도였고,수단 남부 사람들은 주로 비무슬림[3]이었으나 이들은 초반에는 대무슬림 전쟁이라는 종교적 측면에 집중하지는 않았다.

가랑은 여전히 수단주의에 기반한 사회 통합론을 지지하며 수단의 모든 부족과 종교를 바탕으로 한 연립 정부가 오마르 알 바시르의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그의 이러한 대의는 1985년 SPLA가 코르도판을 향해 대규모 공격을 가하면서 실현되었다.

가랑의 SPLA는 에티오피아,우간다,리비아의 지원을 받아 세를 불려나갔고 남부 수단에서 대규모 영토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가랑은 SPLA의 병력들에게 '옳은 명분에 대한 확신.이것은 북수단과 그 국민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다'라고 훈시했다.몇몇 전문가들은 남수단에 풍부하게 매장된 석유가 가랑에게 재정적 동기를 제공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2.6. 분열의 시대

1991년 초,에티오피아 인민민주공화국의 수장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정권이 멜레스 제나위가 이끄는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에 의해 붕괴되었고 멩기스투는 로버트 무가베 치하 짐바브웨로 망명했다.이 소식은 멩기스투의 폭압 정권에 시달리던 에티오피아 국민들에게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같은 소문이었으나 SPLA와 그 지도자들에게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 그 자체였다.

멩기스투의 에티오피아는 SPLA에게 주둔 거점,화기 등을 지원해주고 있었는데,혁명으로 들어선 에티오피아 신정부는 이 지원들을 모두 철회했다.이 지원 중에는 거점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SPLA는 남수단 지방으로 거점을 옮겨야만 했다.

곧이어 1991년 8월,SPLA 지도부 내에서 분열이 시작되었는데,가랑과 SPLA 고위 간부 리에크 마차르,람 아콜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마차르와 아콜이 이끄는 세력은 'SPLA-나시르'라 불렸고 누에르족으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SPLA-나시르는 가랑의 '폭압적인 공포 정치'를 비난하며 그와 대립하고 딩카족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자행했는데,이는 딩카족들의 광범위한 분노를 불러왔고 남수단 사회는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분열되었다.뒤에서 수단이 웃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분열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었는데,우선 민족 차이가 컸다.가랑이 이끄는 병력은 딩카족 인원들이 많았고 마차르와 아콜이 이끄는 나시르 파벌은 누에르족이 많았고 이 둘 간에 평소 맺혀온 감정이 점차 커져가다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이 둘 사이에 감정이 얼마나 격화되었냐면 일부가 북수단으로 이탈(!)해 딩카족은 수단 인민해방군 반란군으로,누에르족은 '누에르 백군'이라는 수단군의 괴뢰군이 되어 옛 동지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기도 했다.

두 번째 원인은 수단의 분리 통치였는데,수단을 포함한 아랍 국가들은 정교일치 국가 특성상 유능한 장교보다는 말 잘듣는 장교를 선호하는 성향이 매우 커서 정부군의 수준이 낮고 전략전술도 졸렬하여 정규전에서는 동네북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지만,정치전과 비정규전에서는 상당히 유능한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수단군은 정치전을 상당히 잘해서 아디스아바바 협정 체결 후 이권을 각 부족에 불공정하게 분배해 상호 간 감정을 악화시켜 대립을 극심하게 만들었고 그 갈등이 내전 중에 폭발해 SPLA 분열의 촉발점이 된 것이다.이 전술은 영국,프랑스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사용해왔고 수단군 역시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을 통한 제국주의 경향이 강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분열은 머지 않아 정점을 찍었는데,1992년 9월 14일,SPLA 부사령관 바니는 SPLA에서 탈퇴를 선언,병력을 이끌고 가랑의 지배 영역에서 벗어났고 부사령관 자리는 참모총장이었던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 대통령이 부사령관으로 영전하며 채워졌다.

SPLA를 탈퇴한 바니는 볼,마차르,아콜과 합류하며 SPLA-연합을 결성하였다.

2.7. 말년

파일:John Garang in crowd.jpg
가랑은 1985년 임시정부에,1985년 선거에 출마할 것을 제안받았지만 정치 참여를 거부하고 반군의 지도자로 남았다.

2005년,수단 정부와 SPLA는 점차 계속되는 소모전에 피로를 느끼고[4] 케냐 나이로비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2005년 7월 9일,SPLA 내 최고위 계급이었던 가랑은 오마르 알 바시르와 만나 권력 분담이 포함된 헌법 발효식에 참여하였고,수단 정부의 2인자인 제1부통령에 임명되었다.

이 임시 행정부는 6년 간의 지속되기로 되어 있었고,이후 남부는 투표를 통해 분리독립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었다.가랑이 오른 수단 부통령직은 지금까지 그 어떤 기독교도 혹은 남부 출신이 올라본 적 없는 고위직이었다.

가랑은 취임식에서 '수단 국민들에게 축하드립니다.이것은 저의 평화도,바시르의 평화도 아닌 수단 국민들의 평화입니다.'라고 연설했다.

2003년 새해 첫날,가랑은 나이로비의 힐크레스트 호텔에서 푸르족[5] 지도자 압둘 와히드 알 누르와 만났다.이때 가랑은 누르에게 SPLA와의 연대를 선언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2003년 9월부터 2004년까지 15개월 동안 가랑과 알리 오스만은 나이바샤[6]에서 꾸준히 접선했고 2004년,이들 간에 포괄적 평화 협정(CPA)이 체결되었다.CPA는 가랑이 그동안 구상한 사회 통합론에 기반한 이상 국가 건설을 성공시킬 것으로 전망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랑이 부통령이 되었을 때 대내외적으로 논란이 상당히 많았는데,SPLA 내부에서의 평에 따르면 가랑은 반대 의견을 귀담아듣지 않고 정적들을 투옥하거나 살해하는 등 광범위한 숙청을 자행했다는 것이었다.그가 지휘한 SPLA는 인권 침해로 기소되기도 했다.

SPSP의 이념은 상당히 어두워 가랑은 마르크스주의자부터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규모의 지지층과 반대파가 생겨났다.

미국 국무부는 가랑을 우호적으로 바라보며 그의 존재가 다르푸르 학살 해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전망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이 견해에 회의적이었다.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가랑을 평화의 동반자라 부르며 우호적으로 대했고 그의 기독교 신앙을 강조하며 미국 개신교 사회의 공감을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부시는 자신의 고향 텍사스 미들랜드 복음주의 교회까지 동원해 가랑의 지지도를 높이려 시도하기도 했다.가랑은 자신의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라디오 등 각종 매체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2.8. 사망

2005년 7월 말,가랑은 오랜 동맹국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과 르와투키라 지방에서 진행한 회담을 마친 후 우간다 대통령기인 Mi-172 기체를 타고 복귀하던 도중 실종되었다.

가랑은 이 회담 일정을 사전에 공지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설립한 케냐 인군 지방 뉴쿠시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라 언급하였다.

우간다는 헬기 실종 24시간 후 수단 정부에 회담 사실을 통보하였으며 수단 정부는 SPLA에 연락해 관련 정보를 요청했다.이에 SPLA는 Mi-172 기체가 과거 SPLA 훈련소에 안전하게 착륙했다고 구라를 쳤고 수단 국영 TV는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그러나 이 구라는 머지 않아 들통나 수단 정보부 장관 압델 바삿 사브다랏에 의해 반박당했고 곧이어 SPLA 대변인 야시르 아르만은 SPLA는 내부 승계자 선정을 위해 의도적으로 헬기의 추락 사건을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금요일에 추락한 가랑의 헬리콥터는 토요일 내내 실종 상태를 유지했고 이후 수단 대통령 오마르 알 바시르는 '날씨가 좋지 않아 낮은 가시성으로 인해 헬기가 수단 남부의 한 산맥에 충돌했고 이로 인해 가랑 박사와 그의 동료 6명,승무원 7명이 숨졌다고 성명을 냈다.이때까지만 해도 가랑은 남수단 지방에서 자신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수단 트리뷴은 가랑의 유산은 남수단의 독립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가 없었다면 수단인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잊혀졌을 것이라 말했다.

파일:Sudan Juba grave of John Garang 17jun2006.jpg
존 가랑의 묘소.남수단군이 경비를 서고 있다.

3. 여담

남수단의 독립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현재 엄밀하게 1대 대통령은 그의 부통령인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현 남수단 대통령)가 대행하게 되었지만 이미지 때문에 명예 대통령으로서 초대의 자리를 넘겨받게 되었다.

남수단 파운드 지폐 전권종 앞면에 들어가 있다.

중앙아프리카 지역 국가의 독립 운동을 이끈 국부였으나 독립 직전에 불의의 항공 사고로 사망했다는 점에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바르텔레미 보간다와 공통점이 매우 많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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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 아이들을 소년병으로 활용하는 다른 아프리카나 중남미 게릴라,민병대 지도자들을 생각하면 반군 간부들이 그나마 양심적인 자들이었는 듯 하다.[2] 훗날 우간다의 지도자가 되는 요웨리 무세베니와 이 시기 친분을 쌓았다는 정보가 있는데 둘은 서로 다른 시기에 대학교를 다녔기에 오류다.[3] 의외로 기독교보다는 애니미즘 등의 토착 신앙이 주를 이루었다.그러나 이는 오히려 기독교도 중심보다 더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는데,이러한 신앙은 자신들의 부족 공동체의 전통 그 자체였기에 이를 탄압하려는 무슬림들의 횡포에 저항해 공동체를 지켜내려는 의도가 강했기 때문이다.[4] 수단군은 중동 국가들에게서 받은 지원으로 공습을 퍼붓는 등 SPLA를 성공적으로 압박했으나 정규전에서의 졸렬한 패배로 인해 남수단을 굴복시키는데에 실패했으나,SPLA는 수뇌부 와해,병력 소모,전쟁범죄,내부 갈등으로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한 상황이었다.[5] 추후 바시르 정권이 자행한 다르푸르 학살의 희생자들이다.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기독교도가 아닌 독실한 무슬림들이었다.이후 이들은 이슬람교에 대해 회의감을 품고 개종하거나 이슬람 세속주의자가 되었다.[6] 케냐 나이로비 북서쪽의 작은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