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9년[2] 12월 6일 |
전라북도 임피군 하북면 입점리 (現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 입점마을) | |
사망 | 1939년 9월 1일[3] (향년 39세) |
전라북도 옥구군 (現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 |
본관 | 청송 심씨[4]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82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9년 12월 6일 전라북도 임피군 하북면 입점리(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 입점마을)에서 아버지 심제섭(沈悌燮, 1880. 6. 12 ~ 1930. 9. 6)과 어머니 풍천 임씨(豊川 任氏, 1880. 11. 6 ~ 1920. 11. 7)[5]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고향의 임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군산부(현 군산시)에 있던 사립 구암영명학교(龜岩永明學校, 군산제일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해 2년간 다니다가 중퇴했다. 이후 상경해 대동인쇄주식회사에서 근무하면서 경성부기학교(京城簿記學校)를 다녔다. 1925년 5월, 부기학을 연구할 목적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츠카하라(塚原)라는 자가 경영하던 슌요도(春陽堂)인쇄소에 고용되었으나, 인쇄소가 폐쇄되어 1927년 9월부터는 일본인 가나자와(金澤)가 경영하는 인쇄소 도세이샤(同聲社)에 고용되어 문선공(文選工:인쇄소에서 활자를 골라 뽑는 일을 하는 직공)으로 일했다.
그는 이곳에서 사상에 관한 문서를 출판하는 일을 주로 했는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조선 독립을 실현하는 수단으로는 먼저 노동자·농민의 조직체를 결성하고 그 단결력으로써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기에 이르렀다.
1927년 11월 말 고향 옥구군의 후타바샤(二葉社)농장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그해 12월 그는 일본 도쿄에서 「친애하는 동향 제군에게 격함」이라는 제목으로, '자본주의제도 아래 현대사회의 유산자 생활의 호사로움과 노동자 생활의 궁핍을 비교하고 그것이 착취와 압박을 능사로 하는 제국주의의 모순적 소산물로 단정'하면서 항일의식 및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격문을 작성하고 300매 가량을 인쇄하였다. 특히 이 글은 당시 군산부와 논산군 강경면, 논산군 등 지역에 있는 비옥한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던 가와사키(川崎)·오쿠라(大倉)·동양척식주식회사·부지(不二)흥업주식회사·후타바샤 등 자본가에 항거하고, 소작인들에게는 농민조합을 조직해 철저히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이 격문을 인쇄해 조선에 거주하던 23촌 지간의 족증조(族曾祖) 심호택(沈鎬澤, 1885 ~ 1956. 6. 4), 14촌 지간의 족조 심상악(沈相岳, 1900. 5. 6 ~ 1984. 10. 17)[6]을 비롯해, 신현국(申鉉局)·심상호(沈相鎬)·황봉규(黃琫珪)에게도 발송했고, 신현국은 특히 이 격문을 수령해 당시 후타바샤농장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와 관련된 농민들에게도 배부했다.
1928년 1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김병우(金柄祐)에게 신간회를 중심으로 역량을 모아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독려하며 항일운동의 방법을 제시한 문서를 발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 9월 6일 아버지 심제섭이 별세하자 귀향했다가 체포되었고, 미결수로 1년여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1931년 8월 19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39년 9월 1일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별세했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 오봉산(五峰山)에 안장되었다가, 2007년 5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