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06:55:16

수봉

守奉

1. 개요2. 생애
2.1. 배경2.2. 신분세탁에 성공2.3. 다른 양반 가문으로 편입
3. 기타4. 같이 보기

1. 개요

조선 숙종 때의 노비로, 경상남도 산청군에 해당되는 단성현 출신.신분세탁의 달인

운 좋게 주인집 밖에서 살면서 멀리 떨어진 주인집 농토에서 농사짓고 세경을 바치다가 나중에는 면천도 하고, 성과 본관도 얻게 되었다. 그 후손들의 대에는 안동 김씨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결국 성공한다.

수봉 이후에도 그 후손들의 끊임없는 이사, 이름 바꾸기, 개명 등 다양한 방법과 시도 끝에 150년 만에 수봉의 후손들은 김해 김씨와, 일부는 안동 김씨로 편입하는데 성공한다. 조선시대 후기의 진성 근성가이!이자 우공이산을 실제로 몸소 입증한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배경

수봉은 1678년 호적대장 중 심정량(沈廷亮) 가문의 호적에 노비로 기록되어 처음으로 존재가 확인된다. 이 호적에는 또 수봉의 탄생년도를 1624년이라 기재했고, 직역은 공란이다.# 아버지는 갓복(㖙福), 어머니는 숙향(淑香)이다. 외조부는 단문(丹文)으로, 갓복과 숙향, 단문 모두 사노비이고 직역란이 비어있으며 그 외의 조상은 알 수 없다.[1] 수봉의 부인은 자목, 장인은 금금이로, 역시 사노비이지만 영동 이씨라는 성과 본관이 있었다. 장모는 애춘으로, 애춘의 아버지는 김복으로 김씨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수봉은 주인 심정량 집에 속하지 않고, 따로 떨어져서 외부에 있는 땅에서 농사를 짓고, 그 농사로 얻은 대가의 일부를 주인에게 바치는 외거 노비 신분을 획득했다. 여기서 그가 신분 세탁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2]

2.2. 신분세탁에 성공

1715년의 단성현 관아의 호적에는 김수봉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성씨인 김씨와 본관인 김해만 붙었지 이름이 그와 같았다.# 숙종 때인 을병대기근(1695~1696) 당시 납속, 구휼미를 나라에 바치고 노비 신분에서 벗어난 것은 당연하고, 이 즈음 성과 본관을 가졌다. 이렇게 그는 호적에 성은 김, 본관은 김해로 올라갔다.

나중에는 추가로 쌀과 곡식을 더 바치고 통정대부 공명첩 임명장을 사들였다. 통정대부는 직급명으로, 직책명이 없다면 별로 큰 위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공명첩은 벼슬자리를 산 것이지 양반 신분을 산 것은 아니다.

1717년 그의 아들 김흥발의 호적에 분명 할아버지, 증조부, 외할아버지의 직역을 기재하지 않았었다.[3] 그런데 1720년 호적대장에 김흥발은 할아버지, 증조부를 정병(正兵)으로 적었다. 외할아버지도 평민에 해당하는 양인(良人)이라 썼다. 그리고 종2품에 해당되는 가선대부 품계를 얻는데 성공한다. 재산을 더 꾸준히 모아서 김흥발은 자기 재산을 이용해 자신의 아들들, 수봉에게는 손자가 되는 이들을 서원 원생으로 집어넣었다. 유생 타이틀을 얻은 것이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거주지를 옮기거나, 이름을 바꾸는 식으로 신분과 출신지를 계속 세탁해 나갔다. 이후 아들 흥발은 유학이라는 직역도 획득하여 아들들의 군역을 면제받는다. 그의 후손들은 이후 김해김씨로 살아가다가 수봉의 6대 후손쯤 되는 일부 후손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서는, 족보를 사들이고 안동 김씨에 편입되었다. 19세기에 그의 후손들은 양반 가문의 족보에 수록되어서 흔적이 사라진 것으로 되었다. [4]

2.3. 다른 양반 가문으로 편입

수봉의 후손들은 김해 김씨에 편입되어 생활했다. 그러다가 수봉의 4대손 김성종은 산청군 단성면이나 근처 도산면이 아닌 신등면으로 이사가고 본관을 안동 김씨로 바꿨다. 처음에는 안동대도호부 관아에 안동 김씨임을 입증할 근거가 없어서 실패했지만 끝내 안동 김씨 일가 중 후손이 끊어진 집성촌으로 이사, 수 년 뒤 안동김씨로 호적 세탁에 성공.

수봉의 다른 4대손 김종원도 다른 곳으로 이사가서 본관을 다시 안동 김씨로 바꿨다.

수봉의 후손들은 이름 한자를 바꾸거나, 이름을 통째로 바꾸고 거주지도 바꿔서 호적에 신고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지문인식기가 없었고, 주민등록 등본과 초본, 주민등록번호는 1970년 박정희에 의해 만들어졌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고 멀리 이사 간다면 충분히 성씨와 본관을 마음대로 관아에 신고해서 바꿀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연암 박지원이나 동평위 정재륜 등도 그렇게 신분을 세탁한 노비가 명문가 서자집의 딸, 하급 무관의 딸과 결혼해서 옛 주인을 만났다가, 비밀을 지켜주는 댓가로 엄청난 돈을 주었다는 이야기들을 소문으로 전해듣고 기록으로 남긴 바 있다. 그것이 한 학자의 끈질긴 연구 결과 사실로 입증된 셈이기도 하다.

하지만, 숨겨도 숨겨도 결국은 드러난다는 것도 보여 주었다. 이를 연구한 권내현은 수봉의 자손들이 어디 사는지 알고 있는 듯하나 공개하지 않았다. 이런 근성가이가 붙으면, 전국의 가짜 족보들 중 상당수는 논파될 수 있을 것이다.[5]

3. 기타

이 과정은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권내현이 2000년대 이전부터 오랫동안 조선시대 문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교차검증으로 확인한 결과, 역사비평 2012년 봄호(98호)에 '양반을 향한 긴 여정-조선 후기 어느 하천민 가계의 성장'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됐고, 2014년에는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나왔다.

권내현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성현 출신인 수봉의 외손자는 처음에는 외할아버지 이름을 김수봉이라 적었다가, 나중에는 정수봉 등으로 바꾸고, 한자 이름도 바꾸는데 성공했으며, 수봉의 이종사촌들도 역시 성과 본관을 획득했다.

4. 같이 보기

  • 추노 - 사실 수봉의 경우와는 별 관련이 없다. 수봉은 도망친 게 아니라, 일정한 재물을 국가에 바치고 떳떳하게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기 때문.

[1] 1718년 호적대장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갓복이 아닌 어련으로 올라가있고, 알 수 없었다던 할아버지의 이름이 이동으로 올라가있다.[2] 주인 집에 함께 사는 전형적인 노비는 솔거 노비이고, 주인집 밖에서 살 수 있는 노비는 외거 노비였다. 주인의 큰 믿음과 신뢰를 얻지 않는 이상 외거 노비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히려 도망 노비 때문에 나이 200살 된 노비가 호적에 올라있는 일도 있었을 정도.[3] http://news.joins.com/article/15794595[4] 수봉을 연구한 권내현은 그의 자손들에 대한 정보를 더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공개하지 않았다.[5] 사실 족보의 진위 여부를 간단하게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배우자의 성씨와 본관을 보는 것이다. 진짜 족보는 동일 인물의 이름이 배우자 가문의 족보에 반드시 기재되므로 교차검증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