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말 그대로, 오래 살던 타향을 고향에 견주어 이르는 말이다. 병주고향(幷州故鄕)이라고도 부른다. 타향에 정들어버렸다는 말로 병주지정(幷州之情)이라는 말이 쓰인다. 자신이 군 복무 하던 지역도 제2의 고향이라 하는 경우도 많다.2. 유래
중국 당나라의 시인인 가도가 오랫동안 병주 땅에서 살다가, 병주를 떠나고 나니, 병주가 그리워지더라는 시를 쓰면서 유래된 것. 병주 땅 객사에서 십 년 세월을 보내면서 客舍幷州已十霜(객사병주이십상) 돌아가고픈 맘에, 밤 낮으로 고향 함양을 생각했네. 歸心日夜憶咸陽(귀심일야억함양) 뜬금 없이 다시금 상건수를 건너서, 無端更渡桑乾水(무단갱도상건수) 병주를 바라 보니 이 또한 고향일세. 卻望幷州是故鄕(각망병주시고향) ㅡ 도상건 중에서 |
쉽게 말해, 병주에서 살면서 고향인 함양을 그리워하다가, 다시 다른 곳으로 와보니, 정들어버려서 병주 또한 그리워한다는 뜻의 시. 마지막의 각망병주시고향에서 유래되어, 병주고향이라는 말이 생겼다. 제2의 고향이라는 말이 생긴 건 대한민국으로 오면서 생긴 말이다. 그래서 문서의 제목도 한국에서 쓰이는 제2의 고향.
대한민국에서는 서울 출신이 다른 지역에서 군복무 또는 회사를 다녔다고, 제2의 고향이 군복무지 또는 회사근무지가 되는 사례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사실 이 건 육군이 30개월 복무하고, 공군이 36개월을 복무했던 60년대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말.
이 말을 쓰는 사람은 최소 40대 이상이다. 10대 ~ 30대에서 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애초에 오래된 말이기도 해서, 탑골공원에 계신 어르신들이 가끔 쓰시는 말씀들이다.
가수 윤수일이 1981년에 발표한 윤수일밴드 1집의 곡으로도 유명하다. #
3. 사례
이산가족, 북한이탈주민 등이 대표적인 제2의 고향을 가진 분들이다.박병호도 고향은 전라북도 부안이지만, 성장한 곳은 서울이었다.
보통은 연예인들에게서 많이 보이는데, 애프터스쿨의 레이나, 리지, 에이핑크의 정은지 등이 여기에 속한다. 송강호도 살던 곳과 대학교까지 부산이었지만, 극단 생활은 서울의 동숭에서 했고, 곽도원의 경우에는 고향이 서울이지만[1], 자신의 연기는 경상남도 밀양시의 연희단거리패 밀양연극촌이 시작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축구를 하겠다고 전학 오는 경우도 있다. 그 예가 차범근. 하지만, 차범근이 들어갔던 그 영도중학교는 차범근이 유니폼을 입기도 전에 축구팀이 해체됐다. 차범근이 필드하키 선수가 된 것이 이 때였다. 결국 차범근은 축구를 하기 위해 경신중학교로 전학을 간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영도중학교는 축구부를 해체한 것 때문에 갖은 욕을 먹다가, 결국 몇 년 뒤에 재창단되었고, 이렇게 해서 전학을 온 사람이 바로 허정무.#
이촌향도 현상 또한 후자의 경우. 대부분 자녀들이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상경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생각해 보아도, 후자의 경우는 매우 많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전국 팔도에서 돈을 벌기 위해 내려간 사람들이 아예 그 지역에 정착을 하는 경우도 많다. 서울특별시가 인구가 엄청나게 많아진 건 딱히 확장 때문만은 아니었고, 구로공단 등의 공장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었다. [2] [3]
4. 정치적 고향
넓은 범위의 정치적 고향도 여기에 속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송영길. 원래 전라남도 고흥군 출생인데, 성인이 된 후 고흥군이나 다른 곳에서 국회의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정치 생활 자체를 인천광역시 계양구에서 했다. 계양구의 선거구가 갑, 을로 쪼개진 뒤로는 을 지역구에서만 3선을 하는 중이다. 인천광역시 시장도 했던 경력이 있다.[1] 광남고등학교가 광진구에 있다.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동남 방언과 서울말을 섞어 쓰는 조범석 검사로 나왔다.[2] 그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석관동의 오리온 공장이라던가, 양평동5가에 위치한 롯데칠성음료 공장, 서울 강서구의 하이트진로 공장이다. 옛날에는 영등포역 바로 앞에도 공장이 있었다.[3]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도시가 발전한 사례가 바로 울산광역시와 삼호읍. 울산의 경우, 광역시로 승격됐고, 삼호읍은 영암군에서 중심지로 삼을 정도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을 정도. 옛날엔 영등포역 앞에도 공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