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20:49:04

왕즈즈

왕즈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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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즈즈
Wang Zhizhi
(王治郅)
출생 1977년 7월 8일 ([age(1977-07-08)]세)
베이징시
국적
[[중국|]][[틀:국기|]][[틀:국기|]]
신장 213cm (7' 0") [1]
체중 110kg (243 lb)[2]
포지션 센터, 파워 포워드
드래프트 1999 NBA 드래프트 2라운드 36순위
댈러스 매버릭스 지명
소속 바이 로케츠 (1995~2001)
댈러스 매버릭스 (2001~2002)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2002~2003)
마이애미 히트 (2003~2005)
바이 로케츠 (2006~2015)

1. 개요2. 생애3. 플레이 스타일4. 수상 내역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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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농구인. 중국 출신 첫 번째 NBA 진출 농구 선수.

2. 생애

왕즈즈는 베이징의 농구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이 모두 농구 선수 출신이다. 1994년 17세의 나이로 바이 로케츠에 입단해 이후 중국 남자 농구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가 됐다. 1995-96년 중국농구협회가 첫 시즌을 시작할 때 리그 최연소 선수 중 한 명이었으나 곧 스타급 선수단의 핵심 멤버가 되었으며 이후 1996년과 2001년간 6시즌 동안 바이 로케츠는 리그 우승을 독점하고 있었다.

NBA의 댈러스 매버릭스는 1999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36번째 선택으로 왕즈즈를 선택했다.[3] 준비도 안 되고 혼란스러웠던 바이 로케츠는 왕즈즈가 NBA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오랜 협상 끝에 NBA 진출이 허가되었다. 왕즈즈는 2000-01시즌이 10경기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마지막 CBA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한 뒤 댈러스 매버릭스에 입단했다.

그러나 그는 댈러스 매버릭스가 중국 농구 관계자들에게 약속했듯 국대소집으로 중국으로 돌아가기보다는 미국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2002년 10월 중국농구협회에서 2002 부산 아시안게임 기간에 그를 중국대표팀에서 제명하였다. 이러한 제명절차는 2006년에야 해제되어 국가대표로 다시 뛸수 있게 되었다.

이후 2002년에 LA 클리퍼스와 계약했고 한 시즌을 보낸 후, 마이애미 히트와 다년 계약으로 입단했다. 그는 2004-05시즌에 마이애미와 2시즌 동안 뛰다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고, 이 기간 동안 34경기를 뛰었고 평균 2.5PPG를 기록했다. 이후 CBA 바이 로케츠로 복귀하게 된다.

2016년 공식적으로 은퇴하고 2018년부터 바이 로케츠 감독이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아시아 무대에선 신장도 월등하고 포스트업 스킬도 있으며 BQ가 높으며 슛 거리도 길어 3점슛도 가능하다. 야오밍의 자서전에 보면 그가 왕즈즈에게 초창기에 계속 열등감을 가졌다는게 드러날 정도로 말 그대로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하지만 NBA 무대에선 이 다재다능함이 역으로 최대 단점으로 돌변하며 트위너로 취급을 받았다. 파워와 스피드, 스킬 모두 NBA 수준에선 모자랐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하나 NBA 기준으로 수준 이상의 능력치가 못되면서 이도저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야오밍과 달리 NBA에서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CBA와 달리, NBA에서 왕즈즈와 야오밍의 위상이 역전된 것은 확실한 장점의 유무 때문이었다. 두 선수 모두 센터로서 다재다능함을 갖췄지만 왕즈즈가 전반적으로 우위라고 평가받았는데, CBA에선 왕즈즈나 야오밍이나 피지컬로 비교불가의 존재였으니 기술에서 우위를 점한 왕즈즈의 활약이 더 돋보였다. 하지만 선수들의 신체능력이 우월한 NBA에서 왕즈즈의 힘과 스피드는 모두 수준 이하였던 반면, 야오밍은 강력한 힘에 NBA 최고 수준의 하체를 지녔기에 몸싸움에선 정상급 센터도 야오밍을 버거워했을 정도였다. 신체조건도 왕즈즈는 NBA 평균을 약간 상회하는 센터였기에 부족한 신체능력을 상쇄시킬 수 없었던 반면, 야오밍은 NBA 최고 수준의 체격을 갖춘 선수였다. 즉, 이미 상대선수와의 매치업에서 우위를 점하여 주도권을 가진 야오밍은 자신만의 플레이를 할 수 있었던 반면, 왕즈즈는 상대에게 오히려 주도권을 내주니 자신의 플레이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사실 중국 리그에 있었을 때는 야오밍보다 더 뛰어난 플레이어였다[4]. 스피드는 사실 키에 비해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왕즈즈는 NBA 기준 골밑에서 위압감을 낼 정도의 힘이 없었다. 즉 빅맨답지 않게 몸싸움에서 대체로 밀린다는 것이다. 볼핸들링이나 패스 역시 빅맨치고 나쁘진 않았으나, 골밑에 있기도 애매한 선수가 외곽에 나올 정도의 기술은 아니었다는 게 문제. 스트레치형 빅맨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3점슛이 디르크 노비츠키 수준으로 뛰어난 것도 아닌데 그거 하나 믿고 출장시간을 줄 이유가 없었다. (슈팅터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부드러웠다. 사실 당시 기준으론 NBA 빅맨 중 상위권 슈팅력이긴 했다) 그렇다고 큰 키에 비해 체격이 갸날파서 파우 가솔처럼 우월한 신체 사이즈로 인사이드를 파고들며 폭풍 덩크를 날려대는 빅맨도 아니었던지라 결국 수준이 더 낮은 리그에서 다재다능함을 뽐내는 선수들이 수준이 더 높은 리그에 가면 다재다능하게 애매해진다는 걸 보여준 케이스이다. 이에 반해 야오밍은 왕즈즈에 비해 다재다능하진 못했으나, 파워라는 압도적인 장점 하나로 NBA에서 대성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왕즈츠의 플레이 스타일을 논하기 위해선 중국 리그/국제 무대 기준과 NBA 기준을 따로 나눠봐야 한다.

중국/국제 대회에서 왕즈즈는 (어시스트가 평범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빅맨으로서 완전체였다. 뛰어난 볼핸들링과 부드러운 슈팅터치, 긴 슛거리를 기반으로 코트 어디에서도 득점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CBA를 말 그대로 지배했다. NBA에 진출하기 직전 바이 로케츠가 6연패를 차지하는 동안 그는 MVP(00년), 파이널 MVP (00년), 블럭왕 4회 (96~99년)을 차지했으며[5] 고득점과 리바운드, 탄탄한 수비력을 모두 지낸 선수였다. (NBA에서 벤치만 달구다가 복귀한) 06-07시즌에 바로 26.8점 10.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파이널 MVP에 선정될 정도. 왕은 다재다능함을 기반으로 아시아 무대에선 거의 적수가 없었으며, 특히 (야오가 성장하기 전까지) 동시대 라이벌이었던 한국의 빅맨들에게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NBA 기준으로 볼 때 왕은 심히 애매한 백업빅맨이었는데, 몸싸움이 약해서 리바운드도 2개를 초과해서 잡아준 적이 없고 블럭도 커리어 0.3개 수준에 그쳤다. 왕이 NBA에서 수명을 유지한 것은 그나마 슈팅력 하나 때문이었는데, 시대가 시대니만큼 빅맨들이 3점을 많이 안 쏘던 시절에 55경기/48개 성공(성공률 41.4%)까지 기록했을 만큼 당시 백업 빅맨으로선 슈팅력이 상당했다. 출장시간을 많이 못 받는 선수인만큼 자유투성공률도 들쭉날쭉했는데, 그나마 안정적으로 뛰어주던 02, 03시즌에 기록한 성공률은 73.7%, 72.4%, 통산 성공률도 73.5%였다.[6] 왕의 주요 득점루트는 롱2~삼점슛으로, 긴슛거리를 이용해 상대빅맨을 끌어내는 것이 그의 존재가치였다.

댈러스에서 2번째 보내는 시즌에서 그는 55경기 출전, 10.9분 출전, 경기당 한개 정도의 3점슛과 한개 정도의 2점슛을 성공시키는 그럭저럭 쓸만한 11~12번째 벤치멤버 정도의 위상을 확보했다. 이를 기반으로 클리퍼스와 계약했고, 비슷하게 미미한 존재감을 보인 후 계약 두번째 시즌 중 방출, 이후 마이애미와 계약해 04-05시즌동안 4.6분이란 더욱 초라한 출장시간을 기록한채 NBA생활을 끝내게 된다.

전체적으로 NBA에서 그의 수준은 로스터 최하위권 한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레벨의 선수였다.[7] 리바운드, 블럭, 스틸 등은 그 키로 뛰다보면 자연스럽게 잡게 되는 최소한의 수준 정도였고 [8][9], NBA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확실히 통하는 한 가지 무기"는 슈팅력이었는데 그조차도 빅맨치고 괜찮은 수준에 그쳤으니 팀들 입장에선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크게 아쉽지 않은" 백업멤버 수준.

4. 수상 내역

수상 내역
CBA MVP (2000)
CBA 파이널 MVP 2회(2000, 2007)
CBA 블럭왕 4회 (1996~1999)
CBA 우승 7회 (1996-2001, 2007)
CBA 슬램덩크왕 2회 (1996, 1998)

5. 기타

  • NBA 활동 당시 야오밍과 달리 국대 소집에 불응하였다. 다른 팀 같으면 문제가 별로 안 되겠지만, 왕즈즈는 군대 팀인 바이 로케츠 소속으로 현역 중령 신분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하여 CBA에 복귀 당시 징계를 내려야한다는 여론이 다수였으나, 계급이 이병으로 강등당하는 것으로 복귀가 가능했다. 복귀는커녕 군사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여론이 다수였으나, 당시 체육부대장이었던 천자오디 소장이 운동선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관대한 처분이 내려졌다.

6. 관련 문서



[1] 맨발 기준 213cm (7' 0") / 착화 신장 216cm (7' 1")[2] NBA 기준. 중국 리그 시절에는 98kg(220 lb)에 불과했다고 한다.[3] 심지어 이 때 드래프트 동기 선수들 중에서 왕즈즈보다 더 낮은 순위를 기록한 선수들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2라운드에서도 거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57번째라는 매우 낮은 순위로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선택을 받았던 마누 지노빌리다. 물론 당시 지노빌리도 이탈리아와 유럽 무대에서 뛰어난 기량을 증명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유럽 리그에서 뛰는 남미의 백인 선수보다는 그래도 다재다능한 모습을 중국 리그와 국제 대회에서 자주 보여준 왕즈즈를 더 높게 평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커리어는 잘 알다시피 왕즈즈는 NBA 기준으로 매우 미달인 기량으로 트위너 취급을 받으며 결국 2006년부터 중국 리그로 돌아가게 되지만, 지노빌리는 스퍼스 이적 이후 팀 던컨, 토니 파커와 함께 BIG 3의 주역 중 하나가 되며 스퍼스에서는 4회 우승, 식스맨상 1회, 올NBA팀 3회, 올스타 2회, 등번호 20번 영구 결번 등의 엄청난 기록을 세우고 아르헨티나 농구 국가대표팀에서도 2004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 MVP, 2008 베이징 올림픽 동메달의 업적을 추가하면서 은퇴 이후 명예의 전당에도 입상해 지노빌리와 왕즈즈의 현역 선수 시절 위상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수준으로 크게 벌어졌다. 거기에 왕과 지노빌리는 1977년생 동갑이다. 사실상 지노빌리는 그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1999년 드래프트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었다.[4] 정확히 말하면 나이가 세살 많은 왕즈즈가 계속 우세를 점했으나 야오가 계속 성장하며 그 격차가 줄어드는 중이었다. 왕은 2000년 MVP와 파이널 MVP를 수상했으나 둘이 중국에서 같이 뛴 마지막 해인 2000-01시즌 MVP와 2001년 파이널 MVP는 야오밍이었고, 이 시즌 26.3점 11.7리바운드를 기록한 왕에 비해 기록상으로도 27.1점 19.4리바운드로 개인기록면에서도 더 뛰어났다. 그러나 결승전에선 노련한 왕의 바이 로키츠가 야오의 샤크스를 3승1패로 제압하며 결국 야오가 왕을 넘는데는 실패한 것으로 여겨진 것. 위에 언급된 자서전에 보면 야오가 이 패배에 얼마나 좌절했는지 나온다. 2001-02시즌 당시 샤크스가 23승1패로 리그를 씹어먹었고 (전 시즌 우승팀 로키츠는 18승4패로 샤크스와 동률이었다) 플레이오프에서 단 1패만 하며 우승을 한 점, 야오가 데뷔한 이후 매 시즌 평균득점이 상승하며 마지막 시즌에 32.4점 19리바운드에 무려 야투율 72.1%를 기록한 점을 생각하면 왕이 NBA로 떠나지 않았어도 01-02시즌의 지배자는 야오였을 것이다.[5] MVP가 하나 뿐인 것이 의외겠지만 로키츠에는 왕 외에 파워포워드 류유동 같은 좋은 선수들이 있었다. 야오를 제치고 2001-02시즌 정규시즌 MVP를 차지한 류의 해당 시즌 평균득점은 무려 37점에 달했고, 2000-01시즌에도 29.2점을 기록했다.[6] 참고로 중국리그에선 커리어 81.6%에 커리어하이가 89.5%에 달했다.[7] 57승팀인 02시즌 댈러스에서 그의 출장시간은 로스터 최하위권이었고, 하위권팀인 클리퍼스에서도 최하위였다. 즉 댈러스나 05시즌 히트가 강해서 출장시간을 못 받았다기보단 강팀이건 약팀이건 출장시간을 꾸준히 받을만한 수준이 못된다는 걸 알 수 있다.[8] 쉽게 말해 하승진급이다. 실제로 하승진이 뛰던 시절과 비교하면 블럭은 같고, 스틸 수치는 0.1대0.2로, 리바운드는 1.5대1.7로 왕이 미세하게 높은데 출장시간도 9.2분대 6.9분으로 앞서기 때문에 비슷한 수준이다. 한마디로 도긴개긴. 물론 하승진과 달리 후술하는 슈팅력이 있었기 때문에 "NBA에서 뛰려고 맘먹으면 계약할 팀은 찾을 수 있긴 한" 수준은 되었다.[9] 뱀발로 하승진이 왕보다 나은 항목이 있긴 했는데 이는 성장가능성 측면이었다. 왕의 경기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는 포스트업보다는 페이스업을 주로 했고, 그 키에도 불구하고 갸냘픈 체격으로 적극적인 몸싸움을 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NBA에서 페이스업으로 득점하는 빅맨들 수준의 운동능력은 지니지 못했으니 애매한 선수가 된 것. 그러나 하승진은 140kg에 가까운 육중한 체격 덕분에 NBA 기준으로도 골밑에서 몸싸움이 가능했고, 이를 기반으로 백업골밑요원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긴 했었다. 그의 커리어하이 경기를 보면 NBA 빅맨들도 그의 파워와 높이를 부담스러워하는 걸 볼 수 있다. 물론 반복되는 부상으로 성장시기를 놓쳐 자리를 못 잡았으니 의미없는 가정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