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18 22:46:43

안드레아 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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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노바 공화국의 해군 제독
1.1. 개요1.2. 생애1.3. 여담1.4. 매체에서
2. 침몰한 여객선3. 1문단의 인물에서 이름을 따온 군함(안드레아 도리아급)

1. 제노바 공화국의 해군 제독

<colbgcolor=#000,#000><colcolor=#fff,#ddd> 안드레아 도리아
Andrea Doria
파일:Andrea_Doria.jpg
출생 1466년 11월 30일
제노바 공화국 오넬리아
사망 1560년 11월 25일 (향년 93세)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국적 파일:제노바 시기.svg 제노바 공화국
직업 군인

1.1. 개요

제노바 공화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제노바의 명문가 중 하나인 도리아 가문 출신이다. 자체적인 해군을 이끌고 용병대장으로 활약하였고, 당대 최고의 해군 사령관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카를 5세에게 고용되어 오스만 제국 해군 소속 바르바리 해적들과 싸워얻은 전공들이 유명하며, 하이레딘 파샤와 경쟁했다. 오스만 제국에 맞선 공으로 카를 5세에게서 멜피 대공 작위를 받았다.

또한 제노바로 돌아와 정치가로서 헌법을 개정하고 공화국의 구습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도제 자리에 올라달라는 요청은 거절하였지만 "종신감찰관"이라는 지위를 받아 제노바 의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했다. 그리고 공화국으로부터 "Liberator et Pater Patriae(해방자이자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1.2. 생애

안드레아 도리아는 1466년 11월 30일 제노바 공화국 오넬리아에서 태어났다. 도리아는 1485년 로마로 갔는데 그곳에서 교황 경비대를 지휘하던 니콜라 도리아의 인맥으로 교황령의 장교직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모시던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사망하자 그만두고 용병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1514년 브릴리아 요새 사건은 안드레아 도리아를 제노바의 대표적 콘도티에로[1]로 각인시킨 계기였는데, 프랑스가 지배하던 제노바에서 그는 항구를 장악하던 프랑스 요새를 파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40대 이후 본격적으로 해전에 나선 도리아는 자신 소유의 갤리선으로 리구리아해와 티레니아해에서 바르바리 해적을 격퇴하며 명성을 쌓았고, 프랑수아 1세 치하에서도 제노바 함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 간의 패권 경쟁 속에서 제노바는 여러 차례 점령과 약탈을 겪었고,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가 결정적으로 패배하자 도리아는 프랑스 정부와 결별했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와 계약을 맺어 교황 함대를 지휘하며 코냑 동맹에 참여했으나, 지상전의 실패와 1527년 사코 디 로마로 교황의 계획은 붕괴되었다. 도리아는 해전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고도 동맹군의 내분과 육상 패배로 성과를 살리지 못했으며, 그의 해군적 성공은 반복적으로 국제 정치와 육상 전쟁의 패배에 의해 좌절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몰락 이후 안드레아 도리아는 다시 프랑수아 1세를 섬기며 1527년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제노바에서 제국·스페인 세력을 축출했다. 그러나 사보나 반환 문제와 나폴리 원정에서의 배제 등으로 프랑스와의 동맹은 균열을 보였고, 제노바를 사실상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프랑스의 태도에 반해 카를 5세는 제노바의 자치와 이익을 보장했다. 도리아는 결국 1528년 합스부르크와 동맹을 전환해 카를 5세에게 함대를 제공하는 대가로 제노바 공화국의 완전한 독립과 특권을 확보했고, 프랑스 수비대는 철수했다. 그는 권좌 제안을 거절하며 실권은 유지한 채 물러나는 전략을 택했고, 사보나를 무력으로 제압해 자치 시도를 봉쇄했다. 1528년 새 헌법으로 제노바는 귀족 공화국이 되었으며, 도리아는 제도적으로는 뒤에 물러나 있었지만 핵심 감시기구의 종신 수장으로서 국가 운영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1530년대 이후에도 제노바 정치의 중심에 남았고, 1531년 카를 5세로부터 황금양모훈장과 멜피 공작 작위를 받아 제국 내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산 마테오 교회를 중심으로 한 도리아 가문의 권력 기반과 파솔로의 궁전을 통해 상징적·실질적 권위를 유지했고, 프랑스 위협에 대비해 제노바의 신식 성곽 건설을 후원했다. 카를 5세를 섬기며 오스만 제국과 싸워 에게해와 그리스 일대에서 원정을 벌였고, 1535년 튀니스를 점령했으나 바르바로사는 놓쳤다.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는 베네치아와 교황으로부터 소극적 태도로 비판받았지만 이는 전략적 이해관계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는 드라구트 레이스를 포로로 잡아 노예로 삼았다가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고, 1541년 알제 원정에서는 악천후 속에서도 함대를 보존해 참패를 막았다. 1547년에는 피에스키 가문의 쿠데타를 진압했으나 조카 지아네티노가 사망했고, 이후 가혹한 보복으로 경쟁 가문을 정치적으로 제거했다. 연이은 음모 속에서 제노바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황제의 직접 지배 요구를 거부하며 가리베토라 불리는 헌법 개정을 단행해 구귀족 중심의 체제를 강화했다. 80대 이후에도 해적 토벌과 프랑스와의 전쟁, 코르시카 반란 진압에 관여했고, 해군 지휘권을 양자에게 넘겼다. 카를 5세의 퇴위 이후에도 그는 제국 편에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1560년 제르바 원정은 지휘 실패로 대패하며 그의 말년을 흐리게 했다. 이후 안드레아 도리아는 1560년 11월 25일에 사망했다.

1.3. 여담

  • 아래의 함선들은 모두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또한 소행성 중 2175 안드레아 도리아가 그의 이름을 땄다.

1.4. 매체에서

2. 침몰한 여객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안드레아 도리아호 침몰사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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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3. 1문단의 인물에서 이름을 따온 군함(안드레아 도리아급)

3.1. 제1차 세계 대전 /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이탈리아 왕립 해군전함

카이오 두일리오급 전함 문서 참조.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안드레아 도리아급이나 동형함인 카이오 두일리오가 취역 시점이 빠른 관계로 리토리오급의 사례에 따라 카이오 두일리오급으로 항목이 이동되었다.

3.1.1. 전함소녀의 캐릭터

위의 카이오 두일리오급 전함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 안드레아 도리아(전함소녀) 참조.

3.1.2. 벽람항로의 캐릭터

위의 카이오 두일리오급 전함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 안드레아 도리아(벽람항로) 참조.

3.2. 이탈리아군의 헬리콥터 순양함

안드레아 도리아급 헬기순양함 문서 참고

3.3. 이탈리아군구축함

호라이즌급 문서 참고.

[1]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중소도시 국가들이 고용했던 용병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