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28 17:21:06

수봉


<colbgcolor=#373a3c><colcolor=#ffffff> 통정대부(通政大夫)
김수봉
金守奉 | Kim Su-bong
출생 1624년(인조 2년) (추정)[1]
경상도 단성현 도산면
(現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망 1717년 이전
국적 조선
신분 노비(사노비) → 양인양반(납속)
관직 납속통정대부(納粟通政大夫)
본관 무관(無貫) → 김해 김씨[2]안동 김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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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73a3c><colcolor=#ffffff> 이름 수봉(守奉) → 김수봉(金守奉)
직업 농부(외거노비) → 지주
거주지 단성현 도산면(심정량 가문 근처)
주요 활동 납속을 통한 면천, 성관(姓貫) 획득
가족 부친 - 갓복(㖙福, →어련)
모친 - 숙향(淑香)[4]
처가 장인 - 이금금(李金金)[5]
장모 - 애춘(愛春)[6]
배우자 자목(自木)
자녀 장남 - 김흥발(金興發)[7]
차남 - 김갓동(金㖙同)
삼남 - 김학(金鶴)
장녀 - 김이월(金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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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배경2.2. 신분 상승과 성관 획득2.3. 본관 변경
3. 직역 상승4. 연구의 의의5. 같이 보기

1. 개요

조선 숙종 때의 노비 출신 양인. 경상남도 산청군에 해당되는 단성현 출신이다.

주인집과 떨어져 독립된 경제 생활을 하는 외거노비로서 부를 축적하여, 멀리 떨어진 주인집 농토에서 농사짓고 세경을 바치다가 나중에는 납속을 통해 면천도 하고, 성과 본관도 얻게 되었다. 수봉 이후에도 그 후손들의 끊임없는 이사, 직역 상승, 본관 변경 등 다양한 노력 끝에 약 2세기에 걸쳐 수봉의 후손들은 김해 김씨와, 일부는 안동 김씨로 편입하는 데 성공한다.

2. 생애

2.1. 배경

수봉은 1678년 호적대장 중 심정량(沈廷亮) 가문의 호적에 노비로 기록되어 처음으로 존재가 확인된다. 이 호적에는 또 수봉의 탄생년도를 1624년이라 기재했고, 직역은 공란이다. 아버지는 갓복(㖙福), 어머니는 숙향(淑香)이다. 외조부는 단문(丹文)으로, 갓복과 숙향, 단문 모두 사노비이고 직역란이 비어있으며 그 외의 조상은 알 수 없다.[8] 수봉의 부인은 자목, 장인은 이금금(李金金)으로, 역시 사노비이지만 영동 이씨라는 성과 본관이 있었다. 장모는 애춘으로, 애춘의 아버지는 김복으로 김씨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수봉은 주인 심정량 집에 속하지 않고, 따로 떨어져서 외부에 있는 땅에서 농사를 짓고, 그 농사로 얻은 대가의 일부를 주인에게 바치는 외거 노비 신분을 획득했다. 당시 양반들은 효율적인 노비 관리를 위해 능력이 되거나 거주지가 먼 노비들에게 신공(몸값)을 받는 대신 거주 이전을 비교적 자유롭게 허용해주기도 했는데, 여기서 그가 신분 세탁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9]

2.2. 신분 상승과 성관 획득

1717년의 단성현 관아의 호적에는 김수봉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성씨인 김씨와 본관인 김해만 붙었지 이름이 그와 같았다. 을병대기근(1695~1696) 등 자연재해로 국가 재정이 어려울 때 납속(納粟)하여 곡식을 바치고 노비 신분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이며, 이 즈음 성과 본관을 가졌다.

이때 수봉이 김해 김씨를 선택한 것은 전략적인 이유가 컸다. 당시 그가 살던 단성현 도산면 지역에는 김해 김씨 인구는 많았으나 양반이나 중인은 단 1호도 없었고 모두 평민이나 노비였다. 즉, 지역 내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양반들의 견제가 없어 진입 장벽이 낮은 성씨를 선택하여 자연스럽게 평민층에 섞여 들어간 것이다.

나중에는 추가로 쌀과 곡식을 더 바치고 납속통정대부(納粟通政大夫) 공명첩 임명장을 사들였다. 통정대부는 정3품에 해당하는 품계이나 실제 관직이 없는 명예직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그가 상당한 재력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1717년 그의 아들 김흥발의 호적에는 할아버지, 증조부, 외할아버지의 직역을 기재하지 않았었다. 3년 뒤인 1720년 호적대장에서 김흥발은 할아버지, 증조부를 정병(正兵)으로 적고 외할아버지도 평민에 해당하는 양인(良人)이라 썼다. 그리고 종2품에 해당되는 가선대부 품계를 얻는데 성공한다. 재산을 더 꾸준히 모아서 김흥발은 자기 재산을 이용해 자신의 아들들, 수봉에게는 손자가 되는 이들을 서원 원생으로 집어넣었다. 유생 타이틀을 얻은 것이다.

2.3. 본관 변경

수봉의 후손들은 김해 김씨에 편입되어 생활했다. 그러다가 수봉의 4대손 김성종은 산청군 단성면이나 근처 도산면이 아닌 신등면으로 이사가고 본관을 안동 김씨로 바꿨다. 1825년 호적에서 그는 본관을 안동으로 바꾸고 직역을 '학생(學生)'으로 기재하며 신분 상승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가 이주한 신등면 단계촌은 양반들의 위세가 강한 곳이라 정착에 실패하고 다시 도산면으로 돌아오며 본관을 김해로 환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봉의 다른 4대손 김종원 등 다른 친족들이 다시 본관 변경을 시도했다.

이들이 하필 안동 김씨를 선택한 배경에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1. 17세기 말 도산면에는 안동 김씨 양반들이 꽤 살았으나, 19세기 중엽(1831년경)에는 단 1호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2. 따라서 안동 김씨를 사칭하더라도 지역 사회의 저항이나 검증을 피하기 쉬웠다.
  3. 동시에 당시 중앙 정계에서는 안동 김씨가 세도 정치로 득세하고 있었기에, 권위 있는 가문을 빌려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결국 1849년경에는 수봉의 후손 대다수가 안동 김씨로 호적에 등재되며, 지역 내의 안동 김씨를 대표하는 가문으로 자리 잡게 된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고 멀리 이사 간다면 충분히 성씨와 본관을 마음대로 관아에 신고해서 바꿀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연암 박지원이나 동평위 정재륜 등도 그렇게 신분을 세탁한 노비가 명문가 서자집의 딸, 하급 무관의 딸과 결혼해서 옛 주인을 만났다가, 비밀을 지켜주는 댓가로 엄청난 돈을 주었다는 이야기들을 소문으로 전해듣고 기록으로 남긴 바 있다. 그것이 한 학자의 끈질긴 연구 결과 사실로 입증된 셈이기도 하다.

3. 직역 상승

수봉의 후손들이 단순히 족보만 위조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약 200년에 걸쳐 경제력을 바탕으로 실제 양반들의 삶을 모방하며 서서히 체제 내로 진입했다.

수봉의 아들들은 어영청, 금위영 등 군역을 부담하는 평민이었다. 그러나 손자 대에 이르러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역을 면제받거나 가벼운 역으로 바꾸었고, 증손자 대에는 '업유(業儒)', '업무(業武)' 등 중간 계층의 직역을 획득했다. 19세기 중엽(5~6세손)에 이르러서는 후손 대다수가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유학(幼學) 직역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후손들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부계 중심의 가족 질서를 모방했다. 특히 가계 계승을 위해 조카를 양자로 들이는 입양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이는 노동력 확보가 목적이던 평민들의 양자 입양과는 달리, 철저히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양반식 입양이었다.

결국 이들은 저항이 아닌 모방을 통해, 양반과 구분되지 않는 외형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rowcolor=#fff> 세대 대표 인물 당시 직역 (신분) 주요 변화 및 활동
1세대 김수봉 노비
(사노비)
주인집과 따로 사는 외거노비로 경제력 축적
양인
(납속
통정대부)
17세기 말 납속을 통해 면천. 김해 김씨 획득
2세대 김흥발 양인
(가선대부)
어영청 등 군역 부담. 말년에 명예직 획득
3세대 김광오 평민→업유
(중간층)
1780년 일시적으로 '유학' 직역 획득 시도 (안정적이지 않음)
4세대 김성종 유학 / 학생 거주지를 옮기며 안동 김씨로 본관세탁 시도
5세대 김재곤 유학
(幼學)
19세기 중엽, 가계 구성원 대다수가 유학(양반)으로 기재됨
6세대 김재흠 유학 가계 계승을 위한 입양(양자) 문화 정착

4. 연구의 의의

이 과정은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권내현이 2000년대 이전부터 오랫동안 조선시대 문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교차검증으로 확인한 결과, 역사비평 2012년 봄호(98호)에 '양반을 향한 긴 여정-조선 후기 어느 하천민 가계의 성장'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됐고, 2014년에는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나왔다.

이 연구는 1606년부터 1888년까지 단성현의 호적 대장 33개 연도분을 전수 조사하여 한 노비 가계의 200년 역사를 복원해 낸 희귀한 사례이다. 이는 조선 후기 신분제가 붕괴되는 과정이 하층민들의 단순한 봉기나 위조 때문만이 아니라,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한 합법적 편입(납속)과 문화적 모방을 통해 서서히 이루어졌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권내현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성현 출신인 수봉의 외손자는 처음에는 외할아버지 이름을 김수봉이라 적었다가, 나중에는 정수봉 등으로 바꾸고, 한자 이름도 바꾸는데 성공했으며, 수봉의 이종사촌들도 역시 성과 본관을 획득했다.

5. 같이 보기

  • 이귀재 - 평민 출신으로 납속을 통해 양반이 된 유사 사례.
  • 추노 - 노비를 소재로 한 작품이나, 수봉의 사례와는 차이가 있다. 수봉은 도망친 게 아니라, 일정한 재물을 국가에 바치고 떳떳하게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 납속 - 수봉이 면천하고 통정대부 품계를 받을 수 있었던 제도적 근거.
  • 공명첩
  • 족보


[1] 1678년 호적대장 기록 기준.[2] 면천 직후 취득. 당시 거주지인 도산면에 김해 김씨 양반이 없어 진입 장벽이 낮았다.[3] 후손들에 의한 본관 세탁. 19세기에 이르러 변경하였다.[4] 사노비 출신[5] 본관은 영동. 원래 노비였으나 성을 획득함[6] 아버지(처외조부)가 김복(金福)으로 김씨 성을 가짐[7] 어영청 보인, 가선대부[8] 1718년 호적대장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갓복이 아닌 어련으로 올라가있고, 알 수 없었다던 할아버지의 이름이 이동으로 올라가있다.[9] 주인 집에 함께 사는 전형적인 노비는 솔거 노비이고, 주인집 밖에서 살 수 있는 노비는 외거 노비였다. 주인의 큰 믿음과 신뢰를 얻지 않는 이상 외거 노비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히려 도망 노비 때문에 나이 200살 된 노비가 호적에 올라있는 일도 있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