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3 05:30:28

깐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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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서산조
(1771 ~ 1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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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서산조
(1798 ~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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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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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부춘조 2대 황제
깐틴
景盛 | Canh Thinh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연호 깐틴(景盛/경성, 1793년 ~ 1801년)
바오흥(寶興/보흥, 1801년 ~ 1802년)
공치제 타이득(1792~1793)
성씨 호(胡) / 응우옌(Nguyễn, 阮/완)
꽝 또안(Quang Toản, 光纘/광찬)
부모 부황 꽝중 황제
모후 팜씨
황후 레티응옥빈
생몰년도 1783년 ~ 1802년
재위 기간 1792년 ~ 1802년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대월의 마지막 황제2.3. 떠이선의 쇠퇴2.4. 소조의 변2.5. 응우옌푹아인의 공격2.6. 수도의 함락2.7. 떠이선의 멸망과 멸족
3. 참고 항목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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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대월 말기 떠이선 왕조 부춘 조정의 제2대 황제. 약 900년을 유지한 대월의 78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묘호와 시호는 없으며 휘는 광찬(光纘), 다른 이름은 완찰(阮札, Nguyễn Trát). 그의 연호인 경성을 따와서 보통 경성제(景盛帝, Cảnh Thịnh đế)라 칭해진다. 꽝쭝의 아들. 아버지 광중제가 죽은 후 그 뒤를 이어서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1802년 응우옌씨 정권의 후예 응우옌푹아인에게 패배하고 사형당했다.

2. 생애

2.1. 초기

1783년 꽝쭝과 황후 팜씨(范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후 부황이 1789년 청나라에 의해 안남왕으로 책봉되었을 때, 청나라는 탕롱 북하[1] 절제사[2] 응우옌꽝투이(阮光垂)를 꽝쭝의 장남으로 착각해 실수로 그를 세자로 책봉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듬해 꽝중의 신하 팜꿍찌(范公治)가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서 사실 응우옌꽝투이가 서자고, 응우옌꽝또안이 적장자라고 해명하여 청나라는 다시 꽝또안을 왕세자에 정식 책봉했다. 동시에 꽝쭝도 그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2.2. 대월의 마지막 황제

1792년 꽝쭝이 병사했고 꽝쭝의 유언에 따라 신하 쩐반키(陳文紀), 쩐꽝지에우(陳光耀)가 어린 응우옌꽝또안을 보좌했다. 응우옌꽝또안은 즉위 후 연호를 깐틴(景盛)으로 개원한 후, 응오터이니엠(吳時任)을 청나라로 보내 안남왕 책봉을 요구했고 청나라는 광시안찰사 성림을 보내 그를 새로운 안남왕으로 책봉했다.

다음은 어린 깐틴을 보좌한 대신들이다
  • 북하진수[3] 응우옌꽝투이
  • 타인호아 진수 응우옌꽝또반(阮光盤)
  • 응에안진수 레쭝(黎忠)
  • 태사 부이닥투옌(裴得宣)
  • 태위 팜꿍홍(范公興)
  • 중서령 쩐반키[4]
  • 태자소보(太子少保) 쩐꽝지에우
  • 대사구(大司寇) 부반동(武文勇)[5]
  • 상장군 응우옌반후안(阮文訓)
  • 공부상서 응우옌반얀(阮文名, 다른 이름은 응우옌반탄)
  • 태사마(太司馬) 응오반쏘(吳文楚)

깐틴은[6] 즉위하자마자 꽝쭝의 신패[7]제도를 폐지하고 신패가 없는 관리를 수색하는 제도를 중지했다. 나이가 어린 깐틴은 정사를 신경쓰지 않아 태사 부이닥투옌이 정권을 장악했는데 그는 제멋대로 행동하여 많은 신하들의 원망을 샀다. 동년 멸망한 응우옌 주의 후예 응우옌푹아인이 숙부 응우옌냑(타이득)의 정권의 수도 꾸이년을 포위하자 응우옌냑은 깐틴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응우옌꽝또안은 팜꿍홍, 응우옌반후안, 레쭝, 응오반쏘를 비롯한 1만 7천여명의 병사, 전투용 코끼리 84마리를, 수군으로는 덩반찬(鄧文真)을 비롯한 30여 척의 전선에 태워 지원했다. 푸쑤언조의 지원에 응우옌푹아인은 연경부에서 철수하고 쟈딘(嘉定)으로 성과없이 돌아온다. 한숨 돌린 사이, 응우옌푹아인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푸쑤언 조정의 팜꽁홍은 갑자기 꾸이년 조정의 모든 정부기관을 폐쇄하고 강제로 자신들의 푸쑤언과 합병하자 타이득은 분개하여 피를 토하고 죽었다. 애초에 지원부터가 꾸이년의 땅을 노렸던 꿍꿍이 덩어리였던 것이다. 깐틴은 구 꾸이년의 영토에 타이득의 아들 응우옌반바오를 효공(孝公)으로 봉해 제후로 책봉한 후, 부이닥쭈(裴得宙), 응우옌반후안을 보내 그를 감시하게 했다.

이후 응우옌꽝또안은 통일 이후 응우옌푹아인에게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1794년 깐틴은 응우옌반후안과 쩐비엣켓(陳曰結)을 보내 연경성을 격파하고 푸옌(富安)을 습격했다. 당시 연경성엔 응우옌푹아인의 어린 아들 응우옌푹까인, 피뇨 선교사, 판반년, 통푹케(宋福溪), 응우옌반탄(阮文誠)이 열렬히 저항해 떠이선군을 격퇴하나 떠이선의 쩐꽝지에우와 응우옌 주의 응우옌반투(阮文賜)가 연경을 둘러싸고 수개월 동안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듬해 서산조에 내란이 일어났다. 태사 부이닥투옌이 부반동의 병권을 빼앗고 응오반쏘를 북하로 보내 부이닥투옌의 북하진수의 관직까지 빼앗아 푸쑤언에 오도록 명했다. 부반동은 푸쑤언으로 가던 중, 쩐반키를 만났는데 쩐반키는 반란을 계획했고 이에 동조한 부반동은 반란을 결심한다.

부반동은 부춘에 이르러 팜꽁훙과 응우옌반후안과 합류해 부이닥투옌의 궁을 포위했고 부이닥투옌이 나오려 하지 않자 부반동 등이 황궁을 포위하곤 부이닥투옌을 넘겨줄 것을 요청하자 황제령으로 부이닥투옌은 부반동 세력에게 넘어갔고 한편 응우옌꽝투이도 응오반쏘와 부이닥투옌의 아들 부이닥투(裴得宙)를 체포해 푸쑤언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들을 반란죄의 죄명 하에 익사시켰다. 깐틴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단지 눈물만 흘릴 뿐이였다.

2.3. 떠이선의 쇠퇴

연경을 포위, 공격하던 쩐꽝지에우는 푸쑤언으로 돌아와 부반동, 응우옌반투와 대치했는데, 부반동은 쩐꽝지에우를 부이닥투옌의 인척으로 보고 재차 난이 일어날까 두려워해 팜꽁홍에게 중재를 청했고 깐틴도 사람을 보내 둘의 갈등을 해결했다. 이후 팜꽁홍이 병사하자 깐틴은 친정을 시작해 4명의 신하들을 다시 관직에 봉했는데, 이 4명의 신하들을 사주대신(四柱大臣)이라 부른다. 그리고 응우옌반후안은 꾸이년 진수(鎮守)[8]에서 물러나 레쭝이 꾸이년진수가 되었다.

다음은 사주대신 명단이다.
  • 쩐꽝디에우는 소부
  • 응우옌반후안은 대사도.
  • 부반동은 대사도.
  • 응우옌반탄은 대사마로 봉했다.

이렇게 책봉된 사주대신이나 쩐꽝디에우는 누군가가 황제에게 참언하여 그 병권을 몰수당했고 쩐꽝디에우는 조정마저 불신하게 되어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조정 내의 내전과 의심은 곧 서산을 쇠퇴하게 만들었다.

다만 쩐꽝디에우의 충성심은 남아있었고, 1797년 응우옌푹아인이 북벌하여 꾸이년을 공격했으나 성과가 없자 광남부의 현 다낭을 공격했는데 이 공격은 응우옌반후안과 쩐꽝디에우가 막아냈다.

2.4. 소조의 변

한편 멸망한 꾸이년의 명목상 군주[9] 응우옌반바오가 자신의 세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1798년 응우옌푹아인과 내통하는 일이 벌어졌다. 응우옌푹아인은 신하 응우옌반타인을 보내 효공을 접견하려 했지만 푸쑤언의 깐틴이 레반타인(黎文清)을 미리 보내는 선수를 쳐 효공을 체포했다. 효공이 응우옌푹아인과 내통하려 한 사건을 소조의 변(小朝之變)이라 부른다.

깐틴은 레반타인에게 꾸이년 사수를 명했고 레반응(黎文應)이 꾸이년진수 레쭝이 미흡한 탓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간언하자 깐틴은 레쭝을 처형했다. 또한 형부상서 호꿍디에우(胡公曜)의 참언만 믿고 레쭝과 관련되었단 이유로 응우옌반후안마저 죽였다. 이러한 처형은 떠이선의 중요 인재를 죽이는 낭비가 되었고 조정 내 신하들 사이에선 황제에 대한 불신감이 생겨났다.

2.5. 응우옌푹아인의 공격

1799년 응우옌푹아인은 재차 꾸이년을 공격했다. 깐틴은 쩐꽝지에우와 부반동을 보내 꾸이년을 구원하려 했으나 광의에서 응우옌반타인에게 대패했다. 쩐꽝지에우는 사기 감소를 우려해 부반동의 패전을 숨겼고 부반동과 생사를 같이 하는 등 필사적으로 저항하게 되었다. 레반타인은 오랫동안 원군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물품이 바닥난 상태라 결국 응우옌 주에게 투항했다.

응우옌푹아인은 꾸이년을 점령하고 꾸이년을 평정(平定)으로 이름을 고친다음 응오똥쩌우(吳從周)에게 평정성을 지키게 했다. 꾸이년이 함락되었단 소식에 깐틴은 친정하여 광의에 도달했으나 역풍이 불어 수군을 쓸 수 없자 진일결의 건의를 받아들여 완문갑에게 광의를 지키게 한 다음 쩐꽝디에우와 부반동에겐 광남을 수비하도록 명했다.

조정에선 진일결, 쩐반키, 호꿍지에우가 줄곧 쩐꽝지에우를 싫어했는데 이때 꾸이년이 함락되자 무공(無功, 공이 없음)을 이유로 들어 쩐꽝지에우와 부반동을 처형하라고 황제에게 간언했다. 부반동이 처형 조서를 쩐꽝지에우에게 알리자 쩐꽝지에우는 군을 이끌고 돌아와 이러한 사실을 청에게 퍼트린다고 하자 깐틴은 호꿍지에우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쩐꽝지에우에게 넘겼다. 그러자 쩐꽝지에우가 입궐해 깐틴에게 충성을 보였다.

깐틴은 쩐꽝지에우에게 좋은 말로 위로했고 쩐꽝지에우는 통곡했으며 직접 꾸이년 수복을 자청하여 부반동과 꾸이년쪽으로 진격했다.

2.6. 수도의 함락

쩐꽝지에우와 부반동은 시내항을 포함한 꾸이년 근처의 도시들을 점령하고 그곳의 항복을 받아냈으나 1801년 응우옌푹아인이 여러 각지의 지원을 받아 북상하자 시내항을 점령하고 부반동을 격파, 광남, 광의 땅을 차례로 초토화시켰지만 떠이선 군이 응우옌푹아인의 세를 뚫고 포위를 시도하자 응우옌푹아인은 사람을 보내 응오똥쩌우를 미리 대피하게 했다.

당시 떠이선 왕조의 정국은 혼란스러웠으며, 민심이 흉흉해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 하락세를 걷고 있었지만 응우옌푹아인은 반대로 남방에서 토지법을 제정하는 등 상승세를 걷고 있었다. 이전에 1793년 영국의 외교관 스톤튼(Staunton)이 청나라를 거쳐 떠이선 왕조에 가보자 그곳의 백성들은 잦은 전쟁으로 지옥같은 삶을 살고 있으며 황제는 군사에만 관심을 두고 민심은 뒷전인데다 게다가 떠이선의 수도 푸쑤언에선 인육을 공개적으로 팔았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한다. 그리고 응우옌푹아인에 비해 떠이선 왕조는 서양인을 극도로 경계했다고 한다.

정국이 이러니 민심은 악화하여 응우옌푹아인의 군대가 북벌할때마다 떠이선의 백성들이 응우옌푹아인을 환영했고 응우옌푹아인이 북벌하는 와중에도 떠이선의 푸쑤언, 타인호아에는 천주교 세력을 비롯한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깐틴은 이름난 선비인 응우옌티엡을 불러 대책을 물었으나 응우옌티엡도 패전은 이미 정해진 결과며 돌이킬 수 없다는 답을 내놓자 깐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응우옌티엡은 응예안에서 물러나면 항전의 가능성이 있다고 더 말했지만 깐틴은 망설였다.

응우옌푹아인이 시내항을 공격하자 깐틴은 부마 팜반찌를 영채산(靈蔡山)에 주둔시켜 어떻게든 항전을 계속했다. 레반주엣, 레쩟이 응우옌푹아인의 군대를 격파, 팜반찌는 도주했으나 포로로 잡혔다. 응우옌푹아인은 순안해구(Thuan Hoa)까지 공격을 감행하고 깐틴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저항했다. 서양의 사료에 따르면 투언호아에선 떠이선-응우옌의 통일을 위한 치열한 전쟁이 펼쳐졌고 곳곳엔 시신들이 나뒹굴어 다녔다고 상황을 묘사했다.

깐틴은 태재 응우옌꽝티에우, 원수직 완광경, 태사마 응우옌반얀을 거느리고 동쪽 바다를 건너 최복단으로 도주했고 그가 놓고간 옥새 등 황제의 상징들은 응우옌푹아인에게 노획당했다. 깐틴의 황후 레티응옥빈도 응우옌 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이때 쩐꽝지에우와 부반동은 푸쑤언이 함락되었다는걸 알고 장복봉을 보내 황제를 지원하려 했다. 응우옌꽝투이는 깐틴이 왔다는 소식에 그를 탕롱으로 맞이한 다음 자신의 집을 임시궁궐로 삼았다. 궁궐을 이주하자마자 비가 왔는데 깐틴은 이를 불길하게 여겨 바오흥으로 연호를 바꾼 다음 국자감을 설치, 우수한 학생들을 간추려 냈고 남은 신하들에게 다시 관직을 배정해 남은 영토로의 복귀를 노렸다.
  • 응오시리엠은 병부상서.
  • 진휘력은 이부상서.
  • 반후이익은 예부상서.

깐틴은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해 응우옌푹아인에게 대항하고자 했으나 응우옌푹아인이 떠이선의 옥새를 미리 청제국에게 바쳐 안남왕 책봉에 대한 신임을 얻으려 했고, 해적들을 붙잡아 청제국 정부에 바치며 인계했는데, 양광총독 각라길경(覺羅吉慶)이 그 해적들을 가경제에게 바쳤다. 가경제는 떠이선 왕조가 이 해적들을 감쌌다는 사실에 격노하여 떠이선 왕조의 사자를 쫒아냈고 이로써 청제국의 지원 계획은 무산되었다.

2.7. 떠이선의 멸망과 멸족

1802년 깐틴은 최후의 공격으로 응우옌꽝투이에게 진녕루 공격을 명했고, 쩐꽝지에우의 아내 배씨춘도 5천 대군을 이끌고 직접 응우옌 군과 맞섰다. 깐틴은 응우옌꽝티에우, 완광경에게 탕롱만을 지킬것을 명하고 자신은 삼만 대군을 거느리고 응우옌푹아인을 공격했지만 참패하고 겨우 살아남아 북쪽으로 도망갔다. 응우옌푹아인은 승세를 거듭하여 북벌해 탕롱을 점령한다.

깐틴은 응우옌꽝투이, 응우옌꽝티에우, 완문용, 응우옌반투를 데리고 쑹카이 강을 넘어 도망치다가 그곳 주민들에게 체포되어 모든 떠이선의 신하와 일족들은 응우옌 주의 수도가 된 탕롱으로 끌려갔다. 이후 그들은 나무우리에 가둬진 후 그 우리를 담은 수레가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곧 능지형으로 사망했다. 끝까지 응우옌푹아인에게 저항한 떠이선의 충신들인 쩐꽝지에우와 부반동은 참수당했고 떠이선 왕실의 시조인 타이득꽝쭝의 무덤도 부관참시당하여 그 시신도 능지형을 당해 감옥에 가두어졌다.

응우옌푹아인은 처형식을 기점으로 베트남을 다시 통일했고, 1804년 칭황식을 올려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국호를 대남(大南)으로 바꾸어 이름뿐인 대월은 완전히 소멸한다.

3. 참고 항목

4. 둘러보기

파일:떠이선 왕조 국기.svg
서산 부춘조의 역대 황제
초대 태조 광중제 완문혜 2대 경성제 완광찬 서산 멸망
대월의 역대 황제
77대 태조 광중제 완문혜 78대 경성제 완광찬 (임시) 완왕 완복영
베트남의 역대 황제
태조 광중제 완문혜 경성제 완광찬 세조 가륭제 완복영

[1] 당시 외국에선 베트남의 북쪽(맨 위, 즉 찐씨가 다스렸던 영역)을 북하(北河)라 불렀다.[2] 우리나라 고려에도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사용된 관직명이기도 하다. 군직을 담당함.[3] 진(鎭), 번국과 비슷하다 보면 된다.[4] 이후 미천역(渼川驛)의 역승(驛丞)으로 파견되었다.[5] 이후 북하진수로 파견되었다.[6] 제호가 깐틴 황제(경성제)임으로 깐틴이라 표기한다.[7] 관료의 신분증.[8] 守는 지킬 수 자다. 진은 번국과 비슷하니, 그 번국을 지키는 사람이라 보면 된다.[9] 작은 조정이란 뜻의 소조(小朝)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