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7년(명종 2년) ~ 1613년(광해군 5년)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현길(見吉), 호는 구암(懼庵) 또는 동계(東溪).2. 생애
우복룡은 1547년 우숭선(禹崇善) 슬하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동생 우성룡(禹成龍)·우흥룡(禹興龍)·우반룡(禹攀龍) 등이 있었다.1573년(선조 6) 식년시 진사시에 3등 22위로 급제하였다.# 1577년(선조 10) 문소전참봉(文昭殿參奉)[1]이 되었고, 이어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과 목천현감을 거쳐 김포현령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서 끝까지 고을을 지킨 공이 인정되어 안동대도호부사로 승진하였다. 그 뒤 강화도호부사(江華都護府使)로 있을 때에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권세가의 횡포를 엄격하게 결단했는데, 이때문에 당대 권세가들의 미움을 받아 1599년(선조 32) 홍주목사(洪州牧使)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임금의 아낌을 받았고, 1602년 충청도 관찰사(종2품)에 제수되었고 나주·충주 목사를 거쳐 1612년(광해군 4) 성천부사에 이르렀다.
3. 일화
징비록에 의하면, '우복룡은 1592년 용궁현감으로 재직할 때 용궁현 소속 관군을 인솔해 진군하다가 영천군(永川郡)에서 식사를 하던 중, 하양현에서 온 수백 명의 군사들과 마주쳤다. 이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는데, 이를 괘씸히 여긴 우복룡은 이들을 반란군으로 몰기 시작했다.하양현에서 온 군사들은 당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이 내린 공문을 내보였다. 그러나 우복룡은 기어이 자기 군사들을 시켜 그들을 포위한 다음 모두 쳐 죽였다. 그러나 당시 경상도 순찰사(巡察使) 김수는 용궁현감 우복룡이 큰 공을 세웠다고 임금에게 보고했고, 이에 가자(加資)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에 오르고, 정희적(鄭熙績)을 대신해 안동대도호부사에 제수되었다.#선조 25년 5월 15일 5번째기사
그 뒤, 당시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하양현 군사들의 가족인 고아, 과부들은 사신을 만나기만 하면 말머리를 가로막고 울면서 원통한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우복룡은 이미 이름이 높던 터라 아무도 그들을 위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실제로 성천도호부사로 재직하던 1612년(광해군 4) 조정에서 우복룡의 과오에 대해 논의된 적이 있었으므로, 징비록의 기록이 신빙성을 얻는다.
"성천 부사(成川府使) 우복룡(禹伏龍)은 전일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있으면서 임진년 변란 때에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여 죄악이 가득 차고 원망이 쌓였는데 형벌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관작을 보존하고 있어서 남방 사람들이 통탄해 하지 않는 이가 없고 심지어 전기를 지어 그 죄악을 드러내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다시 목민관으로 삼을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광해 4년 2월 12일 1번째기사
-광해 4년 2월 12일 1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