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97680><colcolor=#fff> 정경진 丁庚鎭 | |
출생 | 1930년 7월 8일 |
사망 | 2020년 11월 21일 (향년 90세) |
본관 | 나주 정씨[1] |
학력 | 고등학교 입학 자격 검정고시 (합격) 숭문고등학교 (중퇴 / 1회)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중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 53 / 학사) |
소속 | 종로학원 |
종교 | 천주교 (세례명: 니콜라)[2] |
가족 | 장남 정태영, 차남 정해승[3] 장녀 정해숙[4], 차녀 정은미[5] 남동생 정광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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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조 스타 강사 및 종로학원 설립자 및 전 원장 및 회장.2. 생애
1930년 7월 8일 아버지 정규성(丁奎成, 1904. 4. 5 ~ 1980. 12. 15)과 어머니 파평 윤씨(1904. 9. 17 ~ 1984. 9. 19)[6] 사이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어릴적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고등학교 입학 자격 검정고시로 마치고 숭문고등학교(1회)[7]에 입학했으나, 이 또한 중퇴하고 고등학교까지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로 마쳤다. 이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입학했다가 학비가 없어 중퇴했고, 1953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53학번)에 입학해 1957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 1950년대 후반 경기고등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잠시 재직하였다.[8] 이후 그만두고 1960년대 초반까지 양대 대입 단과학원이었던 EMI학원과 제일학원에서 당대 1타 수학 강사로서 명성을 날렸다.
2.1. 종로학원 설립
1965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에 종로학원을 열었다. 종로학원은 정경진을 비롯해 당시 최고의 명문고였던 경기고등학교 교사 출신들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홍성대도 종로학원으로 스카우트한 당사자가 바로 정경진 본인이다. 최상위권 대학일수록 재수생 비중이 높다는 점에 착안하여 설립 당시부터 경기고 출신 재수생 등 최상위권 재수생을 타겟으로 했다.학원 설립 초기부터 용문장학회를 세워 소년소녀가장 등 형편이 어려운 수천명의 학생들에게 생활비를 포함한 장학금을 지원했다.
원장 시절에도 한동안 수학강의를 하다가 물러났으며 한창 학원이 잘 나갈 때 학생들 체벌, 정신교육 등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2.2. 위기
1995년 법인세 탈루 및 원정도박혐의로 구속기소됐으나 2001년 대법원 상고심에서 원심파기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학원은 과학고 재학생 자퇴사건 등에서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강남대성학원에게 뒤쳐지기 시작했다.2.3. 이후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하며 장남 정태영에게 종로학원을 물려주었다. 당시 정태영은 학원 사업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차남 정해승이 자력으로 이루넷[9]을 만들어 발전시켜 정해승이 차기 종로학원 회장이 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정태영이 물려받고 자신은 종로학원 고문으로 남았다.본인이 그래도 종로학원의 상징인지 하늘교육에서 종로학원을 인수할 때 본인에게 자문을 많이 구했다고 한다.
2020년 11월 21일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3. 여담
- 수학 강사로 명성을 얻어 전국의 교사들에게까지 강의기법을 전수했다는 일화도 있다.
- 자신도 저서 <수학Ⅰ의 완성>을 펴냈으나 1966년 같은 학원의 강사였던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을 출간해 베스트셀러로 키웠다.
- 입시제도에 대해 시험문제는 정부에서 내고 채점은 대학에서 자율적으로 하게 하는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가졌다. #
- 정광진 변호사의 형인 만큼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으로 사망한 정광진 변호사의 세 딸들은 그의 조카들이었다. 살아생전 조카들을 셋이나 먼저 보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