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가타케의 칠본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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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賤ヶ岳の七本槍(しずがたけのしちほんやり/시즈가타케노 시치혼야리).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사후 후계자를 놓고 시바타 카츠이에와 시즈가타케 전투(1582년)를 벌일 때, 자신의 시종이자 경호를 담당하기 위해 가까이 있던 근위 시동들에게 공을 세우라고 출전시킨 부하 7명이며 줄여서 칠본창(七本[1]槍)이라고 칭한다.
'칠본창'이란 명칭은 시즈가타케 전투가 벌어진 당대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은 말이며 시즈가타케 전투가 끝나고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만들어진 말이다. 본격적으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란 말이 널리 확산된 것도 에도 시대의 일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다케다 24장, 우에스기 25장, 도쿠가와 4천왕, 구로다 24기 등과 같이 장수나 무사 몇 명을 묶어서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호칭을 만드는 캐릭터(?) 어필이 아주 흔했다.[2]
칠본창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7명도 아니었다. 여러 기록에서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들의 숫자를 다르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미츠나리와 오타니 요시츠구가 칠본창이라 불리는 이들과 함께 적힌 기록도 있다. 게다가 이들은 시동이라기엔 나이가 많았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요시아키라는 20대 초반이었지만,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30줄에 가까웠고 히라노 나가야스는 20대 중반이었다. 또한 칠본창이라 하기에는 마사노리, 기요마사, 요시아키라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의 영지 규모가 너무 적었다. 히라노 나가야스는 고작 5천석에 그쳤고, 카타키리 카즈모토도 3만석, 카스야 타케노리는 1만석이었다. 와키자카의 경우, 와키자카가 3만석의 영주였을 때, 기요마사와 마사노리의 영지는 10만석이 넘었다.
당사자들의 경우,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와키자카와 함께 칠본창으로 불린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와키자카 따위랑 동급 취급이라니!"라고 불쾌해 했다는 일화, 가토 기요마사도 칠본창이란 호칭을 불쾌해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국에서 유명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당대 일본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잘 보여주는 부분.
2. 활동
임진왜란 때는 가토 기요마사[3]의 활약과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 등에서 활동을 보이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다만 두 전투의 경우 조선군의 상황이 말이 아니었기에 별것 아닌 것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특히 두 전투의 주역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가토 요시아키 둘 다 이순신에게 당함으로써 더욱 과소평가되기도 하지만 용인 전투의 패배로 한양 탈환은 1여년이나 더 후로 마루어지는 동시에 조선의 남부지방 장악력이 공중으로 떠버렸고, 칠천량 해전으로 수군이 괴멸 상태에 빠지고 정말로 멸망 직전까지 갔다는 것을 보면 결코 폄하할 수 없는 이들의 대성과이다. 조선으로선 천만다행으로 두 전투 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칠본창의 우두머리 격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임진왜란 초기 제5군을 이끌고 가토의 2군이 함경도 쪽으로 진출할 때 후방을 맡아 2군을 지원하는가 하면, 전쟁 와중에 경상도와 충청도 등을 돌아다니며 (전국시대 국내전 관행대로) 약탈, 학살 등 온갖 횡포들을 부리다가 경상북도 영천에서 권응수 장군과 싸운 전투에서 패해 영천성을 빼앗겼다. 이후 별 다른 큰 소득을 얻지 못하다가 명나라와 왜가 강화를 맺자 일본으로 돌아갔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에 출병했던 가토 기요마사와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달리 후쿠시마는 조선에 다시 출병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 공격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오와리국 영주 지위를 받았다.
말년은 대부분 좋지 않았다. 전후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서 싸우는 과정에서 히데요시의 충복들이었던 만큼 일부는 서군에 합류했다 패망했고, 동군으로 합류한 인물들도 단지 미츠나리가 싫어서 미츠나리를 제거할 목적으로 합류한 거라 전후에도 노골적인 親도요토미 행보를 보인 탓에 숙청[4]당했기 때문이다. 칠본창 멤버 중 와키자카 야스하루만 제대로 살아남았는데 원래부터 親도쿠가와 파벌이었으나 미츠나리 측이 와키자카를 무리해서 붙잡은 경우라 가능했다.[5][6]
3. 칠본창 명단
근위시동의 우두머리이자 연장자로 히데요시의 조카뻘인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는 고쿠다카 5천 석, 나머지는 각각 3천 석이 주어졌다. 아무리 큰 무공을 세웠다고 해도 첫 출전치고는 파격적인 논공행상이었다. 히데요시를 오랫동안 섬겼고 이 전투에도 참전한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3500석에서 3백 석을 더해 3800석을 받았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政則)
-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또는 카토 요시아키라.
-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且元)
-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 카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 또는 카스야 사네오(加須屋真雄)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전국무쌍 시리즈에서는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정식무장이지만 나머지는 클론 무장.태합입지전 5에선 카스야 사네오를 제외한 7명이 모두 등장한다. 무력쪽에 모두 특화되어있으나 마사노리, 기요마사, 요시아키 정도만 전장에서 쓸 만하고 야스하루는 미묘, 나머지는 그냥 쿠소 수준이다.
한국 사극에서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가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가토 요시아키가 등장한다. 하지만 작중 취급이 잡몹 취급에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 전투 이후 공기화.
그나마 징비록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주역 인물 중 하나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조연급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요시아키가 지나가는 말로 언급됨으로써 등장하였다. 물론 가토 기요마사는 잔혹한 개그캐릭터가 되었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역시나 야라레메카신세다.
일본 사극에서는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와 세키가하라가 나오면 반드시 등장한다. 아무래도 말년이 그런지라 주인공이 되긴 힘들고,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비중이 달라진다. 다른 칠본창은 듣보잡.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예외로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도쿠가와 사이의 중재를 맡아서 오사카 전투의 비중이 커질수록 그의 비중도 커진다.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의 경우 히데요리의 측근으로 가토, 후쿠시마보다 비중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역사대로 도요토미측에서 버림받고 이에야스에게 협조했고, 히데요리가 죽은 후 따라 죽는다.
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는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등장하며 가타키리 가츠모토와 히라노 나가야스 또한 비중은 높지 않지만 쭉 등장한다. 히라노 나가야스는 히데요시의 경호와 오사카의 치안을 맡는 역할로, 가타키리 가츠모토는 외교관의 역할로 등장한다. 히라노야 그냥 가볍게 출연하는 느낌이지만 가타키리는 계속 등장한다. 물론 무게감은 가토, 후쿠시마와 비교할 수 없다. 도쿠가와 삼대와 달리 무게감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도요토미에 대한 충성심은 같다.
인풍전대 허리케인저의 적 세력인 우주인군 쟈칸쟈의 간부진들의 직위이자 칭호인 ~의 창의 모티브가 되었다. 아마 국내 기준으로 볼 때 나름 생소한 칠본창을 모티브로 한 대중매체중에선 제일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예외적인 경우를 꼽자면 라이트노벨
세키로: 섀도우 다이 트와이스에서는 이것이 모티브가 되어 아시나라는 가상의 국가의 칠본창이 존재한다. 게임 내에서는 야마우치 시키부 토시카츠, 오니와 슈메 마사츠구 2명을 만날 수 있으며, 모두 플레이어들을 한 두 방에 삭제시킬 정도로 강력한 중간보스로 유명하다. 칠본창은 지금의 아시나가 세워지는 데 큰 공로를 세웠으나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인왕 2에서는 딱히 비중은 없고 도키치로와 최종결전에서 중간 보스로 하나씩 등장한다. 그래도 나름 유명한 무장이라 전용 세트가 존재한다.
명량과 한산: 용의 출현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가토 요시아키가 등장했다. 물론 명량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순신을 두려워하며 전투에 소극적으로 나서다가 전투 종반에 충파에 깨져나가는 역에 가토 요시아키는 그냥 지나가던 병풍 신세다.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각각 최종보스와 조역급 악역으로 등장한다. 물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준비란 준비 다 해놓고 신나게 털려버렸고, 가토 요시아키는 특유의 오징어 투구는 구현되었으나 와키자카와 사이가 나쁘다는 동인설정에, 결전병기였던 텟코센을 와키자카의 기습에 털린 뒤 쓸쓸히 돌아가는 아낌없이 퍼주는 호구가 되었다.
[1] 本은 일본어로 막대기 형태의 물체를 세는 단위다.[2] 일본만이 아니라 전근대 동아시아 문화가 다 그렇듯 중국에서부터 시작됐다. 후한의 운대 28장, 당나라의 능연각 24공신, 원나라의 사준사구, 삼국지의 오호대장군, 오자양장, 강동십이호신 등과 여말선초의 두문동 72현 전설, 사육신과 생육신 같은 것이 예시[3] 그나마도 의병장 정문부와 곽재우에게 크게 패했고, 임진왜란 육군 마지막 전투인 울산성 전투에서는 울산성을 방어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조명연합군의 울산성 고립 전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다.[4] 물론 워낙 한가닥 하던 인물들이고, 동군 편을 들어 승리로 이끈 전과를 인정받아 당사자를 대놓고 숙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칠본창 생전부터 알음알음 조금씩 힘을 빼놓다가 칠본창 본인들이 죽고 그 후손들에게는 아예 대놓고 개역을 해서 가문을 몰락하게 만들었다. 이들에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승리는 장기적 차원에서 피로스의 승리가 된 셈이다.[5] 원래 동군에 합류할 계획이었으나 길이 꼬이는 바람에 서군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리고 전투 중에 창을 거꾸로 잡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6] 특히 가장 친도요토미 편이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같은 경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억류했고 원래 오사카 성에 있던 식량을 써도 좋다고 편지를 보낸 것을 빌미로 개역을 당했다. 원래 고니시의 영지까지 합쳐서 고쿠다카 50만석을 보유한 가토 기요마사의 경우도 생전에는 숙청하지 못했지만 그가 사망한 뒤에는 이런저런 핑계로 결국 마찬가지로 개역당했다.[7] 쿠로다 칸베에도 이중습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