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e0e0e0> 초대 노르망디 전투비행대대장 장 튤란 Jean Tulasn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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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장 루이 마리 세실 조제프 튤란 Jean Louis Marie Cécile Joseph Tulasne |
출생 | 1912년 11월 27일 |
프랑스 낭시 | |
실종 | 1943년 7월 17일 |
오룔 상공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최종 계급 | 소령 |
가족 | 프랑수아 튤란 (아버지) |
학력 | 프리나테 군사학교 생시르 사관학교 베르사유 비행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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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유 프랑스 공군 소속 노르망디-니에멘의 초대 지휘관. 조종 실력이 탁월했으며 곡예 비행 에이스로 유명했다.2. 생애
2.1. 유년과 프랑스 공군
1912년 11월 27일 프랑스 낭시에서 태어났다. 4남매 중 장남으로, 아래에 여동생 둘과 남동생 하나가 있었다.아버지 프랑수아 튤란 역시 군인으로, 기병장교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조종사로 싸웠고 전후에도 계속해서 비행기를 몰다 1929년에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 전부터 장교가 되기 위해 군사학교에 다녔던 튤란이 조종사의 길을 선택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프리나테 군사학교를 졸업한 튤란은 1931년에 생시르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1933년부터 2년 동안 베르사유 비행학교에서 교육받으며 1934년 7월 7일에 군 조종 면허(면허번호 24430번)을 획득한다.
1935년 7월 6일에 투르에서 마리루이즈 바셰즈(1913-1975)와 결혼했으며 1남1녀를 두었다.
1935년 10월 1일에 중위로 진급하며 아보르 제15폭격비행단에 배속되었으나, 전투기를 타고 싶다며 전출을 신청해 1937년 4월에 디종의 전투비행단으로 전출되었다. 1938년 10월부터는 살롱드프로방스 비행학교에서 비행교관을 맡았고, 1939년 5월에 튀니지 엘 아우이나에 주둔한 제574전투비행대대로 보내지며 대위로 진급했다. 해당 대대는 같은 해 9월 알제리 오랑으로 보내져 II/9 전투비행대대와 통합되었다. 튤란은 잠시 4편대장을 지내다 I/7 '프로방스' 전투비행대대로 보내져 2편대장이 되었다.[1]
1940년 1월 초에는 잠시 프랑스 본토에 배치되었다가 3주만에 레바논-시리아 국경의 라야크 비행장으로 보내졌다. 튤란의 주 업무는 활주로 감독과 조종사 훈련 감독과 해안 정찰이었다. 1940년 5월에는 부대가 베카 비행장으로 보내졌는데, 그때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다. 전황이 너무나도 빠르게 악화된 나머지 튤란은 본토로 재배치 명령을 받을 새도 없이 파리 함락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날부터 매일 베이루트에 있는 사령부로 가서 대대를 이집트로 보내달라고 몇 번이고 요청한 끝에 이집트에서 영국 공군과 싸우라는 명령서를 받아 냈다. 6월 23일에 대원 세 명에게 출발 허가서가 내려왔고, 튤란은 부하인 페론 중위와 부사관 둘을 먼저 보내며 곧장 뒤따라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26일부터는 이동 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이미 이집트로 출발한 조종사들에게 돌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페론 중위는 항명하고 도망쳐 버렸다. 튤란 본인도 대대를 통째로 이끌고 도망치려고 했으나 기지 사령관이 다음날 아침까지 전투기 연료 탱크를 전부 비워버리고 병사들이 비행장을 통제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떠날 수 없었다. 게다가 탈출한 조종사들에 대한 책임 역시 튤란이 지게 되어 한동안 비행 자체를 금지당했다. 이후 감시하에서만 비행한다는 조건으로 금지가 풀렸다.
2.2. 영국 공군
비시 프랑스에서 도망칠 생각뿐이었던 튤란은 1940년 12월 5일에 모란-솔니에 406를 조종하다가 구름 사이로 비행할 때 감시역으로 붙어 있던 부하 아마르제 준위에게 엔진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대로 수직강하하고, 바다에 처박기 직전에 다시 수평으로 날기 시작해 이스라엘 로드에 무사히 착륙했다. 그리고 영국군 해안 정찰대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고 그곳에 주둔해 있던 자유프랑스 제2비행대원들과 합류했다.비시에서는 튤란이 죽은 줄 알고 그를 기리며 엄숙하게 예배를 보고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는 해상 상공에 화환을 던저 예를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하들은 물론이고 튤란을 잘 아는 상관들도 그가 도망쳤으리라고 확신했다. 실종 당일, 집무실에 항상 두었던 아버지의 총도 튤란과 함께 사라졌고, 평소에도 자신이 사라진다면 애도는 좀 하되 너무 많이 슬퍼하진 말라고 말하곤 했으니 말이다. 물론 프랑스 본토에 있던 가족은 해상에서 실종됐다는 통보를 받고 죽은 줄로만 알았으나 12월 30일에 프랑스에 있던 여동생에게 살아 있다는 전보를 보내며 생존했음을 확인했다. 이후 비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잔 틸로(Jeanne Thuilot)'라는 가명으로 가족에게 간간이 편지를 보냈다. 가족이 위험해지길 원하지 않아서 조용히 활동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1941년 10월 13일에 프랑스 국적을 박탈당했다.
12월 7일에 바로 영국 공군에 입대한 튤란은 12월 20일부터 이스마일리아에서 2주 동안 훈련받았다. 1941년 1월 9일에 나온 훈련 결과에서는 특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41년 1월에 제274비행대대로 편입되어 토브룩 전투에 참전했다. 1941년 2월에는 소령으로 진급했고 팔레스타인에서 제2비행대와 함께 정유소 방공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1941년 4월 12일, 샤를 드골이 튤란을 중동 자유프랑스 공군 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해 카이로로 전출시켰다. 독일군과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던 튤란은 보직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시키는 대로 후방으로 가서 영국 공군에서 복무 중인 프랑스 조종사들과 연락하고 자유 프랑스군 비행대대의 조직 업무를 담당했다.
2.3. 알자스 전투비행대대
1941년 8월 27일에 드골의 승인을 받은 알자스 전투비행대대가 1941년 9월 15일에 편성되면서 지휘관으로 복귀했다. 이때가 튤란과 알베르 리톨프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1942년 1월에 이집트로 가서 4월부터 가잘라 전투에 참전했다. 이때 영국 제8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튤란이 조종하던 전투기는 허리케인 Mk.1이었다. 그러나 영국군이 밀리자 알자스 대대도 철수했고, 한동안 알렉산드리아와 수에즈 운하 방어 임무를 맡았다.2.4. 노르망디 전투비행대대
영국 공군을 마음에 안 들어하던 튤란에게 노르망디 전투비행대대가 편성된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상관 조제프 풀리캉 소령[2]의 가고 싶냐는 물음에 튤란은 득달같이 '영국인들 싫었는데 잘 됐다'면서 리톨프와 함께 가겠다고 지원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르망디 대대는 1942년 11월 12일까지 레바논 라야크 비행장에 집결한 다음 이라크와 이란을 거쳐 1942년 12월 28일에 러시아 이바노보에 도착했다.노르망디 대대는 튤란의 감독하에서 12월 2일부터 3월 14일까지 4개월 동안 모스크바 교외 이바노보 비행장에서 야크를 타는 훈련을 하고, 1943년 3월 20일에 프랑스의 높으신 분들께 점검을 받은 후 전선 투입에 적절하다는 평가를 받고 실전에 투입되었다. 처음에는 제261연대와 함께 실전에 투입되었으나, 이후 제18근위연대와 함께 싸우게 되었다.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 참전한 노르망디 대대를 이끌었다. 1943년 7월 16일에 교전 중 절친한 친구 알베르 리톨프가 알자스 대대 시절부터 함께한 노엘 카스텔랭과 함께 실종되어 돌아오지 않자 복수심에 불타올라 다음날 무리하게 출격한다. 결국 7월 17일 오후 5시, IL-2 호위 임무로 출격했다 위에 FW190 30여 대가 있다는 무전을 듣고 교전을 위해 상승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실종되었다. 튤란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은 사관학교와 비행학교 동기이자 그의 뒤를 이어 2대 노르망디 대대장이 된 피에르 푸야드였다.
최종 격추 기록은 4기, 최종 비행 시간은 약 2천 시간.
2.5. 이후
1963년 오룔에서 튤란으로 추정되는 조종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튤란의 아들과 담당 정비사는 지휘관이 맞다고 주장했지만, 프랑스 당국에서는 증거가 불충분하는 결론을 내렸고 결국 '신원 미상의 프랑스 조종사'라는 묘비 아래 모스크바 베덴스코예 묘지에 묻혔다. 현재는 해당 조종사가 튤란이 아니라는 쪽에 무게가 더 실린다.1964년에 투르 비행기지에 튤란의 이름이 붙었으며, 1969년에는 프리나테 군사학교 신축 기숙사에 튤란의 이름이 붙었다.
3. 여담
- 41년 1월 17일에 새 부대에서 첫 정찰 임무를 받았는데 굉장한 일을 벌였다. 토브룩에서 날아오는 이탈리아군의 사보이아-마르케티 81 병원수송기를 마주쳤는데, 쏘지는 못했지만 가까이 다가갔더니 수송기가 갑자기 얌전히 영국군 쪽 해안에 착륙한 것이다. 탐승객들은 도망가려고 했으나 바로 포로로 잡혔고, 환자가 아니라 포위당한 토브룩에서 도망치려던 이탈리아군 장성 여섯 명이었음이 밝혀졌다. 게다가 토브룩 주둔군에 보내진 편지도 전부 싣고 있었기에 그것을 기반으로 토브룩 내부 병력 정보를 전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전과였기에, 이후 튤란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이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 노르망디 대원들은 튤란을 튜튜(Tutu)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 노르망디의 2대 지휘관 피에르 푸야드, 3대 지휘관 루이 델피노와 사관학교 및 비행학교 동기 출신이다.
- 1960년 프랑스와 소련 합작으로 제작된 영화 노르망디-니에멘에 노르망디 지휘관으로 등장하는 마르셀랭 소령의 모티프이다.
4. 수훈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프랑스 해방 훈장 (1943년 10월 11일 수훈)
- 십자훈장 39/45 (4회 종려상)
- 식민지 훈장 (리비아)
- 레반트 훈장
- 대조국전쟁 1급 훈장 (1943년 7월 2일 수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