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8 18:33:19

이브라힘(꿈의 물방울, 황금의 새장)

파일:꿈의 물방울, 황금의 새장.이브라힘.jpg 파일:꿈의 물방울,황금의 새장.이브라힘.jpg
1. 개요2. 작중 행적
2.1. 과거2.2. 휘렘과의 만남2.3. 대재상 취임2.4. 휘렘과의 대립
3. 기타

1. 개요

꿈의 물방울, 황금의 새장의 등장인물. 실존 인물로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 되었던 이브라힘 파샤이다. 쉴레이만의 시동장이자 응장감.[1]

순정만화의 남자들이 다 그렇듯이 매우 잘생긴 청년이다. 거기다가 수염도 없다[2] 밤하늘보다 더 어두운 흑발이 가장 돋보이는 외모적 특징. 휴렘도 이 흑발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2. 작중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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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과거

어린 시절, 휴렘처럼 노예로 오스만 제국에 끌려왔지만 16살때 쉴레이만을 처음 만난 후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사랑의 감정을 품고 쉴레이만의 충신이 된다. 오로지 능력만으로 수백명에 달하는 시동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톱카프 궁전 엔데룬[3]의 실력자가 되었다. 쉴레이만의 총애를 받고 있으나 대재상 피리 메흐메트 파샤를 비롯한 제국의 고위 신료들에게서 견제와 질시의 눈초리를 받고 있다[4].

2.2. 휘렘과의 만남

노예상에게서 도망치고 있던 알렉산드라(휴렘)을 도와준것이 첫번째 만남. 마테우스라는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알렉산드라에게 오스만 제국에서는 여자라 할 지라도 능력을 인정받으면 고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조언을 빙자한 바람을 넣은을 한 장본인. 이후 노예로 팔려나갈 처지로 전락한 알렉산드라를 자신이 직접 사서 여러가지 교육을 시켜 지적인 여성으로 만들어 준다. 알렉산드라는 흑발 미청년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고 모든 교육 과정이 이브라힘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알렉산드라는 쉴레이만의 생일 선물로 바쳐질 헌상품. 절망하는 알렉산드라에게 휴렘이라는 이름과 문이 없는 황금 새장을 주면서[5] 어디에 있든 자유로운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처럼 성공을 하여 자유로운 여인이 되라고 말한다. 하렘의 암투 속에서 힘들어하는 휴렘에게 반드시 살아남으라고 조언한다.

헌데 휴렘을 헌상한 후에 휴렘에게 연모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휴렘을 위해서 파격적으로 하렘에서 독실을 쓸 수 있도록 힘을 써주고 수행 궁녀로 배정된 나이마와 쟈미라뿐 아니라 흑인 환관이 관할하는 하렘[6]에서 백인 소년 환관인 샤피크를 남겨두어 휴렘을 돕게 한다.[7] 휴렘이 위기에 처할때마다 도움을 주면서 휴렘에 대한 애정은 더욱 깊어진다. 휴렘이 자신에게 품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된 후부터 사랑이 싹트기 히작한다. 자신의 감정에 계속 혼란스러워 하다가 베오그라드 공성전때 휴렘에게서 흠모의 감정이 듬뿍 담긴 시가 적힌 편지를 받게 되면서 감정은 더욱 격해진다. 그때까지는 쉴레이만을 모실 생각만 하던 충복이었을 뿐이었지만 편지를 받고 난 이후 자신의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귈바하르의 음모로 익사할 위기에 처한 휴렘을 구해 자신의 집에 데려온 이후 휴렘과 동침을 한다. 대역죄[8] 자신의 주인인 쉴레이만을 배신한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고 입을 막기 위해 휴렘과 동침하던 방문을 지키고 있던 백인환관들을 죽이며 괴로워 한다. 그래서 5권에서 휴렘이 회임한 아이는 쉴레이만의 아이인지 이브라힘의 아이인지 휴렘 본인도 모르고 이브라힘도 혼란스러워 한다.(...)

2.3. 대재상 취임

궁중 고위 관료들에게 견제의 대상이 되다 보니 반역 혐의를 뒤집어 쓴채 추궁 당하기도 하는등 궁중 생활이 순탄치 못하다.[9] 대저택을 하사받았으나 쉴레이만을 보조하는 격무를 수행하면서 집에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한다. 고위 관료들에에게 시동장 주제에 자신들을 우롱하려 한다는 소리를 듣지만 개인적인 능력과 안목은 정말 출중하다[10]. 쉴레이만의 유럽 원정에 대소신료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이브라힘은 쉴레이만의 계획에 찬성하며 유럽 원정 준비를 돕는데 이 때문에 예니체리들과 척을 지어 암살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11]

그러나 이브라힘은 이 암살자들을 혼자서 상대하여 역으로 다 죽여버리는등 뛰어난 무예실력을 보여준다. 유럽 원정의 첫번째 관문인 베오그라드성이 가톨릭 교도인 헝가리인들과 정교회 신자들인 세르비아인들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이브라힘이 세르비아인들을 매수한 덕분에 베오그라드를 합락시킬 수 있었으며 베오그라드 공성전 당시 포의 사정거리가 짧아 성벽에 포탄이 닿지 않자 성벽과 가까운 곳에 포대를 만들어 포격을 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이브라힘의 제안은 아흐메트 파샤에게 깡그리 무시될 뻔하지만 마침 예니체리 공병대장이 이브라힘의 의견에 찬성하며 포대를 만들었고 포격은 성공적으로 끝난다.[12]

이 때 아흐메트 파샤에게서 공을 함께 나누자는 제안을 받지만, 이브라힘은 쉴레이만에게 공병대장을 천거하며 공을 돌린다. 공병대장의 이름은 시난.[13] 이브라힘의 겸손함과 사람 보는 안목이 보인다. 그리고 사냥 도 잘 다룬다. 국제적인 교우관계도 맺어뒀는데 이브라힘과 친한 베네치아 공화국출신의 알비제 그리티라는 청년이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 몰래 오스만에 대포를 팔고 있다[14].

6권에서는 전공을 세운 이브라힘이 쉴레이만에게 휴렘을 자신의 아내로 줄것을 간청하지만 쉴레이만의 대답은 "너를 대재상에 임명하겠다." 그리고 대재상의 격에 맞게 자신의 여동생 하티제과 결혼할 것을 이브라힘에게 권한다. 이브라힘은 하티제가 알비제와 사귀는 걸 알고 있었고, 휘렘을 하사받을 생각이었으나, 알비제가 하티제와 함께 야반도주하다가 걸려서 추방당하자 쉴레이만의 명에 따라 하티제와 결혼하게 된다.

로도스 공성전 때는 첩자로 잠입해서 구호 기사단의 기밀과 성 내부의 불안한 민심을 관찰한 뒤, 쉴레이만에게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지만 사양했다. 그래도 공로를 인정받은 이브라힘은 로도스 정벌에 성공한 기념으로 쉴레이만에게 대재상으로 임명받고 아흐메트의 난을 진압한다[15].

2.4. 휘렘과의 대립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이브라힘은 차츰 휘렘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5권 때 동침한 뒤에 생긴 메메드 황자가 자기 아들일 거라 의심했기 때문이다.[16] 만약 이 사실이 들키면 셋 다 죽은 목숨임은 이브라힘과 휘렘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서로 생각한 대책이 달랐다. 휘렘은 이브라힘이 메메드의 후견인이 되길 바랬으나, 이브라힘은 메메드를 무시했고 이 문제는 황실 행사 때 이브라힘이 다른 황자들과 미흐리마 황녀에겐 예를 갖췄으나 메메드를 무시하면서 불거진다[17]. 행사가 끝난 뒤 휘렘은 이브라힘을 아야 소피아로 따로 불러내서 왜 메메드를 무시하는지 묻고, 메메드의 후견인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나 이브라힘은 "황자를 한 분 더 낳으시면 그 때 생각해 보겠다"는 이유를 대고 거절했다.

셀림 황자가 태어난 뒤에도 불화가 이어졌다. 쉴레이만이 헝가리 정벌에 나설 때 이브라힘도 종군했는데, 콘스탄티노플에서 구빈원 설립을 요청하는 휘렘의 상소가 왔을 때 이브라힘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18] 반대 의견을 냈다. 그래서 모하치 전투로 헝가리를 멸망시켜 개선한 뒤에도 휘렘은 아프다는 핑계로 이브라힘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황자들의 자질을 관찰하던 이브라힘은 페르시아의 전쟁에 동행한 무스타파와 메메드, 그리고 수도에 남은 셀림을 비교해 본 뒤 '제국의 미래를 생각해 볼 때 무스타파가 적임자'라 판단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쉴레이만에게 무스타파를 후계자로 추천하면서 휘렘과의 대립이 시작된다.

3. 기타

16살때 쉴레이만을 처음 만난 이후부터 쭉 쉴레이만에 대한 충성만을 생각하고 있다. 쉴레이만도 이브라힘을 충복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더 나아가 보이즈 러브스러운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휴렘 술탄과는 절대 연인 사이가 아니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쉴레이만이 즉위하기 전에 황궁에서 일했고, 쉴레이만의 총애를 받고 능력을 인정받아 3년만에 말단 하위직에서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 되었다. 이브라힘은 큰 권세를 누리다가 휴렘과의 정쟁에서 패한데다 다른 대신들의 질투를 받았고, 자기 자신도 황제의 총애를 믿고 다소 오만하고 경솔한 언행을 일삼은 것 때문에 쉴레이만에게 처형당한다. 상당히 비극적인 운명의 캐릭터가 될 듯 하다.

휴렘과의 사랑은 허구이지만 쉴레이만 대제와 나눈 우정은 분명한 사실이다. 둘의 우정에 대해서는 이브라힘 파샤 항목 참조.

[1] 사냥 업무를 담당하는 책임자[2] 이슬람권에서 남자가 수염이 없다? 그 말은 셋 중 하나라는 말이다. 노예, 동성애자, 아니면 고자.[3] 황제의 내정.[4] 이건 어느 정도 사실과 부합한다. 이브라힘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었다기보다, 쉴레이만의 총애를 듬뿍 받은 결과 궁정 내의 최하위 관직에서 최고 관직까지 3년 만에 뛰어올라갔기 때문. 대제국의 관료제가 아니라 오늘날 회사도 누구는 몇 년 째 승진을 못 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저쪽의 잘난 누구씨는 3년 만에 말단 사원에서 부사장까지 올라갔다면 분쟁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5] 새장은 모르겠으나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고증 오류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설령 이브라힘이 이름을 주었다 하더라도 쉴레이만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으로 바꿔 버리면 그만이었다.[6] 고증 오류로, 오스만 제국에서 흑인 환관은 쉴레이만 시대 이후인 무라드 3세 시대(1574~1595)때부터 적극적으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또 하렘에 흑인 환관이 많았다고 하면 모를까, 흑인 환관 관할이라고 하면 안 된다.[7] 샤피크는 휴렘이 위기에 처할때마다 여러번 휴렘의 목숨을 구한다.[8] 취소선이 그어져 있지만 분명히 대역죄에 속한다.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황실의 핏줄에 손을 댄다는 것은 황제 시해와 맞먹는다고 해도 좋다.[9] 베네치아인 알비제 그리티와 내통한다는 혐의[10] 고증 오류로, 데브시르메 제도로 뽑혀 와 관료 교육을 받는 소년들은 시동장이나 응장감 등 황실 내에서의 자잘한 업무들을 보다 지방 총독으로 나갔다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즉 저 "고위 관료들" 도 대다수가 시동장을 거친 자들이다.[11] 고증 오류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제아무리 다종교 제국이라고는 해도 지배층의 종교는 이슬람이었던 오스만 제국에서는, 18세기에 접어들어 제국이 분명히 쇠망의 길로 접어들기 전까지 이교도와 맞서 싸우며 알라와 무함마드의 영토를 더욱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항상 있어왔다. 또 오스만 제국은 현대 대한민국의 시 정도에 해당하는 산자크(sanjak)의 총독이 그 지방에 주둔한 병사들을 지휘하고 도에 해당하는 에야레트(eyalet)의 대총독이 총독들을 지휘하는 군대 체계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 말은 몽골 제국과 마찬가지로 지방행정조직이 곧 군사조직이었다는 말이다. 그만큼 관료들의 고과를 평가할 때에도 군공이 중요하게 여겨졌고, 그에 따라 군사 원정을 단행하자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대총독들이 콘스탄티노플 정부의 뜻은 묻지도 않고. 심지어 곤란하다는 뜻을 전해받았는데도 단독으로 군사 원정을 단행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12] 베오그라드 공방전의 전개 과정을 완벽히 창작해 냈다. 유럽 원정의 첫 번째 관문이라고 할 정도로 베오그라드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당시 헝가리는 국가 막장 테크를 아주 훌륭하게 밟고 있었고. 그 결과 1521년 베오그라드 공방전 당시 오스만군은 1만 5천에서 2만 5천이었던 반면 수비군은 딸랑 7백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니 매수를 할 필요도 없었으며, 더더욱이 베오그라드는 오늘날에는 세르비아 수도지만 당시에는 헝가리에게 중요하기로 순위권에 드는 요새. 즉 헝가리 땅이었다.[13] 이스탄불을 비롯해 오스만 시절에 크게 번영했던 도시에 세워졌으면서 쉴레이만이나 그 아들 셀림 2세 때 만들어진 건물이라고 하면 이 사람 작품 아니냐고 찍어도 거의 맞는다고 봐도 될 정도로 많은 건축물을 세운 인물. 그의 작품 중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들도 있다. 실제로 미마르 시난은 예니체리 부대에 속한 공병대의 일원이었다가 재능을 인정받아 황실의 후원을 받는 건축가가 되었으므로(쉴레이만은 에흘리 히레프(Ehl-i Hiref)라고 해서 황실이 후원하는 예술가 단체를 조직, 임금을 주고 예술활동을 하게 했다), 이브라힘의 천거라는 부분을 제외한다면 역사적으로 얼추 들어맞는다. 베오그라드 공방전에 참전한 것도 맞지만, 정작 시난이 건축가로 직업을 바꾸게 된 것은 1539년의 일.[14] 고증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오스만은 대포에 대해서라면 유럽의 최고 선진국이었다. 베네치아는 아니고 프랑스의 사례이긴 하지만, 동맹국인 프랑스의 함대와 연합작전을 벌이던 하이르 앗 딘이 프랑스 함대의 빈약함에 어이가 없던 나머지 프랑스 제독에게 "당신네는 화약통을 화약이 아니라 포도주로 채워놓는 모양이오?" 라고 한 마디 했을 정도.[15] 이브라힘이 하인 아메드 파샤의 난을 직접 진압한 적은 없다. 다만 반란 이후에 재상 겸 이집트 대총독이라는 직함을 달고 이집트에 파견되어 군사 및 통치 체제를 손보기는 했다.[16] 이브라힘 외에는 하티제도 메메드 출생의 비밀을 의심한다.[17] 실제 역사에는 잠시 눈을 감기로 하고, 메메드가 이브라힘의 친아들이라 하더라도 개연성 면에서 말이 안 되는 장면이다. 예를 갖추지 않는다는 건 자신의 아들임을 주장하는 것이고, 이건 황실의 핏줄을 건드렸다는 대역죄를 자인하는 것이기 때문.[18] 오스만 제국에선 발리데 술탄이 구빈원을 운영하고 빈민들을 구휼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휘렘은 하세키 술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