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에기디오 보카네그라 Egidio Boccanegra |
출생 | 미상 |
제노바 공화국 | |
사망 | 1367년 9월 |
카스티야 연합 왕국 세비야 | |
형제 | 시모네 보카네그라 |
자녀 | 암브로시오 보카네그라 |
직위 | 카스티야 해군 제독 |
[clearfix]
1. 개요
제노바 공화국 출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제독. 슬로이스 해전에 참전했으며, 뒤이어 카스티야 해군 제독으로 복무하면서 뛰어난 전공을 수차례 거두었다. 그러나 엔리케 2세와 페드로 간의 내전에서 엔리케 2세 편을 들었다가 페드로에게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2. 생애
제노바의 카피타노 델 포폴로(capitano del popolo: 인민의 대장)을 맡은 변호사이자 해군 장성이었던 기예르모 보카네그라의 후손으로, 형제 시몬 보카네그라는 제노바의 총독을 역임했다. 1340년 백년전쟁을 치르던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 고용되어 3천의 갤리선을 이끌고 200여 척에 달하는 프랑스 대함대에 가세해 슬로이스 항에 정박했다. 1340년 6월 24일 슬로이스 해전이 벌어졌을 때 프랑스 해군이 궤멸되는 와중에도 잉글랜드 선박 2척을 포획하고 슬로이스 항을 성공적으로 빠져나갔다.한편, 카스티야 해군은 알헤시라스 인근의 게타레스 해전에서 마린 왕조 해군에 참패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는 해군 재건을 위해 세비야 조선소에 새로운 갤리선을 건조하는 한편, 제노바 공화국에 해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제노바 총독 시몬 보카네그라는 제노바에 막 돌아온 에기디오에게 갤리선 12척을 맡기고 카스티야에 보내기로 했다. 1341년 8월, 에기디오는 세비야에 도착한 뒤 알폰소 11세로부터 지브롤터 해협을 경비해 마린 왕조군이 이베리아 반도로 넘어오는 걸 저지하는 임무를 맡겼다.
1342년, 알폰소 11세는 알헤시라스를 공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해 5월, 에기디오는 알폰소 11세에게 마린 술탄 아불 하산 알리가 나스르 왕조의 술탄 아불 핫자즈 유수프와 함께 최대 80척의 갤리선과 기타 전함을 세우타 서쪽 볼로네스 항구에 집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 후 에기디오는 이베리아 반도로 넘어가는 적 수송선을 요격하러 10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출진한 뒤 볼로네스 앞바다에서 12척의 마린 갤리선을 요격해 적선 4척을 불태우고 2척을 수몰시켰으며, 나머지 6척을 나포했다. 그 후 알헤시라스 공방전을 치르는 아군을 돕기 위해 게타레스 해안으로 돌아왔다.
그 후 알폰소 11세의 요청으로 파견된 카를로스 페산하( Carlos Pessanha) 휘하 포르투갈 함대와 합세한 뒤 바르바테 강 하구에 주둔하다가, 마린 함대가 볼로네스 항구에서 출발한 걸 확인하고 이를 추격해 과달메시 강 입구에서 그들을 봉쇄했다. 이후 알폰소 11세에게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격한다면 마린 함대 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고 알렸다. 알폰소 11세는 코르도바, 카르모나, 산티아고, 칼라트라바, 알칸타라 등의 기사단과 군대를 신속하게 모집한 뒤 그 쪽으로 향했다. 한편, 알헤시라스 수비대는 마린 함대의 위기를 눈치채고 지상군을 그쪽으로 파견했고, 마린 왕조 본토에서도 갤리선 13척을 추가로 파견해 아군 함대를 봉쇄한 적선들을 요격하려 했다. 에기디오는 적 함대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즉시 10척의 갤리선을 파견했고, 격렬한 해상전 끝에 적선 7척을 파괴하고 4척을 침몰시켰으며, 2척을 나포했다.
1342년 5월 27일, 마린 함대 제독은 적의 해상 봉쇄를 깨뜨리기 위해 기독교 함대를 기습 공격해 공해로 보내기로 했다. 에기디오와 페산하가 지휘하는 카스티야-제노바-포르투갈 연합 함대는 이에 맞서 과달메시 해상에서 격렬하게 항전했다. 전투 도중에 카스티야의 갤리선 3척이 거센 파도에 휘말려 해안가로 밀려났고, 해안가에 있던 마린군의 공격을 받았다. 다른 함선들이 이들을 도우려 했지만, 모두 몰살당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외에는 기독교 함대가 전반적으로 승기를 잡았고, 결국 마린 해군 제독이 전사하고 그들의 군기가 노획되었다. 가까스로 탈출한 소수의 마린 갤리선은 곧바로 세우타로 달아났다. 그 후 에기디오는 페산하와 함께 원래 있던 게타레스로 돌아와 알헤시라스를 계속 봉쇄했다.
1342년 9월 2일, 알폰소 11세는 에기디오의 공적을 인정해 팔마 델 리오 마을을 영지로 삼게 했다. 이후 에기디오는 대형 선박으로 외부 차단선을 형성하고, 소형 선박들로 내부 차단선을 세움으로써, 알헤시라스 수비대가 외부로부터 원조받는 것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또한 두 차단선 사이에 갤리선을 두고 전사들을 배치해, 구원이 필요한 곳 어디든 갈 준비를 하도록 했다. 다만 1343년 초 폭풍이 발생해 갤리선 3척과 식량을 실은 선박 2척이 전복되었다. 1343년 2월, 아불 하산 알리가 대규모 함대를 재종성해 세우타에 집중했다. 그는 알헤시라스에 직접 상륙하기엔 적의 방비가 너무 굳건하다고 판단하고, 아들 아부 아미르 압드 알라에게 함대 지휘를 맡겨 알메리아에 상륙한뒤 알헤시라스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1343년 9월, 카스티야 함대 10척이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 함대가 세우타에 집결하는 걸 발견하고 에기디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에기디오는 즉시 정찰 부대와 합세하기 위해 여러 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출진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세우타에 폭풍이 일면서 일부 함대가 난파되었고, 나머지 함선들은 벨레스 데 라 고메라로 피신했다. 얼마 후 세우타에 도착한 에기디오는 폭풍으로 파괴된 적선 잔해물만 발견했다. 그는 좌초된 갤리선 5척을 불태우는 작업에 착수했지만, 폭풍이 또다시 발생하는 바람에 함대가 흩어지는 걸지 못했다. 그 사이, 마린 함대는 10월 3일 말라가 해안으로 항해해 에스테포나에 상륙했다. 그 후 그들은 육로로 지브롤터를 거쳐 그라나다 술탄이 과다랑케 강 어귀에 설치한 숙영지에 이르렀고, 함대는 해안을 따라 나란히 진군했다. 이제 알헤시라스를 포위하고 있던 알폰소 11세의 군대는 적 구원군의 후방 급습을 걱정해야 했다. 얼마 후, 보카네그라를 따르는 제노바 선원들이 급료가 4개월치나 밀란 걸 항의하며 탈영하겠다고 위협했다. 알폰소 11세는 급히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서 돈을 지불해 제노바 선원들이 이탈하는 걸 간신히 막아냈다.
1343년 10월 말, 그라나다 술탄 유수프 1세와 알폰소 11세가 휴전 협상을 벌였다. 알폰소 11세는 휴전을 맺는데 동의했지만, 에기디오는 유수프 1세의 갤리선이 금을 싣고 그라나다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포획하려 했다. 알폰소 11세는 그가 그러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에기디오의 조카가 이끄는 선박 하나가 몰래 빠져나가 적선을 포획하는 걸 막지 못했다. 유수프 1세는 휴전 위반에 대해 항의했고, 알폰소 11세는 에기디오를 추궁하며 선장을 넘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에기디오는 그 선장은 이미 도망쳐버렸다며 발뺌했고, 그의 협력이 필요했던 알폰소 11세는 더 잇아 추궁하지 못했다.
1344년 3월 22일, 알폰소 11세의 포위를 풀지 못한 유수프 1세는 알폰소 11세에게 전령을 보내 알헤시라스를 넘길 테니 그 대가로 주민들이 떠나는 걸 허용하고 자신과 아불 하산 알리와 15년간 휴전을 맺자고 제안했다. 여기에 자신은 알폰소 11세에게 경의를 표할 의사가 있으며, 매년 12,000 도블라를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그해 3월 27일, 알폰소 11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알헤시라스에 입성했다. 에기디오는 알헤시라스 공략에 큰 공을 세워 유럽 각지에 명성을 떨쳤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9월 1일 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막대한 돈을 줄 테니 자신의 딸 조앤과 알폰소 11세의 아들 페드로의 결혼이 성사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에기디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348년 알폰소 11세의 명령에 따라 잉글랜드와 맞서는 프랑스 왕을 돕기 위해 몇 척의 배를 이끌고 프랑스로 떠나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이후 영지 관리에 힘을 기울이던 에기디오는 1358년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에게 재차 고용되어 아들 암브로시오 보카네그라와 함께 아라곤 국왕 페로 4세와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그해 8월 초, 18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과르다마르 델 세구라를 공격해 마을을 접수했지만 아라곤군 상당수가 피신한 성채를 공략하지 못했다. 그 사이 강풍이 불면서 갤리선 16척이 무력화되자 작전을 중단하고 무르시아로 철수했다. 1359년 4월 세비야에서 갤리선 32척, 로그 4척, 나오스 80척으로 구성된 대규모 함대가 조성된 뒤, 페드로는 에기디오와 함께 재차 출진해 과르다마르를 다시 공격해 이번에는 마을과 성을 공략했다. 이후 페드로는 자기를 돕기로 한 포르투갈 함대 사령관 란사로테 페산하의 지휘하에 10척의 갤리선과 합류한 후 에브로강 어귀로 향했다.
1359년 6월 9일, 카스티야-포르투갈 함대가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뒤 공격을 감행했지만, 바르셀로나 수비대와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을 뿐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카스티야 함대는 토르토사로 철수한 후 이비자를 포위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아라곤 국왕 페로 4세가 50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접근해 7월 3일 현장에 도착했다. 페드로는 이들을 요격하기로 마음먹고, 에기디오에게 해군 작전 지휘권을 넘기고 하선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페드로 왕은 곧 적의 군세가 더 있을 것을 우려해 작전을 취소하고 알리칸테로 후퇴한 뒤 카르타헤나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함대를 해산했다. 이후 페드로와 페로 4세간의 전쟁에서, 해전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소규모 접전만 벌어졌고, 에기디오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1366년, 엔리케 2세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 용병대와 함께 카스티야를 침공했다. 페드로는 부르고스에서 이들을 요격하려 했고, 에기디오도 그와 함게 있었다. 그러나 페드로는 저항을 포기하고 세비야로 도주했고, 뒤이어 수석 재무관 마르틴 야녜스에게 자신이 세비야와 알모도바르 델 리오 성에 보관하고 있던 보석과 36개의 금괴를 갤리선의 실으라고 지시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기디오는 엔리케 2세 편에 서서 그 갤리선들을 노획하기로 마음먹고, 갤리선에 보물을 싣고 출항한 야녜스를 추격한 끝에 노획했다. 그 후 엔리케 2세는 에기디오에게 우티엘의 영주권을 부여했다.
1367년 4월 3일, 페드로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베리아로 진군한 흑태자 에드워드가 나헤라 전투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엔리케 2세를 격파했다. 그 후 카스티야 국왕에 복위한 페드로는 1367년 9월 18일 에기디오를 세비야에서 체포한 뒤 마르체나 영주 후안 폰세 데 레온 및 여러 귀족과 함께 세비야의 산 프란시스코 광장에서 공개 처형하게 했다. 그 후 에기디오의 시신은 세비야에 있는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의 메히아스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수도원은 이베리아반도 전쟁 도중 프랑스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1841년 철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