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인 北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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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동계 문집으로는 동계집이 있다. 반정이후 북인의 원로로서 낙동강 하류의 남인이나 서인으로 전향하지 않은 북인계 유림들을 이끌었다.2. 생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도와 의병을 일으켰고 이후 정인홍의 제자가 되었다. 선조 41년 유영경과 정인홍이 충돌을 했을 때 정인홍을 지지하고 유영경을 비판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전은론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정인홍의 제자이자 대북파의 일원으로 광해군 시절에 잘 나갈만 했으나 그 특유의 강직한 성품 때문인지 광해군 시절 정온은 많은 위기를 겪었다.광해군 3년, 사헌관의 정언(正言)으로 광해군의 경운궁 이어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여 광해군에게 찍혀버렸는데 이때 광해군은 경운궁 이어는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의 거의 모든 관원이 다 반대를 했으나, 정온은 이를 개인적인 상소로 올려 아주 강경하게 반대하였기에 이 일 때문에 정온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던 광해군은 이딴 인물을 대간으로 뽑았다고 분노하였다고 전해진다.
다행이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가 대간이 간언을 하는 건 당연한 것인데, 간언을 했다고 벌을 주는 것은 불가하다면서 이 일에 반기를 들었지만 광해군은 뜻을 꺽지 못하였기에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다.
스승인 정인홍이 이이첨에게 이용당하자 정인홍을 배사하게 되었고 이때문에 대북과 대립하게 된다.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영창대군이 죽자 영창대군의 죽음은 광해군의 뜻이 아니고 정항이 죽인 것이니 영창대군의 신분을 복권시키고 장례도 그에 맞게 치루어 명예를 회복해야 하며 그래야만 광해군의 진심을 온 백성이 알 수 있다는 상소를 올렸으며 폐모론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정온의 주장에 분노한 광해군은 정온을 옥에 가두고 친국까지 하려 하였으나 기자헌 정창연 이원익 심희수등 여러대신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어 위리안치에 처해진다. 이때 정온을 지지한 온건 대북인 문경호 강익문 이대기등이 중북으로 떨어져 나왔다. 정인홍의 제자이자 대북으로 태생적으로 광해군에게 충성심이 강할 인물이었으나 그 올곧은 성격 때문에 광해군에게 버림을 받게 된 것이다 제주도에 유배된 지 10년 뒤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기개와 폐모론을 반대한 공적을 인정받고 유배지에서 풀려나 관직에 다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이 정인홍에게 비록 책을 들고 가서 수업(受業)한 일은 없지만 스승과 문생의 신분이 정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계축년(1613, 광해군5) 이후로 그의 논의가 서로 어긋나 마치 다른 사람의 솜씨에서 나온 듯하였으므로 신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고서 스승과 문생 사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마는, 이는 모두 80세가 넘어 정신이 흐려진 뒤의 일입니다. 가까이는 기(沂), 결(潔), 옹(滃), 회(澮) 등의 무리가 부추겨서 재화를 불러일으켰고, 멀리는 이이첨(李爾瞻)과 한찬남(韓纘男)의 무리가 우롱하여 재앙을 매개하였으니, 늙은이가 사기를 당한 모습이 어찌 애처롭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어린아이와 늙은이는 죄가 있더라도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정인홍의 죄가 용서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극형(極刑)에다 연좌(緣坐)와 적몰(籍沒)의 형률을 시행하여 이이첨과 한찬남의 무리에게 적용했던 것처럼 똑같이 시행한다면, 비단 옛 법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성상께서 새로 왕위에 오르신 초기에 너그러운 법을 힘써 따르는 성덕에 손상이 가지 않겠습니까.
동계집 제3권 / 소(疏) - 계해년(1623, 인조1)에 올린 사직 상소
동계집 제3권 / 소(疏) - 계해년(1623, 인조1)에 올린 사직 상소
또한 유배지에서 탈출을 하려다가 실패한 폐세자 이지와 역모에 연루된 인성군을 죽이는 것에 반대하며 전은론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옳다 생각하는 것에 대해 간언을 잘하며 왕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의심할 바 없었던 인물이었다. 한 번은 백성들이 힘들어할 수 있으니 모든 도가 양전을 마치고 함께 세금을 걷게 하자는 정온의 의견을 인조가 따르기 힘들어하니, 이에 화가난 정온은 '언론의 책임을 가진 자는 그 말이 쓰여지지 않으면 떠나야한다.' 고 하며 그냥 하직 인사도 없이 사직해버렸다. 엄청나게 무례한 행위였지만 인조는 “경이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간 것은 혹 지나친 것 같다. 봄에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올라오라. ” 는 말고 함께 봄이 오기도 전에 다시 관직을 내린다.
김상헌등과 함께 매우 강경한 척화론자로서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정온은 인조에게 모든 정예병력을 압록강으로 차출하고, 인조가 개성까지 행차해 군을 독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청과 전쟁을 하더라도 전장을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로 국한해야 한다는 논리였는데 정온과 달리 주화론을 주장한 최명길도 전쟁을 꼭 해야 된다면 정온의 주장이 합당하다고 찬성하는등 대부분의 주전론자들이 입으로만 주전론을 주장한 것과 달리 정온은 제대로 된 전략을 주장했다고 평가 받는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 천둥과 같은데 외로운 성 깨뜨리니 군사들 기세 흉흉하네 늙은 신하만은 담소하며 듣고서 모사에다 견주어 조용하다고 하네 하고, 또 읊기를, 외부에는 충성을 다하는 군사가 끊겼고 조정에는 나라를 파는 간흉이 많도다 늙은 신하 무엇을 일삼으랴 허리에는 서릿발 같은 칼을 찼도다 하고, 또 의대(衣帶)에 맹서하는 글을 짓기를, 군주의 치욕 극에 달했는데 신하의 죽음 어찌 더디나 이익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려면 지금이 바로 그 때로다 대가(大駕)를 따라가 항복하는 것 나는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한 자루의 칼이 인을 이루나니죽음 보기를 고향에 돌아가듯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청나라측이 척화를 주장한 신하들을 보내라고 하자 자신을 보내달라는 상소를 올린다. 결국 항복이 확정되고 인조가 삼배구고두를 청태종에게 올리는 치욕을 받자 분노하여 시를 지은 후 스스로 자신의 배를 찔렀으나 다행히 주위에 사람이 있어 죽지는 않았다, 고향에 돌아간 정온은 단도로 거짓으로 찔러 임금을 속였다며 인조에게 자신에게 벌을 내려달라며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마지막으로 1년도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간이다.김상헌과 함께 강경파 척화론자로서 충성심을 인정받았지만 김상헌과 달리 그렇게 유명하지 않는데 아무래도 북인 계열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여담
242년 뒤 갑자년(1864, 고종1)에 각사(角寺) 탑동(塔洞) 자좌(子坐) 언덕에 이장하였다. 가묘를 열어보니 육신이 산사람처럼 온전하였으며, 어깨와 목에 핏자국이 은은하게 아직 남아있었다. 아아! 이 어찌 예사로운 일이겠는가? 진실로 예사롭지 않은 원한은 참으로 상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가야산 남쪽에 살았기 때문에 이따금 내암(來庵)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며, 동계(桐溪) 선생의 상소에 “노년에 남에게 속았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으랴.”라고 한 것을 보았으니, 곧 세상 사람들의 놀라움과 의심에 대해 의혹이 없을 수가 없다. 아울러 당당한 왕법이 그 와중에서 속임수를 당하는 일이 없지나 않았을까 걱정된다. 삼가 생각건대 동계 선생은 높은 절개를 지니고 의리에 밝은 분인데, 속임수를 당했다는 말끝에 유독 ‘애통하다’는 글자를 붙였으니, 어찌 임금에게 아뢰는 말에 속임수가 있었겠는가? 또 처자식을 연좌제로 다스리라는 명을 속히 거두라는 뜻을 아뢰어서 끝내 윤허를 얻었으니 당시 조정의 의논 또한 상상할 수 있겠다. 훗날에 동계 선생의 말만 수많은 거센 여론 속에서 유일하게 그 불가함을 밝혔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의 평소 학문을 깊이 이해하게 되면, 반드시 도덕과 의리가 이치를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결론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극형의 과당함을 고의로 범한 것이 다른 사람의 수단에서 나온 것이니 곧 오리 재상이 이른바 청풍 준절이 흉악한 무리에게 속은 것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또한 그 허물이 자신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바로 동계 선생께서 애통하다고 하신 뜻과 부합한다.
- 내암집의 부록 징원록(徵冤錄)에서는 정인홍의 무고를 주장할때 정온의 의견을 근거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