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6 07:07:02

제레미 은지탑

카메룬의 前 축구선수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제레미
Geremi
본명 제레미 소렐레 은지탑 포수
Geremi Sorele Njitap Fotso
출생 1978년 12월 20일 ([age(1978-12-20)]세) /
카메룬 바푸삼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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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77cm
직업 축구선수 (라이트백, 미드필더 / 은퇴)
소속 선수 라싱 바푸삼(1995~1996)
클루브 세로 포르테뇨(1996~1997)
겐츨레르비를리이 SK(1997~1999)
레알 마드리드 CF (1999~2003)
미들즈브러 FC (2002~2003 / 임대)
첼시 FC (2003~2007)
뉴캐슬 유나이티드 (2007~2009)
MKE 앙카라귀쥐 (2010)
AE 라리사 FC (2010~2011)
국가대표 118경기 13골 (카메룬 / 1996~2010)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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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메룬의 전 축구선수.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이지만 소속팀의 상황에 따라 오른쪽 풀백이나 오른쪽 미드필더로 나서기도 했다. 활동량과 피지컬이 훌륭했고 프리킥 골도 득점할 수 있는 킥력 역시 보유했다.

2. 클럽 경력

2.1. 초기 경력

과거 축구 선수였던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그는 학업과 축구를 놓고 고민하다가 축구를 선택하여 대학 진학 시험을 포기하고 프로 선수로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16세에 불과했던 1995년 고향팀 라싱 바푸삼 FC에 입단하여 리그 우승과 컵대회 우승에 공을 세웠다. 1996년 파라과이의 세로 포르테뇨에서 잠시 선수로 생활한 뒤 1997년 터키의 겐츨레르비를리이로 이적하며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터키 리그에서 두 시즌 동안 57경기에 출장한 뒤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게 된다.

2.2. 레알 마드리드 CF

파일:레알마드리드 제레미.jpg

1999년부터 블랑코스의 일원이 된 제레미는 두 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2000년 1월에 열린 FIFA 클럽월드컵에서 라하 카사블랑카를 상대로 한 조별리그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며 데뷔골을 기록했다. 두 번째 골은 2001-02 시즌 바이에른 뮌헨과의 8강전에서 기록했다. 제레미의 맹활약으로 4강에 올라간 레알은 2년 만에 빅이어를 되찾았다. 비록 붙박이 주전으로 나온건 아니었지만 당시 레알을 이끌던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은 제레미와 스티브 맥마나만을 팀을 원팀으로 뭉치게 만드는 중요한 선수라고 칭찬했다.

더 많은 기회를 받기 위해 2002-03 시즌에는 미들즈브러 FC로 1년 간 임대 이적하며 EPL에 데뷔하게 되었다. 라리가에서 단 1골도 기록하지 못했지만 미들즈브러에서 프리미어리그 33경기 7골을 득점하며 공격적인 재능도 드러냈으며 이는 공격수였던 마시모 마카로네의 9골에 이어 팀내 최다득점이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미들즈브러는 11위로 무난하게 잔류하는데 성공했다.

2.3. 첼시 FC

파일:첼시 제레미.png

성공적인 미들즈브러에서의 1년 임대생활과 함께 2003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카메룬을 준우승으로 이끄는 맹활약을 펼치자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인수된 첼시 FC는 제레미에게 관심을 보이게 되고 690만 파운드에 이적이 성사되었다. 첼시에서의 첫 시즌이었던 2003-04 시즌 주전으로 주로 4-4-2 다이아몬드 전술의 오른쪽 미드필더로 나와 프리미어리그 준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진출의 주축으로 훌륭한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라니에리가 떠나고 주제 무리뉴 감독이 부임한 2004-05 시즌 이후 무리뉴의 4-3-3 전술에 의해 클로드 마켈렐레에게 주전에서 밀리며 벤치에서 보내거나 간간히 경기에 나와도 본 포지션이 아닌 라이트백이나 라이트윙으로 출장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도 무리뉴는 그의 워크에식과 멀티 포지션 능력을 칭찬했다.

2006년 11월 웨스트햄에 프리킥 결승골을 기록한 것이 그의 마지막 첼시에서의 득점이었다. 첼시에서의 마지막 출장 경기는 2006-07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2차전 리버풀 FC와의 원정경기였는데 연장전에 교체출장하여 승부차기 키커로 나섰으나 페페 레이나의 선방에 막히고 말았다.

첼시에서 2004-05 시즌, 2005-06 시즌 리그 13경기, 15경기에 출장하며 프리미어리그 우승 메달을 모두 받았다.

2.4.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파일:ncfcgeremi.jpg

더 많은 기회를 얻기 위해 첼시를 떠나 샘 앨러다이스가 부임한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3년 계약을 맺고 이적했다. 이적하자마자 곧바로 뉴캐슬의 주장직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빅 샘이 성적 부진으로 2008년 1월에 경질되고 케빈 키건이 뉴캐슬 감독으로 12년 만에 컴백하자 주장 자리는 마이클 오언에게 넘어갔다. 뉴캐슬에서의 첫 시즌이었던 2007-08 시즌에는 1월에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출전으로 팀을 비운 것을 제외하고는 27경기(선발 24경기)에 출장하여 줄곧 주전으로 나왔고 2골 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인 2008-09 시즌 키건 감독이 사임하고 조 키니어 감독과 크리스 휴튼 감독대행, 앨런 시어러 임시 감독을 거치는 통에 11경기 출장 0골 3어시스트에 그치며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다. 뉴캐슬은 시즌 최종전에서 데미안 더프의 자책골로 17위 헐 시티에 승점 1점이 모자라 16년 만에 챔피언십 강등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챔피언십으로 강등된 2009-10 시즌에는 출장 기회가 더 줄어들었고 시즌 개막 후 5개월 간 3번의 선발출장에 그쳤다. 결국 눈앞으로 다가온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준비하기 위해 이적을 결심하게 되었고 겨울이적시장에서 터키의 MKE 앙카라구취로 이적하며 7년 반 동안의 잉글랜드 생활을 마감했다.

2.5. 커리어 말기

터키의 앙카라구취에서 반년을 보낸 뒤 2010년 8월 25일 그리스 리그의 AE 라리사 FC로 2년 계약으로 이적했다. 하지만 이듬해 1월 11일 상호 합의 하에 계약을 종료했고 은퇴했다.

3. 국가대표 경력

파일:카메룬 제레미.jpg

1996년 10월 A매치에 데뷔하여 지역 예선 6경기에 나섰으나 정작 본선 엔트리에선 탈락했다. 그러나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표로 나와 카메룬의 첫 금메달에 공을 세웠고, 2000년과 200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연속 우승하는데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2002년 FIFA 월드컵에도 선발되어 조별예선 3경기에 모두 출장했다. 월드컵 전 잉글랜드와 2-2로 비긴 친선경기에서 프리킥으로 득점하기도 했다. 2003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에서 카메룬을 준우승으로 이끌지만, 동료였던 비비앙 푀심장마비로 잃는 비극을 겪었다.

2006년 FIFA 월드컵은 지역예선에서 피에르 워메의 통한의 페널티킥 실축으로 드로그바를 앞세운 코트디부아르에 밀려 탈락하고 말았다. 200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카메룬을 결승으로 이끌었지만, 이집트에 패배하며 준우승했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엔트리에 들며 8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나서게 되었고 조별예선 3경기에 모두 출장했으나 3경기 모두 전패를 당하며 일찌감치 짐을 쌌고 이 대회를 끝으로 14년 간의 국가대표팀 옷을 벗었다.

118번의 출장 횟수를 기록했는데 이는 사무엘 에투와 함께 카메룬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출장 횟수 2위이다. 1위는 137번 출장의 리고베르 송.

4. 기타

그의 사촌 동생은 공격수 피에르 웨보였으며 카메룬 국가대표 동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