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 |
발생일 | 1996년 11월 23일 |
유형 | 하이재킹 |
발생 위치 | [[코모로| ]][[틀:국기| ]][[틀:국기| ]] 그랑드코모르 섬 |
탑승인원 | 승객: 160명[1] |
승무원: 12명 | |
사망자 | 승객: 116명[2][3] |
승무원: 6명 | |
생존자 | 승객: 44명 |
승무원: 6명 | |
기종 | 보잉 767-260ER |
항공사 | 에티오피아 항공 |
기체 등록번호 | ET-AIZ |
출발지 | [[에티오피아| ]][[틀:국기| ]][[틀:국기| ]] 볼레 국제공항 |
도착지 | [[코트디부아르| ]][[틀:국기| ]][[틀:국기| ]] 포르부에 국제공항 |
사고 6개월 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국제공항에서 촬영된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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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የኢትዮጵያ አየር መንገድ በረራ 961Ethiopia Airlines Flight 961
Le vol Ethiopia Airlines 961
الخطوط الجوية الإثيوبية الرحلة 961
1996년 11월 23일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케냐의 나이로비로 향하던 에티오피아 항공 961편(보잉 767-260ER)이 3명의 괴한에게 공중납치당했고 결국 연료고갈로 코모로 제도 인근 해상에 불시착한 사고. 당시 비행기 납치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사고로 기록되었는데[4] 이는 이후 9.11 테러로 인해 경신되고 말았다.
2. 사건 전개
2.1. 발단
에티오피아 항공 961편은 인도 뭄바이에서 출발하여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 케냐의 나이로비, 콩고 공화국의 브라자빌, 나이지리아의 라고스를 경유하여 최종적으로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으로 향하는 비행기였다. 뭄바이를 출발한 961편은 순조롭게 첫 번째 기착지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한 다음 케냐 나이로비로 향했지만 상공에서 공중납치를 계획한 3명의 남성이 탑승했다.비행기가 이륙한 후 적당한 시점이 되자 이들 3명은 자신들이 무기와 폭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5] 승무원을 협박하여 조종실로 들어갔는데 요나스 메쿠리아(Yonas Mekuria) 부기장을 폭행해서 내쫒고 부기장석을 차지했다.
납치범들은 자신들이 1995년에 수립된 에티오피아 정부에 저항하다가 투옥됐던 정치범이라고 주장하였으며 11명이 함께 하고 있다고 말했고[6] 비록 석방됐지만 에티오피아에서는 더 이상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으므로 정치적 망명을 원한다고 주장했는데 레울 아바테(Leul Abate, 1954~) 기장에게 호주로 향할 것을 요구하면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항공기를 추락시키겠다는 협박도 서슴치 않았다. 이들이 호주를 부른 것은 당시 객실 책자에 나와 있는 보잉 767 기종의 최대 항속거리가 호주까지 갈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으로, 하이재킹 상황에 긴장하던 기장은 이 말을 듣고 황당해할 수밖에 없었다. 기장은 이들에게 "여객기는 원래 (최대 항속거리까지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운항하는 거리까지만 갈 수 있는 양의 연료를 싣고 다니는 것이다. 나이로비에서 재급유를 받을 예정이라 (호주까지 갈 수 있을 만큼의 연료가 지금 이 비행기에 들어있지 않으므로) 이대로 날아 호주까지 가려고 시도하다간 중간에 연료가 다 떨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지극히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이야기였지만 납치범들은 그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3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무려 2번이나 하이재킹을 경험한 덕에[7] 상황 대처 면에서 베테랑이었던 아바테 기장은[8] 비교적 침착하게 대응했지만 이 정도로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납치범들의 행동은 당황스러웠다. 일단 그들의 요구대로 기수를 돌리는 시늉을 하면서 아프리카 대륙 동부 해안선을 따라 비행했는데 이는 필요할 시 가까운 인근 공항 또는 바닷가에 비상착수를 할 심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납치범이 여전히 해안선이 보이는 것을 눈치채고는 동쪽으로 향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결국 기장도 더 이상 그들을 속일 수 없었기에 기수를 동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객실에는 에티오피아 내전의 참상을 세계로 알린 저널리스트 모하메드 아민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승객과 승무원들을 향해 "힘을 합쳐 저 납치범들을 제압하자. (우리가 수적으로 우세하니)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설득했지만 겁에 질린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2.2. 비상착수
아바테 기장은 노련한 판단으로 일단 동쪽으로 기수를 돌려 납치범들이 비행기가 동쪽으로 향한다고 믿게 한 뒤 바다에 추락하여 모두 죽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은밀히 코모로로 방향을 바꿨다. 그러면서 동시에 연료가 떨어져가고 있음을 거듭 강조했지만 납치범들은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으며 결국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기장은 어떻게든 코모로 공항에 착륙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기 위해 같은 상공을 계속 맴돌게 설정하고 납치범들을 계속해서 설득하려고 했다.그러나 납치범들은 되려 깨뜨린 위스키병으로 기장을 공격하여 부상을 입히며 막무가내의 태도를 유지했고 결국 비행기의 연료가 다 떨어지며 양쪽 엔진이 모두 멈췄다. 비행기는 서서히 추락하기 시작했고 기장은 승객들의 안전을 최우선시하여 모로니에 있는 프랭스 사이드 이브라힘 국제공항에 비상착륙을 하기로 결정했지만 납치범들이 이에 반발해 격투가 벌어졌고 조종실을 나가 있던 부기장이 이 몸싸움에 개입해서 콕핏 내부는 개판이 되었다.
이로 인해 아베테 기장은 공항으로 향하는 방향을 놓쳐 착륙이 불가능해졌고 최후의 수단으로 그랑드코모로섬 해변 인근 해상에 비상착수하기로 결단했다. 납치범들은 고도가 내려가는 것을 알고 왜 고도를 내리는 거냐고 윽박질렀는데 참다 못한 기장이 "너희들의 멍청한 짓거리 때문에 연료가 떨어졌고 이제 비상착수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하자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기장은 착수하면서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왼쪽 날개를 먼저 수면에 닿게 하여 비행기 동체에 가해지는 충격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비행기에 가해지는 엄청난 압력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비행기 동체가 부서지는 상황은 피할 수 없었다.
착수 이후 아베테 기장은 안내방송과 승무원들의 안내를 통해 구명조끼를 나눠주는 등 빠른 후속조치를 취했고 여기에 적절한 비상착수 지점 선정 덕분에 사고를 목격한 다수의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구조 활동에 빠르게 나설 수 있었는데 때마침 프랑스인 의사들이 현지에서 휴양을 하던 중이라는 행운이 겹쳐 부상자들이 신속하게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었으며 인근 해양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던 사람들도 구조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비상 착수 자체가 가져다준 충격에 구명조끼 착용 매뉴얼 문제로 기장의 처절한 노력과 행운에 비해 생존자는 적었다. 12명의 승무원과 163명의 탑승객 가운데 단 50명(승무원 6명+승객 44명[9])이 부상을 입은 채 목숨을 건졌고 125명(승무원 6명+승객 116명+납치범 3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특히 1등석에 탑승했던 승객은 전원 사망했다.
3. 사고 분석
레울 아바테 기장과 요나스 메쿠리아 부기장은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모두 살아남았고 상황을 목격한 생존자들도 있었으며 공중납치에 의한 사고였으므로 원인 진상규명은 거의 필요가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보여준 기장의 행동은 매우 적절한 대처로 인정받아 영웅이란 평과 함께 상을 받는 명예도 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바테 기장은 단 4년 만에 하이재킹을 무려 3번이나 겪고 비상착수까지 했는데도 생존했다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다만 많은 승객들이 혼란에 빠져 비상착수 시 구명조끼 착용 매뉴얼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자가 많아졌다. 구명조끼는 물에 빠진 사람들이 수면 위에 떠오를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로 매뉴얼에 침몰하는 항공기에서 탈출한 다음 혹은 탈출 직전 비상구에서 부풀려 공기를 채우도록 명시[10]되어 있지만 수상 추락이라는 상황과 하이재킹이라는 정신나간 상태에서 많은 승객들이 기내 방송과 승무원들의 지시를 전혀 따르지 않고 구명조끼를 착용하자마자 부풀려 공기를 채우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기장과 부기장, 일부 승객과 승무원들은 착수 직후 침몰 상황에서 매뉴얼대로 먼저 잠수하여 기내를 탈출한 후 구명조끼를 부풀려 수면 위로 떠올라 구조되었으나 나머지는 매뉴얼을 무시하고 기내 탈출 전에 구명조끼를 먼저 부풀린 탓에 잠수 탈출을 하지 못해 물이 차오르는 기내에 갇혀 끝내 익사했다. 승객 중 3분의 2 이상이 추락에 대한 공포 때문에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이런 결정을 내려 목숨을 잃고 말았으며 일부 승무원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똑같이 행동했다가[11] 결국 살아 나오지 못했다. 이렇게 약 60~80명의 승객들이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납치범 3명은 "비상 착수하는 순간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질 테니, 살고 싶으면 당장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라"는 기장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부리며 버티고 서 있다가 수면 충돌의 충격으로 모두 사망했다.
4. 여담
에티오피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바에 따르면 납치범 3인은 그저 무직자 2명과 간호사 1명이었고 11명의 동료가 있었다는 주장은 거짓으로 발표되었다. 물론 에티오피아의 정치적 수준을 보면 어디까지나 본인들 주장은 그렇다는 의미로 보인다.범인들이 승무원들을 협박하기 위해 과시했던 무기와 폭탄은 단순히 승무원들을 협박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폭발물질이 담겨 있다던 유리병은 사실 위스키류의 술이 들어 있었던 것 같았다고 하며 그 병을 열어서 유유히 마시는 장면을 목격한 승무원도 있었다.
비상착수한 지점이 관광객들이 많은 장소여서[12] 사고 장면이 생생하게 녹화되어 있는 몇 안 되는 사건 중 하나다. 이 사고를 촬영했던 사람은 "처음에는 관광객을 위해 에어쇼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했다. 당시 사고를 담은 영상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관광객이 촬영했다고 한다.
비상착수 시 비행기 동체가 멀쩡히 남아있기는 매우 힘든데 물과 닿았을 때의 마찰력 때문이다. 대부분의 여객기는 엔진이 날개 아래에 매달린 형태로 장착되어 있어서 착수하면 엔진부터 물에 닿게 되며 엔진이 물에 닿는 순간 엄청난 항력이 발생하고 그 반발력이 그대로 날개에 걸리는데 이로 인해 날개가 먼저 박살나고 그 파급효과로 동체가 물 위에서 뒹굴며 부서지게 된다.[13] 특히 파도가 치는 바다일 경우 그 파급력은 더 강해진다.
이 사고기의 한국인 탑승객은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근무했던 주 케냐 대한민국 대사관 소속 이헌종 서기관(1947~1996)밖에 없었는데 이헌종 서기관은 통신장비 시스템 설치를 위한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961편을 탔다가 애석하게도 목숨을 잃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반기문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14]을 보내 조문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 중에서는 유명한 케냐인 기자 모하메드 아민도 있었는데 아민은 힘을 합쳐 납치범들을 제압하자고 설득했고 혼자 조종석 입구 근처에 서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납치범들을 설득하려고 했으며 비행기가 해상에 착륙하자마자 수면 충돌의 강한 충격으로 튕겨나가 벌크헤드에 부딪혀 뇌진탕으로 즉사할 때까지 구명조끼를 입기는 커녕 좌석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아바테 기장과 메쿠리아 부기장은 치료를 받고 업무에 복귀하여 이후에도 한동안 비행을 계속했다. 아바테 기장은 훗날 인터뷰에서 납치범들에 대해 "그들은 호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저 동반자살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저 비행기를 추락시키는 것 말고는 관심도 없었다. 그놈들은 그저 철부지였을 뿐이다"라며 비난했는데 승객들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점을 인정받아 1998년에 폴라리스상을 수상했다.
이 사고는 광동체 여객기로 비상 착수에 성공한 최초의 사례로도 기록되었다.[15]
이 사건은 항공 사고 수사대 시즌3 10화 '납치범을 속여라!(Ocean Landing)'에 소개되었다.
2020년 2월 9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902화에 소개되었다. 영상
영상을 보면 중간에 아바테 기장의 모습이 나오는데 아직까지 잘 지내는 듯 하다. 영상 마지막에 사고 모습이 나오니 주의.
[1] 하이재커 3명 제외[2] 하이재커 3명 모두 사망했으나 사망자수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3] 후술하겠지만 충돌의 충격으로 죽은 사람보다 구명조끼를 너무 일찍 부풀리는 바람에 탈출하지 못해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4] 다만 사망한 사람 모두 납치로 죽은 사람은 없고 (범인을 포함한) 일부만 비행기 추락 때 충격으로 죽었을 뿐 대부분은 구명조끼 착용 메뉴얼을 무시하고 착용하다가 익사했다.[5] 실제 납치범 3명은 손에 위스키 병을 들고 있었다.[6] 당연하겠지만 이 말은 거짓이다.[7] 1992년 4월 12일에는 보잉 727을 조종하던 중 수류탄을 든 납치범들이 조종석에 들어와 강제로 나이로비로 날아가야 했던 적도 있었고 1995년 3월 17일에는 보잉 737-200을 조종하던 중 납치범들이 조종석에 들어가 스웨덴으로 날아가라고 협박을 한 적도 있었는데 이 두 사고에서 다친 사람은 전혀 없었다.[8] 3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무려 두 번이나 하이재킹 상황을 겪고도 위험을 넘기고 조종사 업무에 복귀한 기장의 능력과 멘탈도 대단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공항의 검문 검색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9] 생존한 승무원 6명은 모두 중상을 입었으며 승객들 중 단 6명(경상 2명+부상 없음 4명)만이 중상을 입지 않고 살아남았다.[10] 이렇게 사용할경우 설령 기체가 완전히 침몰했다고 해도 기체에서 빠져나와 급속도로 수면까지 상승해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11] 실제로 당시 생존한 승무원 수는 사망한 승무원 수와 완전히 똑같았다. 당시 겁에 질린 승객들이 앞다투어 구명조끼를 부풀리자 이에 동요한 절반의 승무원들도 같이 구명조끼를 부풀렸다가 탈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거냐면 기내에서 해야 할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뿐더러 기내가 비상상황이 되어도 침착함을 유지해야 하는 승무원들이 일반 승객들의 행동에 동요되어 탈출하지 못한 것만 봐도 바닷속에 추락하고 나서의 사고기의 기내 상황이 아비규환이었을 거라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인 셈.[12] 비교적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 기장이 여기에 비상착수하기로 한 것이다.[13] DC-9이나 MD-80처럼 엔진이 날개가 아니라 동체 뒤쪽에 달린 경우는 날개보다 평평한 바닥이 먼저 닿도록 착륙할 수 있기 때문에 착수 시 날개와 동체에 가해지는 충격이 좀 더 적다고 한다. 물론 이 사고의 보잉 767은 엔진이 날개에 달려 있었다.[14] 나중에 참여정부에서도 외교통상부장관을 지내고 이후 10년간 유엔 사무총장을 지내게 된다.[15] 참고로 최초로 비상 착수에 성공한 여객기는 1956년 10월 16일에 세계 일주 비행 중에 엔진 고장으로 태평양에 착수한 팬 아메리칸 항공 6편 수상 불시착 사고(N90943, 보잉 377)이며 최초로 비상 착수에 성공한 제트 여객기는 1963년 8월 21일에 일어난 아에로플로트 366편 불시착 사고의 주인공인 СССР-45021(기체는 Tu-124)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