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Évian Conference.
1938년 7월 6일부터 15일까지 프랑스의 대표적인 휴양지인 에비앙레뱅[1] 로얄 호텔에서 열린 회담. 이 회담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로 인해 발생한 독일 및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난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제 회담이었다.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반유대주의 정책을 폈고, 유대인들의 국적을 박탈해서 독일 내에서 어떠한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게 했다. 독일의 유대인 난민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로 떠오르자, 유대인 난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프랑스 에비앙에서 회담이 열리게 된다.
2. 배경
1933년 독일의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90만에 달하는 독일계 유대인들의 국적을 박탈하고 철저히 탄압하였다. 그 목적은 유대인들의 재물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해외 이주를 조장하는 것이었다.[2] 그래서 1938년에 이르면 45만명의 유대인이 독일을 떠난 상태였다. 그러나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안슐루스)한 후 20만명의 유대인이 추가로 독일 치하로 들어왔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에도 독일의 반유대인 법률이 적용됨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 역시 무국적자로 전락했다. 많은 독일 및 오스트리아계 유대인들이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로 피난하고 싶었으나 대공황의 후유증을 겪던 서방 국가들은 비자 발급에 인색한 태도로 나왔다.3. 참석자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32개국 및 24개 단체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미국은 모든 국가에 난민 문제의 장기적인 해결책을 찾아 볼 것을 촉구했다. 대표단은 모두 난민에 대한 동정을 표했지만, 정작 제안국인 미국은 물론이고 회의에 참석한 모든 국가가 유대인 이민 규제 완화를 꺼렸다. 미국과 영국은 각각 1년에 3만 명, 호주는 1만 5천 명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고, 남아프리카 연방은 자국 주민의 가까운 친척만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대표들 중 유대인 난민을 대량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 유일한 나라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미니카 공화국은 총 10만 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회의에서 그나마 얻은 성과라고는 유대인 난민 문제를 지속적으로 담당할 '정부간 난민 위원회(Intergovernmental Committee on Refugees)'를 설립한 것이었다.[3]
한편 회담 참석을 거부한 소련도 난민 수용을 거부했고 회담 1년 후 국경 경비대에 소련 국경을 통과한 모든 난민을 스파이로 간주하라고 명령하였다.[4]
4. 나치 독일의 반응
에비앙 회담의 결과를 본 독일 정부는 유대인에 대한 독일의 처리 방법을 비난하던 다른 국가들이 막상 자신들에게 유대인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을 때" 그 어느 누구도 유대인에 대한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이라며 의기양양하게 성명을 발표했다. 물론 유대인 난민 문제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책임자가 독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내로남불이다. 독일의 유대인 탄압은 1938년 수정의 밤을 기점으로 하여 더욱 잔혹해졌고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홀로코스트로 정점을 찍게 된다.5. 참고 자료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에비앙 회담"브리태니커 백과사전, "Intergovernmental Committee on Refugees"
[1] 생수 에비앙으로 유명한 그 지역이다.[2] 당시 독일은 아직까지는 유대인의 "절멸"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유대인의 절멸로 결론이 잡힌 것은 1941년 반제 회의에서였다. 독일 내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는 것 역시 인종 청소의 개념에 부합한다.[3] 정부간 난민 위원회는 1947년 해산되었고 그 역할은 국제연합 산하 국제난민기구(IRO)가 이어받았다. 국제난민기구는 1952년 오늘날 우리가 아는 유엔난민기구(UNHCR)로 개편되었다.[4] 물론 이건 전간기 얘기고 전쟁이 터진 이후로 학살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은 기꺼이 받아주기는 했다. 어찌되었건 사악한 나치로 부터 도망친 이들이니...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련 사회가 유대인을 온정적으로 바라본 건 아니라 도망쳐 오긴 해도 자본주의자 같은 탄압은 여전히 유효했기에 좀 부유했던 이들은 역으로 인민의 고혈을 빠는 유대자본가로 몰려 시베리아로 가게 되었다. 블라덱 슈피겔만의 이야기가 담긴 책 마우스에선 이 이야기가 조금 나오는 데 홀로코스트중에 사망한 아냐 슈피겔만의 작은 오빠 레벡도 시베리아의 강제노역소로 가게 될판이 되자 독일군 점령하의 바르샤바로 돌아와 버렸다....전선을 어떻게 넘었는 지는 몰라도 어쨌든 바르샤바 봉기때 죽었다. 이 떄문에 블라덱은 소련에 있었으면 목숨은 부지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한다. 어찌되었건 유대인 살기 참 빡빡했던 시대인건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