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06 04:44:12

제주도통어전연운동



1. 정의2. 개설3. 전개4. 의의5.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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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의

개항 후 일제의 어업권 침해에 맞서 제주도 해역의 어업권을 수호하기 위해 전개되었던 경제자주권 수호운동.

2. 개설

전연(展延)은 실시 시기를 뒤로 미룬다는 의미이다. 1883년(고종 20) 「조일통상장정」 체결부터 1894년 청일전쟁이 벌어지는 시기에 전개된 어업권 수호투쟁이다.

제주도의 주생업인 어업을 일본인 어로자의 침해로부터 수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조선 정부는 일본을 상대로 일본인 어부들의 제주도 통어를 지연시키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꾸준하게 폈다. 그 결과 마침내 일본인 어로업자들의 제주도 통어를 봉쇄할 수 있었던 민족경제 수호운동이다.

3. 전개

일본인 어로업자가 제주도 해역에 나타나 천혜의 수산자원인 해삼, 전복 등을 채취하기 시작한 것은 1879년 나가사키의 어부 요시무라(吉村興三郎) 등이 근대적 어로채취기계인 잠수기를 가지고 제주도 근해의 비양도에 진출한 후부터이다. 그 뒤 일본인 잠수업자들은 제주 해역에서 주로 전복 채취에 종사했는데 이는 밀어행위였다.

일본 어로업자들이 한반도 해역에서 어로할 수 있도록 합법적으로 보장한 것은 1883년에 체결된 「조일통상장정」이다. 통상장정 41조에 의해 일본은 전라, 경상, 강원, 함경 등 4도 해역에서의 어로권을 획득했고, 남해동해에 통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일본인 어로업자들의 불법행위를 단속하기 위해 「조선국연안어채범죄조규[1]」가 체결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일본인 잠수업자들은 제주도 해역으로 출어해 근대적인 잠수기 어업으로 전복 어장을 침해하였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여성들의 잠수어업 활동에 의해 생계를 지탱해가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해녀들의 잠수 채취로는 일본인 어부들의 잠수기 어업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일본인 어부들이 거리낌없이 나체로 나타나자 남녀가 유별한 사회풍습에 익숙한 제주도 해녀들은 일본인 어부들을 피해 어장을 버리려는 일도 있었다. 또한, 잠수기 어업에 의한 전복 채취량은 해녀의 잠수 어채에 비할 수 없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자라지도 않은 어린 전복까지도 마구 잡아들여 제주 전복 어장은 황폐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20만 제주도민에게 직접적인 경제적 위협이고, 사활 문제였다. 국가적으로는 자원의 수탈이고 경제권의 침해였다. 이리하여 일본 어로업자들의 제주통어가 중대한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정부는 제주도를 일본인에게 통어가 허용되는 지역에서 제외시키려는 교섭을 시작하였다. 1884년 6월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김병시의 이름으로, 그 해 8월 서리독판교섭사무 김굉집(金宏集)의 이름으로 두 차례에 걸쳐 일본측에 제기했던 것이다.

「조일통상장정」의 기본 정신이 양국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과 이 장정 12조에 증개의 필요가 있을 때는 수시로 교섭에 의해 고치기로 한 점을 들어, 제주도를 일본인들의 어채 구역에서 제외하도록 요구하였다. 일본은 이 요구에 대해 통어권 자체를 폐기할 수 없으나 제주도 통어를 잠정적으로 중지할 것임을 통고해 왔다.

그러나 1886년 9월에 「조일통상장정」 41조에 의거해 어업 문제를 확정짓기 위한 교섭이 시작되면서 일본 정부는 일본인의 제주도 어채를 허용할 것을 강력히 요구해 왔다. 나아가 일본인 어부 후루야(古屋利涉)는 그간의 제주통어 금지로 입은 손해라 하면서 거액의 배상금마저 청구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인 어부들의 제주어채 활동이 성행했고, 일본인의 불법적인 밀어 활동으로 침탈된 수산자원은 막대하였다. 일본인 어부들은 제주도민의 방해를 받자 무기를 들고 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1887년 8월에 모슬포에서 이만송(李晩松)이 일본인 어부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일어업장정체결 교섭의 난관은 바로 제주통어의 문제였다. 일본이 제주도 통어를 장정 성립 후 1년간 잠정적으로 금지하는 것을 조건으로 1889년 11월 12일자로 「조일통어장정[2]」이 조인되었다. 이 장정에 대한 제주도민의 반발은 격렬하였다. 제주도민은 제주 통어의 잠정적으로 금지가 아니라 이의 영파[3]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1890년 5월 31일부로 일본인 어부들의 제주 통어를 잠정적으로 금지시킨 조처를 해제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조선 정부는 제주도민의 반대가 격렬하다는 사실을 들어 다시 1년간 전연할 것을 일본측에 교섭하였다.

이 때 일본은 제주통어 문제의 대안으로 인천∼철도(鐵島) 사이의 운수 업무를 일본인에게 허가해줄 것과 일본인 어부들의 어세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제주통어 문제를 이용해 서해 경제권을 확대하는 방편으로서 대동강 하구의 철도를 개항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제주도 통어를 다시 6개월간 전연하겠다고 통고해왔다.

조선 정부는 제주도 통어를 극력 반대하는 제주도민을 효유해 문제를 타결하고자 내무주사 이전(李琠)을 순심사(巡審使)로 임명해 제주도로 파견하였다. 이러한 처사에 대해 제주도민은 생존을 지키기 위해 전 도민이 궐기, 순심사를 추방하고 소요를 일으켰다.

이에 놀란 정부는 문제의 중대성을 새삼 깨닫고 독판교섭통상사무아문 민종묵에게 일본과 교섭하게 하였다. 이 교섭에서 일본이 다시 6개월간 제주 통어를 전연시킬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정부는 호군 이규원(李奎遠)을 제주도에 파견해 소요를 진압하였다.

이처럼 정부와 제주도민간에 혼선이 빚어지자, 이 틈을 이용해 일본인 어부들은 황금어장 제주도에서 불법적 어로 활동을 감행하면서 폭행살인을 일삼았다. 제주목사는 일본인 단속을 정부에 건의하게 되었고, 이 문제로 조선과 일본 양국정부는 합동조사단을 제주도에 파견하였다[4].

제주도 통어 문제가 제주도민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임을 파악한 조선 정부는 제주도민의 생업을 보호하고 우리 수산자원을 일본의 수탈에서 수호해야겠다는 방침에서 세워 제주 통어의 전연이 아니라 영파를 위한 외교 교섭을 펴게 되었다.

우리측이 주장한 영파의 논리적 근거는 당시 내무협판으로 있던 미국인 그레이트하우스(Greathouse, 具禮)가 제시하였다. 조선 정부가 고용한 법률가 출신의 미국인 고문 그레이트하우스는 통상장정의 42조에 의해 조약의 유효기간이 5년인데, 이 기간 내에 새로운 장정의 체결이 없었고 조약의 유효기간이 종결된 뒤 다만 구장이 준수되어온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통상장정 개정을 제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1882년의 통상장정 41조에 약정된 통어 구역에는 제주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일본인 어부는 전라·경상·강원·함경 4도의 해빈에서만의 어로가 약정되어 있을 뿐이고 제주도와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해역에서까지 허용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레이트하우스의 이 해석에 따라 조선 정부는 통어장정을 그대로 둔 채 모법이라 할 통상장정의 개정을 일본에 요구하였다. 1888년 7월에 독판통상교섭사무 민종묵이 정식으로 일본공사 곤도(近藤眞鋤)를 통해 새로운 통상장정의 체결 교섭을 통고하였다. 1891년 8월에 협상을 위해 협판내무 르장드르(Le Gendre, C. W., 李善得)를 변무사로 임명해 일본에 파견함을 통지하였다.

르장드르는 통리기무아문주사 이현상(李鉉相)과 같이 일본에 건너가 협상을 시작하였다. 이 때 일본은 제주도 통어의 금지 대가로 철도를 개항할 것과 일본인을 조선 해관세무사(海關稅務司)로 임명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서해 진출을 기도하는 일본의 야심은 청국의 강력한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통상장정 개정 교섭만 혼미를 거듭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도리어 1891년 5월 11일로 제주 통어가 개시될 것이라고 외무대신 에노모토(榎本武揚)의 이름으로 나가사키현지사(長崎縣知事) 나카노(中野建明)에게 통지하였다. 이는 일본 정부가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외교적 관례를 벗어난 실력 행사를 한 것이었다. 이에 구주 북부지방의 어부들이 대대적으로 제주도 해역으로 출어해 불법 어로를 재개하였다.

당시 일본 어로로 제주 어장이 입는 피해는 매우 심각하였다. 당시 제주도에 유배 중이던 김윤식의 기록에 의하면, 매일 300∼400척의 배가 제주도에 통어하기 위해 오갔고 한 척의 어선이 하루에 600개 정도의 전복을 채취한 만큼 그들의 채취량은 놀랍다고 하였다.

또, 일본인 어부들의 행패가 심하였다. 살인·상해·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제주도민의 반발도 거세어 자주 충돌이 일어났다. 제주도 통어의 영파를 목적한 르장드르의 적극적인 교섭에 대해 일본측은 제주도 해변에서의 어로를 조약 성립 후 6개월간 금지할 것을 수락하였다.

그러면서도 우리 정부가 반대하는 대동강구(大同江口)의 개항 대신 전라도의 한 항구를 개항해 줄 것과, 전라도 해안과 소안도 및 제주도 부근 도서에 일부 어민들의 쇄조저축어개장(曬調貯蓄魚介場)의 설치를 허가해줄 것 및 부산 절영도[5]의 일본인 거류지를 확대해 줄 것을 제안해 왔다.

이 제안에 대해 조선 정부는 전라도서의 개항과 장정의 10년간 유효를 내세우면서 10년 후에도 우리측에서 제주 통어를 허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일본측으로는 제주도 어장에 대한 야심을 포기할 수도 없었거니와 절영도의 일본인 거류지 확대도 열강의 반대로 실현 가망이 없어지자, 통상장정 개정 협상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함경도 방곡령 배상 문제로 일본과 마찰이 일어나고 동학교도들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으로 국내 정세가 긴박해지자 조선 정부는 르장드르를 소환하였다. 제주도 통어 문제를 포함한 통상장정 개정 교섭이 진행되는 중에도 일본인 어로업자들의 제주어업권 침해행위는 끊이지 않았다.

1892년 외무주사와 같이 제주도에서의 어로문제 현장을 답사한 일본인 구로자와(黑澤明淸)는 70∼80대의 잠수기가 전복과 미역을 채취하고 있으며 이런 식으로 남획한다면 앞으로 3∼5년 사이에 자원이 고갈될 것이라고 본국 정부에 보고할 정도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제주도의 수산자원을 수호하고자 하는 노력은 일본 어로업자들의 밀어 금지에서 통어 잠연(通漁暫延)으로, 다시 통어해금전연(通漁解禁展延)을 거쳐 통어의 혁파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던 조선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조선 개정을 적극적으로 교섭하려 했으나 한반도 경제 침탈에 모든 방법을 서슴지 않던 일본의 침략정책으로 말미암아 지연되기만 할 뿐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1904년 러일전쟁을 맞게 되었다.

이미 1900년경기도 해역의 어로권을 확보했던 일본은 러일전쟁이 유리하게 전개되자 충청, 황해, 평안 3도 해역의 어채권을 20년간이라는 조건부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 해수구의 어채권은 완전히 박탈당하였다.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육수구에서의 어로권마저 장악하기 위해 1908년 어업협정서(漁業協定書)를 성립시키고 「조일통어장정」을 폐기하였다.

4. 의의

제주통어전연문제는 이처럼 일본의 어업권의 침해 과정에서 전개되었던 수산자원 방위의 경제자주권 수호운동의 일면이었다. 작게는 제주도민의 사활에 관계되는 경제자주권의 수호운동이며, 크게는 민족경제 수호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5. 참고 문헌


[1] 朝鮮國沿岸漁採犯罪條規[2] 朝日通漁章程[3] 영원히 통어하지 못하게 하는 일[4] 조선측 대표는 부호군 朴用元, 일본측대표는 주인천영사 林權助[5] 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