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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12월 14일 |
경기도 시흥군 (現 경기도 시흥시) | |
사망 | 1960년 9월 29일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대통령표창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그는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서 귀향해 있던 중, 3월 27일 같은 동리에 사는 이정석이 서면 소하리 일대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노온사리에 있는 경찰 주재소에 연행되어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이에 그는 최호천과 함께 동리사람들에게 주재소에 갇혀 있는 이정석을 구하자고 제의하여 1백여 명의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향하던 중, 내가대리 주민 1백여 명의 가세하였다.
주재소에 도착하여 그는 군중의 지휘를 맡고 최호천이 통솔했으며 이종운, 김인한, 최정성, 유지호, 최주환 등이 선두에 서서 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때 시위군중은 주재소 게시판을 쓰러뜨리고 뒷벽을 파괴하는 등의 행동을 했으나, 그 곳의 순사와 순사보들은 불을 끄고 아무도 없는 것처럼 가장했다.
이에 그는 군중을 두 갈래로 나누어, 한 갈래는 자신이 인솔하고 다른 군중은 최호천이 인솔하여 각각 이정석을 체포했던 조선인 순사보 김정환과 최우창을 잡으러 다녔다.
결국 잡지 못하고 다시 주재소에 모여서 독립만세와 이정석의 석방을 요구하자, 주재소 안에 숨어 있던 일본인 순사 적송이 불을 켜고 나와 이정석의 석방을 약속했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을 보통학교 뒤쪽으로 인솔하여 그곳에서 만세를 외치게 하고 해산시키는 등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고, 계속 끈질긴 법정투쟁을 했으나, 1920년 6월 1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