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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파볼리니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알레산드로 파볼리니
Alessandro Pavolini
파일:Alessandro_Pavolini_(cropped).jpg
출생 1903년 9월 27일
이탈리아 왕국 피렌체
사망 1945년 4월 28일 (향년 41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롬바르디아 코모 동고
국적
[[이탈리아 왕국|]][[틀:국기|]][[틀:국기|]] →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2cm
직업 정치인, 언론인, 수필가
학력 피렌체 대학 법학과
로마 대학 정치학과
최종 당적 공화 파시스트당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정치인, 언론인, 수필가.

2. 생애

1903년 9월 27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대학 교수[1]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볼리니는 꽤 어린 나이에[2] 아버지가 재직하던 피렌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이후 얼마 안 가서 로마 대학에 진학해 정치학을 전공하였다. 정치학까지 전공한 후 로마에서 머물던 중이던 1920년, 피렌체의 파시스트당에 입당하며, 검은 셔츠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1922년이 되자 로마진군에 참가했다. 그렇게 하며 선전물 편찬에도 협조하였다.

1924년에 파볼리니는 법학과의 사회학자가 되었고, 당원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교양 있고, 예의바르고, 젊으며 조잡하지 않고, 선동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 파볼리니는 문학 비평서인 Solaria의 출간에 협조하였다. 1927년에는 플로렌스 지구의 부 비서로 명해져 1929년까지 활동하며, 1929년부터 플로렌스 비서로 승진하였다. 또한 문화 주간지인 Il Bargello의 설립자가 되었는데, 정치에 무관심한 학자들 중 반파시스트 인물들이 와서 함께 잡지를 운영하자고 했다.[3] 파볼리니는 국제 클래식 음악제를 만들어 피렌체에서 개최하게 하였는데, 이 음악제는 지금에도 이어진다고 하며 예술가들의 박람회인 Ponte Vecchio도 만들었다.

1932년에는 로마로 이사하여 본격적 정치 상승의 길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4년, 비서 업무를 마친 후 중의원에 선출되며, 교수와 예술가, 문학가들의 파시스트 동맹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에는 동맹의 회장에서 물러나고, 파볼리니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문화를 총괄하고 파시스트 선전을 하는 부서인 대중 문화부의 장관에 명해져 1943년까지 이 직무를 다하여 이탈리아의 문화와 예술을 통제하였다.

파볼리니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극우파 언론인, 수필가로서도 활동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32년에 이탈리아-아비시니아 전쟁에 참전해 갈레아초 치아노가 이끄는 비행대대의 중대장으로 있기도 하였다. 그 후 1939년에 무솔리니 문화부 장관에 임명되어 1943년 1월까지 일하였다.

1945년 4월 28일, 롬바르디아 코모 동고에서 반 파시스트 단원들에게 체포되었고, 파볼리니는 결국 총살당해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클라라 페타치와 아킬레 스타라체[4]의 사이에 시신이 부패할 때까지 거꾸로 매달렸다.

3. 여담

반 무솔리니 성향의 정치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적이 있다.[5]

[1] 아버지가 시인이자 인도의 예술과 문학을 연구하는 피렌체 대학 교수였다.[2] 파시스트 당에 입당해 정치에 입문할 당시 17살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조기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3] 이렇게 학자풍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파볼리니가 학구적이고, 문화적인 파시즘을 이끌어가려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4] 1936년에 발발한 샤이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업적이 있는 장군이었으나 무솔리니가 신이다 라는 발언을 한 파시스트의 왕당파 일원이며, 파볼리니가 총살당한 익일에 그도 총살당해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다만 스타라체는 파볼리니가 매달리고 바로 다음날 총살형이 집행되어 파볼리니의 옆에 매달렸다.[5] 1944년 독일에서 생포되어 이탈리아로 송환된 반 무솔리니 성향의 정치인 6명에게 모조리 사형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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