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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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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정신영의 독일 유학에 앞서. 왼쪽부터 김영주, 정상영, 정주영, 정신영, 정인영, 정순영.
이름 정신영 (鄭信永)
출생 1931년
사망 1962년 4월 14일 (향년 31세)
직업 동아일보 기자
부모 아버지 정봉식 (1884 ~ 1946)
어머니 한성실 (1886 ~ 1953)
형제 정주영, 정인영, 정순영, 정세영
누나 정희영
남동생 정상영
배우자 장정자 (1935년생)
자녀 장녀 정일경, 장남 정몽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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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계도4. 여담

1. 개요

정봉식과 한성실의 5남으로, 범현대가 정주영 초대 회장의 넷째 동생으로, 동아일보 기자. 범현대가임에도 형들과 남동생과 달리 기업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기자로 근무하였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오래 살았으면 나중에 범현대가 소속 기업에서 한자리는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2. 생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를 졸업하고 1956년 3월 동아일보 국회 출입기자로 일했다. 기자 생활 당시 주목할만한 일로는 한국전쟁 당시 다들 피난 가는데 혼자 동아일보 사옥에 남아 '서울의 외국기관이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을 1950년 6월 27일 호외로 발행한 저력을 보여주었다. 물론 발행 뒤 피난했다.[1]

정주영의 권유로 1957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1958년 한국일보 독일 통신원이 되어 벨기에 브뤼셀 만국박람회 관람기와 아일랜드 기행문을 쓰며 대학생과 기자 생활을 병행한다. 1961년 7월에는 동아일보 유럽 통신원으로 복직해 외국생활기와 각종 해외소식을 연재한다. 1961년 8월 25일 61 베를린 위기를 취재해 동/서베를린으로의 분열을 생생히 전해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1962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함부르크 대학병원에서 수술 받았으나 결국 사고로 인한 장폐색으로 사망했다. 같은 해 10월에 논문 <저축과 경제발전의 상관관계’>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로 되어 있어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2]

언론인 단체인 관훈클럽에는 언론인들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관훈클럽정신영기금'이라는 기금이 있는데 여기의 '신영'이 바로 정신영 기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3] 이는 정신영이 1957년 관훈클럽 30번째 회원으로 위촉이 된 인연과 이후 정신영이 기자 생활을 하던 중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에 이를 매우 안타까워 했던 정주영이 1977년 1억을 후원해 기금이 만들어졌다.

정신영 사망 당시 정주영 회장이 열흘이나 출근도 못하고 울었다고 한다.[4] 이후 자서전에 "좋아 한다는것도, 기대가 크다는 것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도, 동생에게 단 한번도 말하고 표현하지 못한 게 평생 후회된다"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자신과 달리 서울대 나와 기자까지 되었던 그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그 유학은 자기가 가라고 떠밀어서 간 거라...

3. 가계도

전체 가계도의 경우 범현대가 참조.
  • 정신영鄭信永 (1931 ~ 1962.04.14) 동아일보 기자 = 장정자, 서울대 출신 첼리스트 (1935 ~ )
    • 1녀 정일경 (1960 ~ ) = 임광수,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블룸버그 대학 회계학과 교수 (1959 ~ )
    • 1남 정몽혁, 현대코퍼레이션(구(旧) 현대종합상사) 회장 (1961 ~ ) = 이문희, 현대SNS 대표
      • 1녀 정현이 (1988 ~ )
      • 1남 정두선 (1989 ~ )
      • 2남 정우선 (1997 ~ )

자녀가 1남 1녀 뿐이어서 정주영의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자녀가 적다[5]. 둘째이자 장남 정몽혁이 갓 태어났을 때 요절했기 때문이다.

4. 여담

교통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에 범현대가 1세대 중 가장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범현대가 전체로 보자면 범현대가 중 2번째로 요절했다.[6]

정주영이 정신영의 자녀들 몫으로 현대코퍼레이션을 떼어주었으므로 정신영이 오래 살았으면 그도 현대코퍼레이션 회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 해당 내용은 둘째 정인영에 대한 내용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참고[2] 이후 정신영의 논문은 그의 스승이었던 보이트 박사에 의해 완성되어 박사학위가 수여되었고 이는 1982년 9월 21일 정신영의 아들 정몽혁에게 전달되었다. 사후 20년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이다.[3] 201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 이전에는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이었다.[4] 변중석 여사도 훗날 시동생들과 같이 살던 시절을 회고하며 착하고 머리 좋던 시동생 정신영이 기자가 됐다고 그렇게 좋아했는데 허망하게 떠났다고 울기도 했다.[5] 큰형 정주영은 8남 3녀(그중 본처 변중석 소생은 4남 1녀 뿐이다.), 둘째형 정인영은 2남 1녀, 셋째형 정순영은 4남 2녀, 넷째형 정세영은 1남 2녀, 남동생 정상영은 아들만 3남을 두었다. 그나마 누나 정희영은 본인과 같은 2남을 두었다.[6] 가장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물은 셋째형 정순영의 손녀이자 조카 정몽선의 차녀 정지은(11세). 사고사와 자살로 사망한 정몽필과 정몽우, 정몽헌조차도 정신영보다는 오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