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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렘 드 쿠닝

<colbgcolor=#000><colcolor=#fff> 윌렘 드 쿠닝
Willem de Kooning
파일:dekooning1981.jpg
본명 빌럼 데 쿠닝
Willem de Kooning
출생 1904년 4월 24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사망 1997년 3월 19일 (향년 92세)
미국 뉴욕주 이스트햄프턴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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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Academie van Beeldende Kunsten en Technische Wetenschappen
(現 로테르담 응용과학대학교 빌렘 데 쿠닝 아카데미)
Grand Central School of Art
배우자 일레인 드 쿠닝(Elaine de Kooning) (1943년 결혼)
자녀 요한나 리스베스 드 쿠닝(Johanna Lisbeth de Kooning)(1956 ~ 2012)[1]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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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 태생의 미국 추상표현주의 거장.

아서 단토로부터 ”녹아내리는 피카소“라는 별명을 얻은, 반구상-추상표현주의적인 거친 붓질로 화면을 구축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904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출생한 윌렘 드 쿠닝은, 어릴 때부터 상업 예술 견습을 받았으며, 1924년까지 로테르담의 미슬 및 응용 과학 아카데미(Academie van Beeldende Kunsten en Technische Wetenschappen)에서 야간 수업을 수강했다. 1926년에는 아르헨티나행 영국 화물선을 통해 미국 버지니아주로 밀항했는데, 이때까지 드 쿠닝은 자신에게 가장 영감을 주었던 삽화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주택 도장 및 상업 미술로 생계를 이어가던 와중에, 이듬해에 맨해튼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스튜디오를 열었다.
파일:dekooning_1948.jpg
윌렘 드 쿠닝(1948), Painting, 캔버스에 애나멜 및 유화, 108.3 x 142.5cm.
1928년 즈음부터 드 쿠닝은 아실 고르키(Arshile Gorky) 등과 교류를 시작했다. 1930년대 그의 구상회화는 아실 고르키와 피카소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이었다. 1938년경에 뉴욕으로 온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과 교류하면서 그의 검고 빠른 필획에 영향을 받아 흑백 그림을 그렸다. 드 쿠닝의 초기 작업이 흑백인 이유는 클라인과의 교류 뿐만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도 한 몫했다. 1945년에 제작한 <Pink Angels>에서 리비도적 색채를 사용한 비유적 표현주의를 보여준 바 있기 때문이다. 이후인 1948년 4월 12일, 드 쿠닝은 한달간 찰스 이건 갤러리(Charles Egan Gallery)에서 초기 작업 10점을 전시해 첫 개인전을 치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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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렘 드 쿠닝(1952-53), Woman and Bicycle, 린넨에 애나멜과 유화 그리고 목탄, 193.8 x 124.8cm.
이탈리아 영화 <쓰디쓴 쌀(Bitter Rice, 1949)>의 논밭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장면을, 파블로 피카소그랬듯이 자신만의 조형적 어법으로 전면추상화한 <발굴(Excavation, 1950)>을 전후로 드 쿠닝의 회화에는 다시 다양한 색채가 들어오며, 그해 6월부터는 추상화로서 물질에서 멈추지 않고 다시 여성의 형상(shapedness)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린 <여인 I>을 시작으로 1953년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이후에 제작된 <여인 VI>에 이르기까지 드 쿠닝은 총 7점의 여성 형상 연작을 선보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화가적 전성기에 돌입했으며, 비평가 해롤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 등에 의해 잭슨 폴록과 더불어 ‘액션 페인팅’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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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렘 드 쿠닝(1964), Woman, Sag Harbor, 나무에 유화 및 목탄, 203.2 x 91.4cm.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드 쿠닝은 도심과 다른 자연에 관심이 있었고, 자연스레 그의 추상화는 롱아일랜드나들목이나 로마의 호텔 공원 정원 등을 향했다. 1963년에는 그는 뉴욕에서 스트링스로 작업실을 아예 옮겼는데, 그 과정에서 주문한 문들이 마음에 들지 않자, 문을 물리적 지지체로 채택하는 비범함을 보였다. 이때부터 드 쿠닝은 다시 여성의 형상에 몰입하게 되는데, 과거의 연작이 강하고 빠른 필획과 거친 표면을 내세웠다면, 이번에는 훨씬 꾸덕하고 기름진 붓질로 어법을 재창안했다. 그 형상은 물질이 녹아내리는 듯한 누드의 여성이 표면을 부유하는 것만 같았다. 나아가 1970년대 이후에는 이 화가적 어법을 다시 전면 추상화로 잡아냄으로써 (반)구상과 추상간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희했다.
파일:dekooning_1972.jpg
윌렘 드 쿠닝(1972), Clamdigger, 청동에 조각, 59 1/2 x 29 5/8 x 23 3/4 inches.
1969년부터 이후에는 회회적 회화에서 확장해 거친 덩어리감-시각적 촉각성을 띄는 조각적 조각을 병행하였는데, 여성 형상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듬해 헨리 무어의 제안에 따라 1980년대까지 초대형 조각적 조각을 작업하는 데 이르렀다. 1989년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았음에도 90년대까지 비교적 색조가 엷고 밀도가 완화된 선명한 추상화 작업을 전개했으며, 비평가 일군은 이것이 자기참조적 맥락이라는 인지력에 의한 것인지, 직관력에 의한 것이었는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3. 여담

  • 노스캐롤라이나 블랜마운틴 칼리지에서 수강하던 로버트 라우션버그(Robert Rauschenberg)는 교수인 윌렘 드 쿠닝에게 그의 드로잉을 지우는 작업을 원한다고 제안해, 두달 가까이 그의 드로잉을 지워냈다. 화가의 현전을 가시화하는 액션 페인팅을 가시화 되지 못하는 제스처로써 지워낸 셈이다. 라우션버그는 이 작업을 <지워진 드 쿠닝 드로잉>(1953, 48.3 x 35.9 cm)이라 명명하고 금박이 들어간 얇은 액자에 그림을 넣고 액자도 작품의 일부임을 선언했다.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은 2010년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 이 드로잉을 복원한 적이 있다. #


[1] 조안 워드(Joan Ward)의 소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