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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리톨프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e0e0e0> 알베르 리톨프
Albert Littolff
파일:리톨프(프사).jpg
본명 알베르 앙리 리톨프
Albert Henri Littolff
출생 1911년 10월 23일[1]
프랑스 보주 코르니몽
사망 1943년 7월 16일
오룔 상공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최종 계급 대위
가족 이방 리톨프[2] (동생)
학력 코르니몽 초등학교
마첸하임 중학교
에피날 고등학교
앙리오 비행학교

1. 개요2. 생애
2.1. 유년과 프랑스 공군2.2. 영국 공군2.3. 알자스 전투비행대대2.4. 노르망디 전투비행대대2.5. 이후
3. 여담4.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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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유 프랑스 공군 소속 노르망디-니에멘의 초대 부지휘관. 조종 실력이 탁월했으며 곡예 비행으로 전간기부터 유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최종 14기 격추를 기록한 에이스.

2. 생애

2.1. 유년과 프랑스 공군

1911년 10월 23일 프랑스 보주 코르니몽에서 태어났다. 8남매 중 둘째였다. 아버지가 방직업계에서 일했으나, 어릴 적에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학업을 일찍이 그만두고 일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조종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어 장학금을 받고 샬롱 쉬르손 소재의 앙리오 비행학교에 진학 후 1934년에 조종 면허를 취득했다.

1931년 12월에 상병 계급으로 군에 입대했다. 이스트르 소재의 부사관 학교에 다녔고, 1932년 7월에 디종의 제32비행연대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1932년 11월에 병장으로, 1933년 2월에 하사로 진급했다.

탁월한 조종 실력 덕분에 상관들에게 주목받았고, 에탕프 곡예비행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기회도 생겼다. 르네 와이제[3]의 곡예비행단에 스카우트되어 1930년대에 수차례의 에어쇼에 프랑스 대표로 참여했다. 1936년 1월부터는 디종의 I/7 전투비행대대에 배치되었다. 뛰어난 조종 실력 덕분에 금방 진급해서 1939년 1월에는 상사까지 올라갔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공화군과 싸우기 위해 제대할 생각도 했지만 결국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1939년 2월에는 부대와 함께 튀니지에 배치되었으며 I/7 전투비행대대와 훈련을 했다.[4] 하지만 본인은 북아프리카보다는 프랑스 본토에 머무르는 편을 선호했다.

1939년 10월 16일에는 디종에서 새로 창설된 III/7 전투비행대대로 재배치되었다.[5] 이 부대는 5월부터 I/7 전투비행대대 조종사들을 일부 흡수했는데 프랑스의 선전포고와 '가짜 전쟁' 시작 후부터는 전부 넘어갔다. 이곳에서 5편대에 배치되었고, 프랑스 전역 때까지 모란-솔니에 406을 조종했다.

1940년 5월 12일에 첫 적기를 격추했고, 프랑스 전역이 끝날 때까지 총 74회 출격하며 공식 6기, 비공식 1기를 격추했다.

2.2. 영국 공군

III/7 전투비행대대는 장비를 드부아틴 520으로 교체하기 위해 6월 22일에 툴루즈 소재 비행기지로 재배치되었다. 6월 25일 정전 협정이 실질적으로 효력을 발휘하자, 리톨프는 그날 아침에 동료 푀이라 소위, 물레네 중사와 함께 각자의 드부아틴을 끌고 도망쳤다. 세 사람은 두 시간 후 사우스햄튼 인근 보스콤스 해안에 착륙해 다음날 자유 프랑스 공군에 입대했다.

1940년 7월에 세인트아탄에서 RAF 주관의, 망명 온 프랑스 조종사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이 열렸기 때문에 리톨프도 여기 참가했다. 여기서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도망친 노엘 카스텔랭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카스텔랭은 비행학교에 다니다 프랑스에서 도망쳐 왔기에 경험이 거의 없었으나 영국 공군에서 받아 주지 않을 것을 염려해 경력을 부풀려 말해 둔 상태였다. 같은 편대에 배치된 리톨프는 그를 후배 삼고 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며 어엿한 조종사로 키워 냈다. 카스텔랭은 1943년까지 리톨프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윙맨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1940년 8월 11일에는 소위로 진급했다. 새로 창설된 제1전투비행대대에 공식적으로 배치되었고 1940년 9월에 다카르 해전에 참전했다. 10월부터는 한동안 가봉 두알라에 배치되었다가 1940년 11월 12일에 가봉 비시 정권이 항복하자 얼마 후 이집트로 돌아왔다.

1941년 5월 5일에 이스마일리아에서 만들어진 제1전투비행대대에 배치되었다. 얼마 후 창설되어 후대까지 이름을 날릴 '알자스' 비행연대의 전신이었다. 여기서 리톨프는 장 튤란을 처음으로 만났고, 영국 공군 제73비행대대와 함께 토브룩 전투에 참전했다.

2.3. 알자스 전투비행대대

1941년 8월 27일에 알자스 전투비행연대가 만들어지자 리톨프는 중위로 진급 후 2대대 '뮐루즈'의 대대장으로서 튤란 휘하에서 복무했다.[6]

1942년 3월 15일에 대위로 진급했다.

2.4. 노르망디 전투비행대대

튤란과 마찬가지로 영국군과 오래 함께 싸웠지만 영국인들을 탐탁찮아 했던 리톨프는 1942년에 러시아로 보내질 노르망디 전투비행대대가 창설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튤란과 함께 곧장 가겠다고 선언했다. 영국에서 건너 온 조종사들과 레바논의 라야크 비행기지에 집결한 후 테헤란을 경유해 러시아 이바노보로 향했다.

11월 29일에 이바노보에 도착해서는 부지휘관 역할을 하며 튤란과 함께 노르망디 대원들을 훈련시켰다. 영국 공군의 전투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RAF에서 싸우다 온 푸아프나 알베르 같은 대원들에게 그간 배운 건 전부 잊고 프랑스식으로 다시 배우라고 지시했다.

1943년 6월에 피에르 푸야드가 러시아에 도착하자 부지휘관 역할을 내려놓고 2편대장이 되었다.

1943년 7월, 노르망디 대원들과 함께 쿠르스크 전투에 참전했다. 7월 16일 저녁, 출격 후 교전을 벌이다 윙맨 노엘 카스텔랭과 함께 크라스니코보 상공에서 사라졌다. 절친한 친구가 돌아오지 못하자 튤란은 다음날 무리해서 수차례 출격하다 끝내 그의 뒤를 따랐다.

최종적으로 2046시간 비행했고 218번 출격했으며 공식 14기, 비공식 4기를 격추했다.
  • 1940년 5월 12일 - Ju88 1기
  • 1940년 5월 14일- Hs126 4기
  • 1940년 6월 20일 - Hs126 1기
  • 1941년 4월 22일 - Bf109 1기
  • 1941년 4월 23일 - Ju87 1기 및 Bf 190 1기
  • 1941년 5월 31일 - Ju 88 1기
  • 1943년 5월 3일 - Hs126 1기
  • 1943년 6월 15일 - Fw189 1기
  • 1943년 7월 13일 - Bf110 1기
  • 1943년 7월 16일 - Bf110 1기

2.5. 이후

1960년 오룔에서 약 50km 떨어진 지점에서 리톨프의 전투기가 발견되었다. 전투기와 함께 발견된 유해는 1960년 9월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리톨프가 돌아오던 날, 노르망디 대원들이 르부르제 공항에 모여 그를 맞이했다. 유해는 유족의 뜻에 따라 마르세유의 생피에르 군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86년 4월 10일에 콩트렉세비유 소재의 902호 비행기지에 리톨프의 이름이 붙었다. 해당 기지는 1999년부로 폐쇄되었다.

3. 여담

  • 마르셀 알베르는 리톨프에게 라탕페트(La Tempête)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이름과 어감이 비슷하고, '폭풍'이라는 의미가 리톨프의 성격과 유사하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토토(Toto)라는 별명도 있었다.
  • 라야크 비행기지에서 튤란과 리톨프를 처음 만난 노르망디 대원들의 첫인상은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튤란이 쌀쌀맞게 대원들에게 어쩌다 입대했냐, 어쩌다 비행을 시작했냐, 같은 물음을 던지며 심문하는 동안 리톨프는 뒤에 서서 아무 말 없이 대원들의 답변을 메모하기만 했으니 말이다. 물론 둘이 드부아틴을 끌고 곡예비행하는 모습을 본 대원들은 두 사람이 아주 뛰어난 조종사라는 사실을 빠르게 납득하고 지휘관과 부지휘관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얼마 후 북아프리카에 연합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인간미 없던 두 사람이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대원들은 저 인간들도 감정 표현을 할 줄 안다는 생각을 했다.
  • 여자가 보이기만 하면 춤이든 데이트든 신청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노르망디 대원들과 달리 여자에 관심이 없었으며, 포커를 치지도 않고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나 금욕적인 생활을 고집하던 그도 러시아에서 맞이하는 첫 크리스마스에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술을 마시다 완전히 취해버렸다. 군의관 레비딘스키는 취한 리톨프를 업고 방으로 옮겨 놓아야 했다.
  •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군 에이스 조종사 조르주 기느메르의 '모든 것을 내놓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를 좌우명으로 삼고 말버릇처럼 대원들에게 말하곤 했다. 마찬가지로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에이스였던 롤랑 가로스의 좌우명 '승리는 가장 끈기 있는 자의 것이다'라는 말도 좋아해서 러시아에서 지내는 막사 벽에 써 붙여 두었다.
  •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방에서 혼자 책을 읽거나 이상적인 전투기 도면을 그리는 것이었다. 또는 후임 카스텔랭에게 잔소리를 했다. 각종 비행기 모델을 연구하는 것도 좋아했다. 전후에 테스트 파일럿이 되고 싶어 했다.
  • 그림을 아주 잘 그렸다. 북아프리카에서 싸우던 시절에는 부대 비행일지 한쪽 면에 대원들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각종 일러스트를 그렸다. 모래 바람에 날아가는 텐트를 붙잡고 낑낑거리는 모습이라든가... 러시아에서는 작전 구역의 지도를 대원들에게 그려 보이며 지형지물을 모조리 외울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4. 수훈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프랑스 해방 훈장 (1941년 6월 23일 자)
  • 군사 훈장
  • 십자훈장 39/45
  • 식민지 훈장 (리비아)
  • 대조국전쟁 1급 훈장 (1943년 7월 2일 수훈)

[1] 10월 31일생이라고 나와 있는 웹사이트가 많으나, 조종 면허와 입대 기록 등의 서류에는 모두 10월 23일로 기록되어 있다.[2] 1915년생. 테스트 파일럿으로 활약했다.[3] 제1차 세계대전 때 활약한 프랑스 조종사.[4] 리톨프와 자유 프랑스군 소속으로 만나 죽을 때까지 함께하게 될 장 튤란은 몇 달 후인 11월에 이 부대로 재배치받아 1940년 12월에 비시 프랑스를 탈출하기 전까지 2편대장을 맡았다.[5] 해당 부대에서 리톨프와 함께 복무한 조종사 중 장 베르트랑, 이브 모리에, 르네 샬은 훗날 노르망디-니에멘에 합류한다. 물론 리톨프 사후에 합류했기에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6] 1941년 9월 24일에 자유 프랑스 공군 사령부에서 각 공군 연대에 프랑스 레지옹의 이름을 부여하고 휘하 대대에는 해당 레지옹의 도시 이름을 붙이며 레지옹의 문장을 부대 휘장으로 채택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알자스 연대는 제임스 드니 중위의 제1대대 '스트라스부르'와 알베르 리톨프 중위의 제2대대 '뮐루즈'로 편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