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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률

출생 1866년
함경북도 경흥군
사망 몰년 미상
사망지 미상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2.1. 러시아어 번역관2.2. 문명개화론2.3. 대동공보2.4. 대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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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러시아어 번역관

유진률은 1866년경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출생했다. 경흥군은 두만강 인근 지역에 있는 마을로, 일찍부터 러시아와 교류가 활발한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러시아인들과 접할 기회가 많았으며, 일찍이 러시아로 이주하여 조선과의 국경지대인 아지미(Adimi)에 정착했다.

아지미는 1872년 한인들에 의해 건설된 마을로, 상아지미와 하아지미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지미강 약 기슭에 따라 펼쳐져 있었으며, 강 양쪽으로 초가집이 띄엄띄엄 지어진 마을 전체 길이는 10 베르스타(10,67km)였다. 마을에는 예배당, 학교, 군초소(병사 12명) 등이 있었다고 한다.[1]

그가 언제 러시아로 이주하여 러시아어를 공부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다만 블라고베센스크에서 러시아정교 신학교를 졸업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1896년경 경흥에서 러시아어 번역관으로 일했다. <독립신문> 1897년 9월 7일자 잡보 <아라샤 해삼위 근쳐 연츄 각 디방이 이십 이샤인대>에서, 유진률은 최봉준과 함께 연추지역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손꼽히며 벼슬을 맡기면 잘 할 수 있는 인물로 알려졌다.

<대한제국 관보> 1899년 8월 24일자 기록에서, 유진률은 내장원(內藏院) 종목과(種牧課) 주사로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8월 28일에는 궁내부 번역관보로 이직했다. <독립신문> 1899년 8월 29일자 관보 '팔월 이십오일 김명제는 참령을 임하고'에서도, 유진률은 궁내부 번역관보에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유진률은 1903년 4월 30일 주블리다보스토크 통상사무부 서기생으로 임명되었으며, '경흥보첩(慶興報牒)'에 따르면 1903년 7월 13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업무를 봤다고 한다. 1904년 5월 24일 도지부 대신 박정양이 의정부 참정(參政) 조병식에게 보낸 <외무소관 해삼위통상사무서의 1903-1904 두해의 각종 비용 등을 예산 밖에서 지출해 달라는 청의서>에도 유진률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는 1904년 5월에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통상사무소에서 서기생으로 근무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황성신문 1899년 4월 11일자 <의조권학(義助勸學)>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유진률은 흥화학교(興化學校)에 장학금을 출연하였다고 한다. 그가 출연한 흥화학교는 1898년 11월 5일 특명전권공사로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온 민영환에 의해 외국어와 선진 기술 보급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 주 ․ 야학 과정을 개설하고, 입학시험을 통해 국·한문 解得者 위주로 학생을 선발하였다. 초등교육보다는 중등교육을 목적으로 영어, 산술, 지지, 역사, 작문, 토론, 체조 등을 교육하였다.

2.2. 문명개화론

유진률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면서 <독립신문>에 여러 차례 투고를 올렸다. 1898년 당시 투고자 가운데 가장 많은 투고를 한 인물은 바로 그였다. 1898년 9월 19일자 논설 <유 지각한 친구의 글>에서, 그는 서양 사람은 지식이 열려서 문명의 진보가 세계에서 뛰어나지만, 아시아 사람은 한서 두 글자에 깊이 병이 들어 아는 것이 편안한 것과 인순하는 것뿐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한문에 굳은 선배들은 서양 글을 야만의 글이라 하여 "읽지도 아니 하고 썩은 나라 글만 읽어 옛적에 하던 일만 하니 무슨 지식이 생기겠는가."라고 통탄했다.

유진률은 뒤이어 오늘의 현실은 세계 강국들이 이익을 다투는 제국주의 시대임으로 옛 일만 좋아하고, 진보를 힘쓰지 않으면 청국에 이어 조선도 망할 것이라고 지적하며, 어서 잠에서 깨어서 진보에 힘쓸 것을 역설했다. 즉, 그는 서양은 문명한 나라로 인식하고 동양은 미개화한 나라라고 여겼다. 아울러 문명은 교육을 통하여 달성될 수 있다고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야만은 사람의 천품이 본래 야만이 아니라 교육을 받디 못해서” 야기된 상태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문명화의 핵심을 교육으로 봤다.

<독립신문> 1898년 10월 15일자 논설 '개탄론'에서, 그는 조선에서의 압제를 견딜 수 없어 살 길을 찾아 백성들이 중국, 러시아로 새로운 땅을 찾아 이주하였음을 밝히고, 청국보다는 러시아 정부에서 한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어 한인들이 러시아에서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조선의 법률은 야만적인 반면에 러시아에서는 문명적이고 어진 법률로 다스리니, "대한에 있을 때보다 인민이 요순적 풍속을 다시 만는 것 같은지라."라고 주장했다.

1898년 11월 25일과 26일, 독립신문에 '유진률씨의 편지'가 게재되었다. 그는 1898년 11월 4일에 벌어진 독립협회 간부 구속 사건에 대해 간신배들이 황상 폐하의 총기를 흐리게 하여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임금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라도 꾸부러진 일에는 반대 하여야 백성의 직무인즉 정부가 백성을 말미암아 된 것이오, 백성이 정부를 위하여 난 것은 아니라."고 하여, 국가와 정부의 설립 목적이 국민을 위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2.3. 대동공보

유진률은 1904년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은 유진률이 러시아에서 군수와 같은 직분을 맡은 적이 있다고 밝혔으며, 일부 자료에서는 그가 연추 지방의 전직 도헌(都憲)이었다고 기록되었다. 그가 러시아에 귀화한 시기는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으나, 러시아식 이름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유가이였다.

그는 1908년 2월 26일 해조신문 창간호 본사특별광고에서 아지미 발행소의 책임자로 명시되었다. 이후 해조신문이 폐간된 뒤 최재형이 대동공보를 인수했을 때, 차석보차석보, 문창범 등 35인과 함께 자금을 지원했다. 1908년 5월 28일, 그는 연해주 주지사에게 <대동공보>의 간행을 허락해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해주 남우수리강 아지민스카야의 농부이며 마트로스카야 6번지 24-2호에 거주하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유가이 올림.

각하께 삼가 부탁드리건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하고 있는 한국어 신문인 최봉준이 출판하는 해조신문의 발행을 계속하기 위하여 제가 최가 소유하고 있는 인쇄소를 양도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 신문의 편집자는 퇴역 중령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미하일로프가 맡게 될 것입니다.

이 신문은 각하께서 허가한 종전의 원칙하에 『대동공보』(한국의 소식)라는 이름으로 발행될 것입니다. 본인과 미하일로프 중령의 신분 증명서를 첨부합니다. 양도와 신문 인수에 대한 전체적인합의는 자필 서명으로 증명합니다.

군지사는 신문 간행을 허가했고, 1908년 8월 15일 제1차 대동공보 발기인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유진률, 차석보, 문창범 등 35인의 발기로 신문을 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해조신문'의 사장이었던 최봉준으로부터 인쇄기, 활자 등 신문의 간행에 필요한 제반 기계를 구입하기 위해 자본금을 모으기로 하였다. 9월 1일에 창간호를 간행하고자 하였으나 자금이 여의치 않아 지연되던 중 발기인 가운데 1인인 차석보의 담보로 최봉준으로부터 인쇄시설 등을 구입하여 1908년 11월 18일 그 창간호를 간행했다.

이후 대동공보사는 신문의 주요 간부를 임명했는데, 유진률은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았다. 한편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청년돈의회(靑年敦義會)에 참여해 국권회복운동에 가담했다. 1908년 11월 18일 창간된 이후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간행되었으나 재정문제로 간행이 자꾸만 중단되었다. 이에 최재형, 유진률, 이상운, 박인협, 차석보, 고상준[2] 등의 발기로 1909년 1월 31일 특별 고주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참석한 70여명의 고주들은 대동공보를 다시 발간하기로 결정하고 앞으로 행할 일을 다음과 같이 공포했다.
1. 본사에서 새로 선정한 임원은 사장에 최재형, 부사장에 이상운, 발행인에 유진률, 총무에 박인협, 재무에 이상운.
1. 본사에서 고금을 거두는데 편의함을 위하여 매달 5원씩 나누어 받되 매달초 일일에 받게 한다.
1. 본사에서는 주필 미하일로프씨의 성의를 치하하기 위하여 본사 사장 이하 각 임원과 고주들이 모여 연회를 열고 씨를 청하여 치하하는 글을 써준다. 주필 미하일로프가 재정난을 알고 월급 100원을 받지 않고 명예로 시무.
1. 본사에서 신문 기계와 잡물을 매입하였는데 기금은 차석보에게 대용하고 매달 백원씩 감보하기로 한다.

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 사무실에서 유진률, 정재관, 이강, 윤일병, 정순만, 우덕순 등이 모여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일을 논의했다. 그 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성사시키자, 대동공보는 이 사건에 보다 특별한 관심을 보여 연일 대서특필했으며, 주필인 미하일로프를 변호사로서 여순에 파견했지만 일본 측이 일본인 변호사만 허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실패했다.

대동공보는 1909년 11월 18일자 외보 <의사의 소성(素性)>부터 1910년 5월 12일자 안중근의 사형과경 보도까지 안중근의 동향과 재판과정, 신문과정 등에 대해 소상히 보도했다. 또한 안의사 추도회를 개최했으며, 유진률과 최봉준, 김병학(金秉學), 김학만(金學滿) 등이 주도하여 '안응칠유족구제회'가 결성되었다.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이 현실화되자, 대동공보는 일제의 조선 강점에 반대하는 각지의 의견을 기사화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1910년 9월 1일자 논설 <금일>을 통해 한일병합을 비판하는 의견을 개진하며, 칼을 잡으며 창을 메고 피를 흘려야 조선의 독립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9월 1일 러시아 관헌으로부터 발행금지를 통보받음으로서, 대동공보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2.4. 대양보

대동공보 폐간 후, 유진률은 1911년 4월 26일 자신의 명의로 군지사에게 대양보 간행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본인은 각하께 삼가바라옵건데, 블라디보스토크시에서 이미 허락하신 인쇄소를 이용, “대양보”라는 제명의 한국어신문을 발행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름은 “큰 바다 소식”이라는 뜻이며, 이 신문의 편집은 제 개인의 책임하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무르연안 지방 한국인 주민 사이의 한국어 신문 발행의 욕구는 매우 강렬합니다. “대양보”는 유일한 도덕 교육 및 진보적 경제 교육의 수단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아시아 유일의 친러시아적 신문이 되어 간첩 활동과 무력에 기초하는 일본의 극동정책을 유럽의 문명세계 앞에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시 1911년 4월 26일

러시아 당국에서는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러시아는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고, 일본 측이 요구한 한인 취체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이에 유진률은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람을 파견해 이갑, 이위종 등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그 결과 1911년 5월 5일 군지사로부터 신문발행 증명서를 얻어냈다.

증명서 내용은 1911년 5월 5일부터 매주 일요일과 목요일 2회 조선어 신문 '대양보'를 인쇄해서 간행하는 일을 허가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신문의 내용과 가격에 대하여도 규정했다. 즉, 내용은 조선, 일본, 청국, 기타 조선인의 이해 관계가 있는 구주 제국의 시사문제, 외보, 조선 및 이웃나라의 잡보 등으로 제한했다. 그리고 신문 가격은 1년에 4루블, 6개월에 2루블 50코페이카, 1개월에 50코페이카, 1부에 4코페이카 등이었다.

발행소는 신개척리에 신축하기로 하고 일부는 신문사로, 일부는 도서관으로 하기로 예정하였다. 그리고 건축비는 이종호와 최재형이 부담하기로 하고, 가옥 낙성에 이르기까지는 일번천(一番川) 정거장 앞 러시아소학교 2층을 빌려 사용하기로 했다. 1911년 6월 1일자로 제1호를 발간하기로 결의하고 임원으로는 사장 최재형, 주필 신채호, 총무 차석보, 발행인 김대규(金大奎)[3], 러시아어 번역 유진률, 회계 김규섭, 서기 김만식, 집금계(集金係) 이춘식 등이 선임되었다.

대양보는 1911년 7월 16일 청년근업회와 권업회발기회가 권업회로 통합되면서 권업회의 기관지로 기능하였다. 이때 유진률은 이종호와 함께 신문부에 임명되었다. 대양보는 곧 발행인 겸 편집인에 유진률을 임명하고 신문 간행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11년 6월 18일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일제가 항일적인 기사들을 채록하여 일본어로 번역한 것만이 남아 있다.

대양보는 7호(1911년 7월 30일)까지 간행하다가 유진률과 이종호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겨 휴간했다. 이후 의견이 조정되어 8월 27일 제8호를 간행했고, 9호는 8월 27일 목요일이 정기 간행일이었지만 2일 늦춰서 국치일인 29일에 일제의 조선강점 특집호를 간행했다. 주요 내용은 항일에 대한 것이었으며, 평소 300부 간행하던 것을 1,400부로 간행하여 무료로 배부했다.

그러나 대양보가 13호를 낸 직후, 또다시 유진률과 이종호 간의 의견대립이 벌어졌고, 결국 9월 14일 유진률이 사직하기에 이르렀다. 이종호는 대양보 13호에 개재한 유진률의 글이 논조가 너무 과격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유진률은 이갑에게 편지를 보내 권업회, 근업회 등이 이종호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자신은 그의 전횡을 견딜 수 없어 사직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안창호에게도 1911년 11월 21일 편지를 보내 대양보는 이종호 개인의 신문이니 후원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대양보는 유진률의 후임으로 러시아인 포랴노브스키, 듀꼬프, 판데레프(Панделев) 등 3명을 명예직으로 추천, 임명하고 다시 신문의 간행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9월 17일 밤 약 15,000개의 활자를 도난당하여 신문 발간에 문제가 생겼기에 결국 휴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진률은 대양보 발행인 및 편집인을 그만둔 뒤 권업회 평의원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사임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유진률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보리스 박, 니콜라이 부가지, <러시아에서의 140년간>, 시대정신, 2004, p.78.[2] 독립유공자 고상준과 동명이인이다.[3]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김대규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