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2 00:11:07

소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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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秉海
1942년~2005년 9월 2일

1. 개요

경북 칠곡군 출신으로 대구상고성균관대 상학과를 졸업했다.

삼성그룹의 역사에서 컨트롤타워에 오른 인물 중, 10년 이상 장수한 전설적인 비서실장은 단 두 명이다. 1997년 1월부터 2008년 7월까지 11년 반 동안 수장에 올랐던 이학수 전 부회장과 1978년 8월부터 1990년 12월까지 12년 간 재임한 소병해 전 비서실장이다.[1] 소 전 실장은 삼성 비서실을 기존 인사 외에 재무·감사·기획 기능까지 거느린 강력한 조직으로 탈바꿈시킨 장본인이다. 소 전 실장은 이병철 명예회장의 분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최측근이었다. 소 전 실장은 1987년 11월 이병철 회장 사후, 이건희 회장도 3년 동안 보좌하다 삼성생명 부회장을 거쳐 삼성화재 비상임 고문을 맡다가 지병으로 2005년 9월 6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재계의 청와대’라고도 불리는 삼성그룹 회장비서실(오늘날의 구조조정본부[2])은 1959년 5월 이병철 회장의 지시로 탄생했다. 비서실이 막강한 파워를 갖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들어서다. 1978년 8월부터 1990년 12월까지 삼성그룹 비서실장을 맡은 소병해 실장은 강력한 추진력과 엄격한 관리로 비서실의 기능을 크게 강화시켰다. 소 실장 시절에 비서실은 15개팀에 250여명의 인력을 거느린 대조직으로 성장했다. 기능도 인사 위주에서 재무, 감사, 기획, 국제금융, 홍보 등으로 다양해졌다.
워낙 빈틈없고 치밀해 이병철 회장이 무척 신임했다고 한다. 재무능력이 탁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삼성그룹의 전산화를 정착시키는 등 삼성 성장의 일등공신으로 평가받았지만, 때로는 계열사 경영과 인사에 입김을 미치면서 자신의 인맥을 형성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와 동갑인 이건희 회장(이건희는 빠른 생일이기에 사실상 한 살 차이)과는 부회장 시절부터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이건희 회장이 취임 초기 완전히 경영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계열사 사장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 둘의 관계가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은 취임 뒤 3년간 회사에 나오지 않고, 그에게 사실상 경영을 맡겼다. 이 회장은 그 기간 중에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라 형제들과의 상속 문제를 정리하고, 소병해 제거를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다. 삼성의 전직 고위임원은 “소 실장을 경질해도 반발할 수 없도록 개인 비리나 약점을 조사하고 증거를 확보했다”며 “소 실장을 경질하던 당일 삼성 비서실 직원들을 소 실장의 자택으로 보내,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서류와 자료들을 모두 걷어갔다”고 회상했다. 그가 회사 기밀서류를 무기로 이 회장과 맞설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

이건희 뿐만 아니라 이맹희와도 사이가 불편했다. 이맹희가 장자였기 때문에 이병철과 삼성그룹을 같이 한 초창기 측근들 중엔 계속 이맹희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병철의 묵인 하에 그에 의해 제거 당했다. 이맹희는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3]에서 소병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맹희는 소병해 자신을 정신병원에 가두기 위해 깡패를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소병해가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하대한 것에 대해 매우 속상해하고 있다. 나중해 소병해는 이맹희에게 잘해주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우선 '부산으로 깡패를 보낸 것이 네가 한 짓이냐고 물었다. 소실장은 담담하게 '아니다' 라고 부정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대답을 통해 그 일이 비서실의 소실장이 직접 지시한 일인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만약 자신이 시킨 일이 아니면 그 사건의 내막을 몰랐을 터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내가 그런 질문을 하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것이 정상적이었다. 그런데 소실장은 그 내용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해 전혀 의심치 않고 '내가 하지 않았다' 고 대답한 것이다.
소실장은 그때 나(이맹희)를 겁주려고 '긴급한 상황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헬리콥터를 타고 와서 제일모직 운동장에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과장이던 시절 내가 비서실로 데리고 왔기에 누구보다 나의 경력과 개인적인 이력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나를 '이맹희선생님' 이라고 불렀다. 쉽게 잊혀지진 않겠지만 나는 이제 그런 사소한 일들은 다 잊으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뼈에 새겨질 정도로 아픈 언사였다. 누구나 선생님으로 부를 수 있고 또 때에 따라서는 좋게 쓰이는 말이지만 그날 그가 나에게 썼던 그 단어는 참으로 아픈 것이었다. 모든 일은 내가 아버지에게 쫓기고 있는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단지 아버지의 의도를 충실하게 시행했던 도구에 불과했다. 다만 나중에 그가 해운대에서 사라진 내 옷과 생활 용품들을 돌려준 적이 있는데 더러 없어진 것이 있어서 내가 되물었을 때도 '그럴 리가 없다'고하면서도 자신은 그 일을 끝까지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는 그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그를 만나면 왜 그렇게 마지막까지 거짓말을했는지 꼭 한번 묻고 싶다.
한국을 떠나며 제일 아쉬운 것은 대구 있는 큰회장(이맹희를 이렇게 부른다)에게 좀더 잘해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제일 아쉬운 점입니다
이건희 회장에 의해 1990년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발령된 이후에도 소병해는 삼성의 여러 자리를 거쳤다. 1992년 삼성생명보험 고문을 거쳐서 1993년 삼성미주전자 부회장, 1995년 삼성신용카드 부회장을 맡았다.

부인과 아들에게 논현동 금싸라기 땅의 수백억대 빌딩들을 남겼다고 한다. #

[1] 둘다 야구부로 유명한 상고출신이다.[2] 구조본을 거쳐 이후 삼성미래전략실, 삼성전자 사업지원TF로 이어진다.[3] 매우 솔직하게 자기 삶을 털어놓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