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얀 마테이코 Jan Matejko | |
본명 | Jan Alojzy Matejko 얀 알로이지 마테이코 |
출생 | 1838년 6월 24일 |
크라쿠프 자유시 크라쿠프 | |
사망 | 1893년 11월 1일 (향년 55세)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크라쿠프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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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 폴란드인 |
직업 | 화가 |
1. 개요
폴란드의 화가.2. 생애 및 작품의 특징
당시 폴란드 분할로 인해 오스트리아 제국령이 된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 산하 크라쿠프에서 태어나고 죽었으며,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미술을 배운 뒤 고향인 크라쿠프에 정착해 미술을 가르쳤다. 1863년에 일어난 1월 봉기 때는 폴란드 독립군에게 자금을 기부하기도 했다.작품의 특징은 폴란드 역사를 주제로 다뤘다는 점이다. 1831년과 1848년, 1863년에 일어난 독립 운동이 실패하면서[1], 당장 독립전쟁 재개는 힘들더라도 교육을 통한 계몽으로 폴란드 민족의 힘을 길러서 훗날을 기약하자는 여론이 폴란드 유민 사회에서 대세였으며[2] 마테이코의 작품 활동도 그 연장선이었다.
3. 주요 작품 목록
작품명/연도/주제- 고라이의 디미티르와 야드비가 여왕(1850년): 오스트리아 공작 빌헬름[3]과의 파혼을 귀족회의로부터 통보받자 빌헬름을 만나러 가겠다며 도끼를 들고 문을 따려는 야드비가를 만류하는 디미티르
- 레이탄과 폴란드의 몰락(1866년): 제1차 폴란드 분할
- 루블린 연합(18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수립
- 프스코프에 온 스테판 바토리(1872년): 스테판 바토리 왕의 프스코프 원정
- 코페르니쿠스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873년): 코페르니쿠스
- 그룬발트 전투(1878년): 그룬발트 전투
- 얀 소비에스키의 빈 도달(1883년):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빈에 도착한 얀 3세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
- 5월 3일 헌법(1891년): 1791년에 제정된 구 연방의 5월 3일 헌법 100주년 기념작
-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4]에게 압송되어 바르샤바 세임의 지그문트 3세 바사에게 무릎 꿇은 바실리 4세(1892년)
[1] 러시아령에서 일어난 11월 봉기 때는 독립군의 주축인 귀족 장교들이 토지개혁에 무관심해서 당시 폴란드인의 대다수를 차지한 농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진압됐고, 1월 봉기 때는 크림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이나 프랑스의 도움을 못 받은 상태에서 러시아군에 진압됐다. 프로이센 왕국령 포젠에서 일어난 1848년 대폴란드 봉기는 프로이센 왕국군에게 진압됐다.[2] 1월 봉기 실패 이후에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는 따로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3] 합스부르크 가문의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의 손자. 야드비가와의 파혼 후 나폴리 왕국의 여왕 조반나 2세와 결혼했다.[4] Stanisław Żółkiewski(1547~1620). 위에 서술된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외증조부이다. 폴란드 대 헤트만이자 외교관으로 1610년 클루쉬노 전투에서 후사리아 기병대를 앞세워 루스-스웨덴 연합군을 격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