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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윌리엄 램버튼 William Lamberton | |
출생 | 미상 | |
스코틀랜드 왕국 | ||
사망 | 1328년 5월 20일 (향년 미상) | |
스코틀랜드 왕국 세인트앤드루스 | ||
직위 |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스코틀랜드 수호자 |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주교.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로부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헌신한 종교적 지도자다.2. 생애
스코틀랜드 남북 버윅셔의 램버튼 출신 기사가문 출신이라는 설과 던디 인근 리라덴의 램버튼 가문 출신이라는 설이 제기되나,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의 초기 생애와 교육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석사'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볼 때, 대학을 졸업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293년 이전에는 로버트 위셧 주교의 후원을 통해 글래스고 대성당의 캐논(Cannon, 합창대 지휘자)이 되었다. 1293년 2월, 글래스고 대성당의 수석 사제로서 스코틀랜드 국왕 존 발리올이 스콘에서 개최한 첫번째 스코틀랜드 의회에 참여했다. 이후 로버트 위셧 주교의 지시에 따라 1294년 여름까지 유럽 대륙으로 보내져 신학을 공부했다.1296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침공으로 존 발리올이 폐위된 후, 램버튼은 대다수 스코틀랜드 성직자 및 귀족들과 함께 에드워드 1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캔터베리 대주교가 스코틀랜드 교회를 자신의 주권하에 두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에 깊이 우려하다가,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가 1297년 봉기를 일으키자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297년 9월 스코틀랜드 반군이 잉글랜드 토벌대를 상대로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직전에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프레이저가 망명지인 파리에서 사망하자, 그는 윌리엄 월레스의 요청에 따라 1297년 11월 3일 세인트앤드루스 주교로 선출되었다. 이에 잉글랜드인들은 월레스가 세인드앤드루스 교구에 선둘러 선거를 치르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비난했다. 그렇지만 세인트앤드루스 대집사 2명, 주례사, 교무장을 포함한 교구의 여러 구성원이 반란을 지지했으므로, 윌리엄 월레스를 도운 램버튼이 선출되는 데 그리 강한 압력을 가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연대기 작가 포던의 존에 따르면, 램버튼은 고인이 된 프레이저 주교의 심장을 매장하기 위해 파리에서 세인트앤드루스로 가져왔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램버튼은 1297년 가을에 프랑스로 갔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교황에게 직접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램버튼은 대성당 참사회의 대표 3명과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청에 자신이 주교로 선출되었음을 확인했다. 1298년 6월, 그는 마테오 디콰스파르타 추기경에 의해 주교로 성임되었다. 그는 교황청에 있는 동안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는 걸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성직 안수를 받은 후, 프랑스로 떠나서 프랑스 당국에 지원을 호소했다. 1298년, 잉글랜드군은 반란군의 재산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세인트앤드루스 주교령에 속한 커클리스턴을 약탈했다.
1299년 여름, 램버튼은 담에서 배를 타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이후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계획을 스코틀랜드 수호자들에게 보고했고, 폴커크 전투 참패 후 혼란해진 스코틀랜드 정계에 즉시 개입했다. 1299년 8월, 피블스에서 섭정 의회가 열리는 동안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후 영주들은 둘 중 한 쪽을 딱히 따르지 않던 램버튼을 세번째 수호자이자 최고위 수호자로 선임하기로 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정계는 적어도 반년 동안 안정되었다.
램버튼은 존 발리올의 복위를 원했지만, 그를 붙잡고 있던 잉글랜드와의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1300년 로버트 브루스가 수호자직에서 사임한 후, 잉그램 드 움프라빌이 새 후호자가 되었다. 세 수호자들은 1300년 말까지 서로 협력했지만, 이내 자기들끼리 이권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코민과 램버튼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램버튼은 스코틀랜드 대시종장 제임스 스튜어트와 아솔 백작 존 드 스트라스보기의 지원을 받았다. 그 후 1300년 10월에서 1301년 5월 사이에 세 수호자가 전원 사임했고, 존 드 소울스가 유일한 스코틀랜드 수호자로 군림했다.
램버튼이 수호자에서 사임한 것은 해외의 고위 사절로 파견되어 지원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301년 교마 교황청으로 파견된 스코틀랜드 사절단에는 세인트앤드루스 교구의 주교 서기 2명이 포함되었는데, 그가 이 사절단에 함께 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 1301년 말, 램버튼은 프랑스 왕실에 찾아가서 필리프 4세에게 스코틀랜드를 포함하지 않는 평화 협약을 잉글랜드 국왕과 채결하는 걸 막으려고 했다. 1302년 가을, 램버튼은 존드 소울스와 함께 사절단을 이끌어 파리로 다시 가서 필리프 4세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303년 5월 필리프 4세가 잉글랜드와 체결한 파리 평화 협약 조약에서, 스코틀랜드는 배제되었다.
1304년 5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램버튼은 대다수 스콭르랜드 영주와 성직자들이 에드워드 1세에게 복종한 걸 보고 본인 역시 충성을 맹세하고 세인트앤드루스 주교령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에드워드 1세에게 복종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몇 주 후인 1304년 6월 11일, 램버튼은 에드워드 1세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은 스털링 성을 포위 공격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와 긴밀하고 비밀스러운 동맹을 맺었다. 동맹의 내용은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서로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사실 자체는 전해진다. 램버튼은 이제 로버트 브루스가 존 발리올을 대신해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는 걸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1305년 가을 로버트 위셧 주교와 만났고, 뒤이어 로버트 브루스와 접촉해 밀담을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해 그의 신임을 얻었고, 에드워드 1세는 그를 스코틀랜드 현지의 잉글랜드 총독에게 조언하는 위원회 위원 22인 중 한 명으로 선임했다. 새 총독 장 드 브르타뉴의 도착이 지연되자, 램버튼은 1305년 10월 26일에 스코틀랜드 의회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305년 9월,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에 편입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했다. 이 결정은 교황청에 직접 종속되어 있던 스코틀랜드 교회가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의 영적 주권하에 놓이게 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이에 램버튼은 에드워드 1세에 대항할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1306년 2월, 로버트 브루스가 덤프리스 교회에서 존 코민 3세를 살해하고 3월에 스콘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램버튼은 존 코민 3세가 살해되었을 당시 베릭에서 스코틀랜드 의회 의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소식을 듣자마자 도시를 밤중에 빠져나와 페리를 타고 포스 강을 건넌 뒤, 스콘으로 가서 로버트 1세의 대관식에 참석했고, 새 왕을 위해 미사를 집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1세는 1306년 5월 초 램버튼을 반역자로 규탄했다.
새로운 잉글랜드 총독 에이머 드 발랑스가 토벌대를 이끌고 북상하자, 램버튼은 가신들에게 로버트 1세를 위해 싸우라고 촉구하면서도, 자신의 보호를 받고 있던 앤드류 스튜어트[1]를 발랑스에게 인질로 보내 호의를 표시하려 했다. 그러나 발랑스는 이를 거부하고 앤드류 스튜어트를 돌려보냈다. 1306년 6월 19일, 로버트 1세는 메스번 전투에서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참패했다. 그 직후, 램버튼은 체포된 뒤 사슬에 묶인 채 잉글랜드로 압송되었다. 그는 뉴캐슬에서 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성직자라는 신분 때문에 사형은 모면했지만 1308년 5월까지 윈체스터에 감금되었고, 세인트앤드루스 영지와 수입은 에드워드 1세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 후 교황 클레멘스 5세의 중재로 잉글랜드 새 국왕 에드워드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풀려난 램버튼은 처음에는 더럼 주교 앤서니 베크의 감독 하에 더럼 교구에 억류되었다. 그는 트위트 강을 건너 스코틀랜드와 접촉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그의 교구 영토 대부분이 잉글랜드군에 점령되었다. 1308년 말 로버트 1세와 에드워드 2세 간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09년 7월 링컨셔의 스탬퍼드에서 열린 잉글랜드 의회에 출석했고, 1309년에서 1310년 사이의 겨울에는 스코틀랜드와의 새로운 휴전 협상에서 잉글랜드 사절로 활동했다. 1309년 말 앤서니 베크 주교의 대리인으로 일하면서 스코틀랜드에서 이단으로 고발된 기사단의 거래를 조사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에 남은 그는 주교들이 15년간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세인트앤드루스 교구의 행정을 다시 맡았다. 1310년 2월 파이프에 있는 스코틀랜드 왕실에서 활동했다. 1311년 6월 11일 새인트앤드루스에서 교구 공의회를 열었고, 1311년 7월 에드워드 2세로부터 스코틀랜드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았다. 1312년 로버트 1세의 부탁에 따라 에드워드 2세에게 사절로 파견되었고, 1313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평화를 중재하고자 프랑스로 가서 필리프 4세를 알현했다. 그는 1314년에 사절로서 다시 프랑스로 갔기 때문에, 1314년 6월에 벌어진 배넉번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가 배넉번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스코틀랜드인들의 전의를 돋우는 연설을 했다는 전승이 전해지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램버튼은 전란으로 황폐해진 세인트앤드루스 성과 주교 영지를 복원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세인트앤드루스에 새로운 회의장을 지었고, 교구인들에게 책과 예복을 기부했다. 1318년 7월 롭러트 1세와 수많은 귀족 및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새로운 세인트앤드루스 대성당을 봉헌했다. 이 대성당은 스코틀랜드 교회가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1318년 겨울, 스코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권리와 특권을 확인했다. 이렇듯 램버튼이 로버트 1세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하자, 에드워드 2세는 반감을 품고 1318년 교황청에 램버튼 주교의 직위를 박탈하고 잉글랜드 성직자 토머스 드 리버스를 세인트앤드루스 주교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이 요청을 명확히 거부했다.
그러나 1319년 11월 18일, 요한 22세는 램버튼 및 다른 세 스코틀랜드 주교를 아비뇽 교황청으로 소환해, 덤프리스 교회에서 존 코민 3세를 살해해 파문당한 로버트 1세를 지지하고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지속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묻기로 했다. 그들이 소환을 무시하고 스코틀랜드에 남자, 요한 22세는 1320년 6월 16일에 모레이 주교 데이비드 모라비아, 둔켈드 주교 윌리엄 싱클레어, 그리고 램버튼을 파문했다. 하지만 램버튼은 이에 굴하지 않고 주교, 정치인, 외교관으로서 계속 활약했다. 1322년 초여름, 그는 협상을 위해 잉글랜드로 여행을 떠났다가 잉글랜드 장병들의 공격을 받고 죽을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1324년 초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와 함께 새로운 평화 협상을 위해 잉글랜드로 여행을 떠났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다.
1328년 에든버러 평화 조약을 승인한 스코틀랜드 대표단 중 한 명이었다. 이리하여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와의 기나긴 전쟁이 끝난 직후인 1328년 5월 20일, 램버튼은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6월 7일 세인트앤드루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후대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독립전쟁 시기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정신적 독립을 보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서 존경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