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23:31:48

엘리엇 네스

<colbgcolor=#000><colcolor=#fff> 엘리엇 네스
Eliot Ness
파일:Eliotness.jpg
출생 1903년 4월 19일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사망 1957년 5월 16일 (향년 54세)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쿠더스포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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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금주국(1926년 ~ 1935년)
클리블랜드 공공안전국(1935년 ~ 1942년)
학력 시카고 대학교 (정치학 · 경영학 / 학사)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 (범죄학 / 박사)
배우자 에드나 스탈레 (1929년 ~ 1938년, 이혼)
에바린 미셸로 (1939년 ~ 1945년, 이혼)
엘리자베스 앤더슨 시버 (1946년 결혼)
서명 파일:Eliot_Ness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어릴적 삶2.2. 경력과 알 카포네의 타도2.3. 알 카포네 판결 이후 2.4. 말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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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금주법 수사관. 언터처블(The Untouchables)이라는 별명이 붙은 전설적인 법무 수사관.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금주법 위반 단속을 위한 노력, 그리고 알 카포네를 잡아 넣은 것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알 카포네를 처단한 이후 인생사가 순탄하지 않아서 그의 명성은 잊혀졌으며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쳤는데, 생전에 다른 작가와 공동집필한 회고록이 유명해지면서 뒤늦게 공적을 인정받았다.

2. 생애

2.1. 출생과 어릴적 삶

노르웨이 출신 빵장수 피터 네스(Peter Ness)와 에마 네스(Emma Ness) 사이의 5남매 중 막내로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다른 네 형제는 이미 장성한 상태라, 엘리엇은 자라는 동안 누나들에게 큰 관심을 받았다. 네스는 소년일 때 독서를 좋아했는데, 특히 코난 도일셜록 홈즈를 즐겼다. 이후 시카고 대학에 진학해 시그마 알파 엡실론 사교클럽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1925년 정치학과 경영학 전공으로 학사를 받았다.

졸업 후에는 애틀랜타의 리테일 크레딧사에서 조사원으로 경력을 시작했는데, 신용 정보 수집을 위해 사람들의 배경을 조사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후 대학에 돌아가 범죄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2.2. 경력과 알 카포네의 타도

1926년 그의 매형이자 미 연방 수사국(1935년에 FBI가 됨) 요원 알렉산더 제이미(Alexander Jamie)의 영향을 받아 법무 수사팀에 들어갔다. 그는 1927년 재무부에 들어가 시카고에서 금주국(Bureau of Prohibition) 직원 300명과 일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 임기 초에 재무장관을 맡았던 앤드루 멜런(Andrew Mellon)은 금주법을 악용하여 불법으로 밀주를 유통시켜 떼돈을 벌고 있는 갱단을 소탕하려고 했고, 이에 장관 직속으로 금주국을 설치하고 특별검사 조지 E. Q. 존슨을 금주국 국장으로 임명한다. 금주국은 특히 당시 밀주 유통으로 가장 악명 높았던 알 카포네 일당을 타도하는데 초점을 맞추는데, 조지 존슨 검사는 알 카포네를 금주법 위반과 탈세 혐의로 잡아 넣기 위해 엘리엇 네스를 금주법 특별 단속 책임자로 임명하는 한편 국세청 조사관인 프랭크 윌슨을 탈세 단속 책임자로 임명한다.

네스는 이 때 믿을만한 팀을 만들기 위해 재무부의 모든 요원의 기록을 검토한 후 50명의 후보를 추렸다가 최종적으로 11명을 선정해서 [1] 작전에 들어갔다. 네스의 회고록에 따르면 주로 전화선을 활용한 광역 도청을 활용해서 정보를 모은 뒤 6개월간 총 100만 달러어치의 양조장을 검거했다고 한다.

알 카포네는 양조장 문을 매우 튼튼한 철문으로 만들었는데, 이 철문 덕분에 단속반이 들이닥치더라도 이들이 문을 따는 동안 만들어둔 밀주와 장비 인력을 모두 대피시켜서 증거를 인멸할 수 있었다.[2]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엘리엇 네스는 불도저 트럭을 동원해서 양조장 철문을 그대로 부수고 진입했으며 양조장은 이런 저돌적인 단속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네스는 일단 불법 양조장에 진입하면 뒷말을 남기지 않기 위해 확보된 밀주통을 모두 뜯어서 술을 바닥에 쏟아버렸으며 밀주 제조장비는 모조리 압수해서 폐기처분했다. 물론 양조장 내에 있던 인력들도 모두 조사받고 형사처벌되었다.

이런 전방위적인 단속으로 인해 알 카포네가 입은 손실은 6개월 동안 무려 100만 달러[3]에 달했다고 한다. 당연히 알 카포네는 엘리엇 네스에게 온갖 회유와 협박을 시도했으나 그에게는 이런 수법이 일정 통하지 않았다. 한 번은 알 카포네가 네스의 사무실로 자기 부하를 보내 네스에게 1달에 2천5백달러의 돈을 주겠다고 회유했으나[4] 그는 즉시 카포네의 부하를 내쫓은 후 기자회견을 열어서 이런 식으로는 절대 자기를 회유할 수 없을 것이라고 언론에 천명했다. 알 카포네는 네스 뿐만 아니라 네스의 팀원들에게도 회유협박을 시도했으나 이들 역시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네스의 수사팀은 '언터처블스'(Untouchables[5])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미디어가 네스를 주목하게 되었다.

금주국에 있는 동안 엘리엇 네스는 최소 3번의 암살 위협을 겪었다. 네스뿐만 아니라 팀원들도 테러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 중 한명이 결국 암살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네스는 알 카포네를 잡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으며, 알 카포네는 결국 자금난과 세력 이탈을 이기지 못하고 탈세 22회 및 금주법 위반 5000건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재판 결과 카포네는 11년형을 선고받고, 1932년부터 형을 살았다.

하지만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네스는 크게 웃지는 못했는데, 카포네를 몰락시키고 그의 형량을 결정한 근간은 네스 팀이 확보한 금주법 위반 증거가 아니라 프랭크 윌슨 팀이 얻어낸 탈세 관련 증거였기 때문이다.[6]

2.3. 알 카포네 판결 이후

알 카포네를 몰락시킨 이후 네스는 승승장구 했으며 1934년에는 오하이오 금주국의 수석 조사관으로 승진했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된 후 그는 남 오하이오, 켄터키 테네시 주의 문샤인 마운틴스(Moonshine Mountains)에서 주류 조세 요원으로 배정받았고 1934년 클리블랜드로 발령받았다.

당시 클리블랜드 시장인 해롤드 H. 버튼의 요청으로 클리블랜드 공공안전국[7]의 수장으로 임명되어 금주국을 떠났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시카고 못지 않게 조직범죄가 심각한 도시였는데, 공공안전국으로 이직한 네스는 자신의 장기를 십분 활용하여 갱단을 소탕했으며 비행 청소년들의 선도에 앞장서서 청소년 범죄 예방에 힘썼다. 덕분에 네스가 공공안전국 국장으로 있던 시절의 범죄 건수는 이전에 비해 36%나 줄어들었다.

이처럼 네스는 당대의 유능한 경찰이자 행정가로서 명성을 날렸지만 뜻밖의 사건으로 몰락하게 된다. 당시 이 지역에서 일어난 유명한 연쇄살인 사건인 클리블랜드 토르소 살인사건이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네스가 직접 사건 해결에 뛰어들었는데, 조직 범죄와 연쇄살인은 전혀 다른 종류의 범죄이다보니 네스 역시 이렇다 할 단서를 확보하지 못했고 초조해진 네스는 빈민가를 불태우는 등의 무리하고 강압적인 수사를 강행했지만 정작 범인은 잡지 못하고 그간의 명성을 까먹는 결과만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그의 명성에 먹칠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네스가 한 파티에 참석해서 술을 마신 후 차를 몰고 돌아오다가 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저질러 버린 것이다. 그는 이 사건을 감추려고 했으나 한 지역신문이 사건을 파헤쳐서 기사화 하는 바람에 결국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하필 클리블랜드에서 음주운전을 척결하자는 캠페인을 주도하고 있던 사람이 바로 네스였기 때문에 더욱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클리블랜드 시장은 인명피해가 없었고 사고 자체도 경미했다는 이유로 그를 재신임했으나 여론이 악화되자 네스는 결국 뺑소니 사건이 벌어진 후 2달만에 국장직을 사임했다.

2.4. 말년

국장직을 사임한 네스는 1942년 워싱턴으로 건너가서 국방부 보건복지국 사회보호 프로그램의 책임자가 된다. 당시는 2차대전이 한창이었던 시기였으며 각지로 파병한 미국 군대의 열악한 위생상태와 성병의 창궐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는데 네스의 역할은 바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네스는 이 역할도 충실히 잘 해냈으며 그가 운영한 프로그램은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다.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부터 네스는 중국에서 옷감을 수입하는 무역회사를 운영하면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이를 바탕으로 1947년에는 클리블랜드 시장에 출마했지만 클리블랜드 시절에 있었던 각종 스캔들과 반노동운동 성향 등이 부각되면서 선거에서 완패하고 만다.

이 때부터 네스의 본격적인 몰락이 시작됐는데 선거비로 많은 자금을 날린데다 그가 운영하던 무역회사는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미국과 중국의 무역이 전면 중단되는 바람에 문을 닫았다. 그는 남은 돈을 신생 보안회사에 투자했는데 이 회사에서 자랑하던 보안기술이 사실상 사기였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회사는 문을 닫았고 네스는 결국 무일푼 신세가 되었다.

이후 네스는 서점의 점원이나 식당의 서빙을 하는 등 어렵게 살다가 1953년 제지 공장에 취업했다. 이 때 그는 동네 주점에서 술을 마시면서 옛 이야기를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공장 동료의 소개로 오스카 프렐리라는 저널리스트를 만나 자신이 금주령 시대 마피아와 싸웠던 시기의 각종 비화와 관련 에피소드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의 이야기에 빠져든 프렐리는 네스를 설득해서 함께 <건드릴 수 없는 사람들(Untouchables)>이라는 책을 썼다.

1957년에 출간된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큰 인기를 끌었으며 잊혀진 영웅이었던 네스는 다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네스는 이런 영광을 직접 보지 못하고 이 책이 출판되기 6개월 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망당시 네스에게는 1만달러에 가까운 빚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네스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으며 그의 아내는 네스의 시신을 급하게 화장한 후 유골을 집에 보관했다.

네스가 사망한지 40년만인 1997년에 클리블랜드 주의 주도로 엘리엇 네스의 장례식이 정식으로 치러졌다. 가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유골은 클리블랜드의 레이크뷰 호수에 뿌려졌다.

3. 기타

미국 드라마 수퍼내추럴에서는 그도 헌터라고 한다. 설정이라지만 그도 유령, 뱀파이어, 모습변환자를 죽이고 다녔다고 한다.

그의 알 카포네 체포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1987년 작 언터처블이다. 케빈 코스트너가 엘리엇 네스 역할을 맡았다.

나르코스: 멕시코에서 일 잘 하는 멕시코 경찰 등장인물을 네스로 묘사하는 대사가 나온다.

닥터드레의 노래 캘리포니아 러브에 언급된다.

건스미스 캣츠 1화에서 언급된다.


[1] 다만 11명이라는 숫자는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계속 고정된 인원으로 수사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략 6명에서 15명까지 인력변동이 있었다고 한다.[2] 한편으로 단속반 상당수가 알 카포네에게 뇌물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일부러 미적거리면서 양조장 측에서 증거 인멸할 시간을 벌어주기도 했다.[3] 2020년대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2천만 달러에 해당된다.[4] 당시 네스의 연봉은 2800달러였다. 쉽게 말해 그의 연봉에 해당하는 돈을 월급으로 주겠다는 것.[5] 불가촉천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회유하거나 매수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중의적인 의미이다.[6] 당시 미국인들은 금주법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술좀 만들어 판게 뭐 그렇게 죽을 짓이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일부 술꾼들은 오히려 알 카포네와 같은 밀주 제조업자들을 필요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엘리엇 네스와 팀원들 조차 금주법은 말도 안되는 악법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다만 악법을 이용해서 부당하게 부를 쌓는 상황을 더 싫어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단속에 나섰던 것이다. 반면 당시 미국의 경제사정은 1929년 시작된 경제 공황으로 인해 말이 아닌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 국민들은 부자들의 탈세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때문에 미국 행정부나 법원 입장에서도 알 카포네를 밀주 제조업자보다는 탈세범으로 몰아가는게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는데 훨씬 유리했다.[7] 클리블랜드의 경찰조직과 소방조직을 관리 감독하는 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