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미국 항공우주국 국장 제임스 에드윈 웹 James Edwin Webb | |
출생 | <colbgcolor=#ffffff,#1f2023>1906년 10월 7일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탤리 호[1] | |
사망 | 1992년 3월 27일 |
미국 워싱턴 D.C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교육학 / B.A.) 조지타운 대학교 (법학전문석사) |
정당 | |
경력 | 제 7대 미국 관리예산실장 (1946~1949) 미국 국무부 차관 (1949~1952) 제 2대 미국 항공우주국 국장 (1961~1968) |
1. 개요
제임스 에드윈 웹은 미국 항공우주국의 제2대 국장으로 NASA의 국장직을 역임하면서 아폴로 계획의 초반 임무들을 진두지휘 한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이름을 딴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이 2021년 12월 25일에 발사되었다.2. 상세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이 케네디에 패배하며 공화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민주당 존 F. 케네디 행정부에게 정권을 넘겼다. 이전 해리 S. 트루먼 행정부 시절부터 관료로 일하며 국무차관까지 지냈으나, 정권교체로 인해 야인이 된 제임스 웹은 정계에 연줄만 유지한 채로 기업 임원직을 전전하다가 JFK 행정부에서 그를 불러 다시 관료계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평소 예산을 관리하고 인적 자원을 다루던 그를 케네디가 NASA에 배정했다.피그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같은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많이 터진 케네디 행정부 초반이었지만, 사실 제임스 웹은 전쟁을 치러야 하는 위치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모종의 이유로 웹은 JFK 행정부 출범 이래 최초로 소련에게 헤드샷을 쳐맞은, 그리고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미국은 스푸트니크 쇼크와 뱅가드, 라이카 등으로도 국가적 위신이 땅에 떨어졌지만,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의 인류 역사상 최초의 우주 비행 이후 미국은 안보 같은 건 둘째치고 큰 충격에 빠졌다. 이렇게 우주를 향한 소비에트의 행진이 전 지구를 뒤엎으며 웹과 NASA는 케네디 행정부에게 온갖 잔소리를 다 들어야 했고, 그 전까지 나름대로 보스토크 계획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대응으로 착실히 준비하던 머큐리 계획은 묻혀버렸다.
그래도 앨런 셰퍼드와 거스 그리섬의 탄도비행을 거쳐 존 글렌의 궤도비행을 끝끝내 성공시킨 뒤 글렌을 정계에 입문시키고, 케네디가 라이스 대학에서의 그 유명한 연설에도 불구하고 허무하게 절명한 뒤 존속이 불투명했던 유인 달 탐사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나가는 데에는 웹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정치적인 센스가 꽤 괜찮았던 웹은 린든 B. 존슨(LBJ) 행정부에서도 여러 의원들을 상대로 늘 로비를 하고 다녔고, 그런 웹의 로비는 제미니 계획이 진행되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제미니 프로그램의 필수요소이자 궤도상 미션의 스파링 파트너였던 아지나 표적기가 자꾸 말썽을 일으키고, 제미니 9호 승무원 엘리엇 시와 찰스 배셋의 T-38이 우주선 제작 공장에 추락하여 두 우주비행사가 순직하는 사고도 있었으며, 인류 역사상 최초의 궤도상 우주선 도킹에 성공한 뒤 끔살당할 뻔 했던 제미니 8호 등 여러 사건사고들이 많았지만, 웹이 평소 갈고 닦아온 연줄과 말빨 덕에 전체 프로그램의 진행에는 악영향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폴로 계획이 막 시작되면서 벌어진 아폴로 1호 화재 참사로 우주비행사 세 명이 발사 직전에 순직하자,[2]NASA에 대한 비판 여론이 쇄도했다. 민주당에서도 월터 먼데일 등 여러 의원들이 달 탐사 프로젝트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시기, 웹은 자신과 NASA가 투명한 진상조사와 사고방지 대책마련에 힘쓰겠다며 정치권에 확신을 심어줬다. 또한 정치권의 까임공세를 받아내면서도 죄책감을 갖고 있던 NASA 엔지니어들을 챙겨주기도 했다. 아폴로 우주선 개발의 주요 책임자 중 하나였던 조 셰이(Joseph Francis Shea)가 대표적인 사례로, 승무원들이 순직한 뒤 너무 큰 상실감과 죄책감에 시달려서 자살 징후를 보이자(게다가 국회의원들의 전방위 공세에 시달려야 하는 청문회에 출석한다면 정신이 온전치 않았을 것이었기에) 웹은 그를 여러 상담사들과 정신과 의사들에게 보내면서 스트레스 덜 받는 직책(나쁘게 말하면 실권 없는 한직)으로 전보시켰고, 비록 셰이는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서 NASA를 나갔음에도 웹의 배려 덕에 NASA 관계자들 사이에서 그는 나쁘지 않은 평판을 유지하여 MIT 교수 겸 NASA 자문으로나마 훗날의 ISS 기획에까지 기여할 수 있었다. 또한 웹은 CIA로부터 소련의 N1 로켓 개발 첩보를 전해듣고 베르너 폰 브라운이 제안한 달 궤도비행 미션을 적극 지지하며 1968년 아폴로 8호의 크리스마스를 기획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을 전폭적으로 믿어줬던 LBJ가 재선 출마[3]를 포기하자, 아폴로 계획의 첫 유인 우주비행인 아폴로 7호 발사 얼마 전에 사임하였다. 하지만 온갖 비판을 감당해내며 NASA가 공밀레에 전념할 수 있게 NASA의 방파제 역할을 했던 그의 공로는 아폴로 11호로 결실을 맺었고, 후기 아폴로 미션들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조기에 마무리되면서 정치력을 발휘해서 예산을 끌어오고 까들을 버로우 태우던 공로가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NASA 관계자들은 새삼 깨닫게 되었다.
1992년 사망한 뒤, NASA는 비록 국장으로서 달 착륙에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보여줬던 리더십과 헌신을 기리는 의미로 허블 우주 망원경의 차세대 우주망원경을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으로 명명하였다. 2018년 발사 예정이었지만 2021년으로 연기, 그리고 아폴로 8호의 크리스마스를 노린 건지, 딱 12월 25일에 발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