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15 23:51:32

수정사

水精寺

1. 개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외도 1동에 위치해 있었던 고려 시대의 사찰. 제주 해양올레 17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1. 개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정사가 도근천 서쪽 언덕에 있었다고 적고 건립 시기는 적지 않았으며, <탐라기년(耽羅紀年)>(1915년)에는 수정사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26년(1300년) 원나라 황후의 명에 따라 세워진 사찰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는 그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을 원나라 세력이 기존의 사찰을 헐고 대대적으로 중창했을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都近川頹制水坊 도근천 제방이 터지면
水精寺裏亦滄浪 수정사 앞은 물바다 되리니
上房此夜藏仙子 상방엔 오늘밤 선녀를 숨겨두었으니
社主還爲黃帽郞 주지는 도리어 황모랑(黃帽郞)[1]이 되었네
이제현, <도근천곡>[2]

수정사에 가까운 도근천의 경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공천(朝貢川)이라는 말이 제주 사투리로 발음되다 보니 도근천이니 조공천이니 수정천이니 하는 말로 불렸다고 설명하고 있는데[3] 조공천이라는 이름에서 보이듯 항구라는 경제적 거점 가까이 위치한 종교시설로써 수정사는 번영을 누렸으며, 이제현이 도근천곡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고려 시대 말기 불교의 부패와 타락상도 버젓이 드러났던 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사에는 공민왕충혜왕의 서자 석기[4]를 제주로 보내 수정사에 머무르게 했는데 석기는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5]

1998년 6월부터 10월, 2000년 2월부터 6월에 걸쳐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수정사터를 발굴하고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는데, 발굴 조사 결과 사찰의 규모는 남북 120∼150미터 동서 50∼60미터 정도이며 12동의 건물지와 도로와 보도, 탑지, 석등지, 담장지, 폐와무지, 적석유구 등이 확인되었고, 특히 '2월수정선사'(二月修正禪師), '목사 겸 만호'(牧使兼萬戶)라고 쓰여진 명문기와와 6∼8엽 연판문이 새겨진 숫막새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수정사는 적어도 12세기경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지만 18세기 이후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출토유물 가운데 고려 시대의 '인왕상음각탑면석'은 인왕의 표현에 있어 음각기법을 도입한 드문 예로 미술사적인 가치와 함께 제주도 최고(最古)의 회화자료로 평가되었다.# 수정사터에서 나온 석탑 부재는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태종실록》에는 태종 8년(1408년) 제주목사가 올린 글에 당시 제주 수정사와 법화사에 각각 130인과 280인의 노비가 속해 있었고, 조선 조정은 이 가운데 30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환속시켰다고 한다. 중종 14년(1519년) 기묘사화로 제주도에 유배된 김정(金淨)은 현지에서 수정사를 중수하려는 불자 고근손의 요청으로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都近川水靜寺重修勸文)>을 써 주었는데 여기서 김정은 "원대부터 있던 고찰로써 남은 것은 도근천 수정사 뿐이다"고 적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 34년(1601년) 당시 어사 김상헌이 제주에 왔다가 도근천 가까운 곳에서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을 요량으로 수정사에 들렀는데, 거기에는 비바람도 못 가릴 초가집 몇 채밖에 없었고, 거주하는 승려들도 모두 부인을 거느려 자식을 두고 있어서 좁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숙종 20년(1694년) 제주목사 이익태가 연무정을 중수하기 위해 수정사의 재목을 가져다 썼고, 이로써 수정사는 완전히 폐사되어 사라져버렸다.#

2000년 발굴 당시 조사단의 입장은 현재의 상태로는 외도동 수정사지의 전체를 복원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지만 노출된 유구와 출토된 유물의 가치는 매우 높아, "발굴지만이라도 원상을 복토하여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자신이 수정사 복원에 나서겠다는 뜻있는 스님도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절터에 이미 주택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데다 전체적인 사찰 유구가 원형 보전보다는 이전해서 보전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조사단 의견을 들어 수정사터 발굴 유구나 유물은 인근지역에 옮기고 해당 절터에는 당초 계획대로 동서를 가르는 폭 12m의 도로를 개설해버렸다. 부지 위에는 제주성지교회(!!!)가 들어 서기도 했다.#


[1] 뱃사공을 가리킨다.[2] 이 노래를 짓게 된 계기에 대해, 어떤 고관이 봉지련이라는 늙은 기생에게 "너네는 돈 많은 중이 부르면 바로 오면서 사대부(士大夫)가 부르면 왜 그렇게 꾸물거리냐?" 라고 물었더니 봉지련이 "요새 사대부님들도 돈 많은 장사꾼 딸이나 그 집 계집종 데려다가 두집 살림도 하고 첩질도 하시는데, 우리가 중과 속인을 가리다가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살 걸요"라고 받아쳤다고 소개하고 있다.[3] 지금도 도근천이라는 하천 이름은 존재하지만 조선 시대의 도근천과는 구별되는 다른 하천이라는 지적도 있다.#[4] 충혜왕의 후궁이었던 은천옹주 임씨 소생으로 공민왕에게는 조카인 동시에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존재이기도 했다.[5] 라는 것은 물론 페이크고 수정사에 가둬둔 것인데 어떻게 제주도를 빠져나와 도망쳐서 공민왕이 시해당한 이듬해까지 살아있다가 결국 이인임 등에게 잡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