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9:25:09

소노다 히로유키

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구마모토 4구)
선거구 개편 제41~47대
소노다 히로유키
제48~50대
가네코 야스시

역임한 직위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新党さきがけ.png 신당 사키가케 대표간사 및 간사장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c501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1-2대
소노다 히로유키
제3-4대
하토야마 유키오
제5-7대
소노다 히로유키
제8대
오쿠무라 텐조
제9대
구로이와 치즈코
}}}}}}}}}}}}}}} ||

파일:일어나라 일본 로고.jpg 일어나라 일본 간사장
창당 초대
소노다 히로유키
해산

파일:1583904348600.png 태양당 대표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초대
이시하라 신타로
히라누마 다케오
제2대
소노다 히로유키
}}}}}}}}}}}}}}} ||

}}} ||
<colbgcolor=#D7003A> 일본국 제38-48대 중의원 의원
소노다 히로유키
園田博之 | Sonoda Hiroyuki
파일:소노다 히로유키.jpg
출생 1942년 2월 19일
구마모토현 아마쿠사시
사망 2018년 11월 11일 (향년 76세)
도쿄도
학력 니혼대학 (경제학 / 학사)
부모 아버지 소노다 스나오, 양어머니 소노다 텐코코
최종당적

파벌 유린회
의원 선수 11 (중)
의원 대수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지역구 구마모토 4구
약력 중의원
신당 사키가케 대표간사
내각 관방 부장관 (무라야마 내각)
일어나라 일본 간사장
태양당 당수
자민당 간사장 대리

1. 개요2. 생애3. 소속정당4. 선거이력5. 기타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 전 외무대신 소노다 스나오의 장남이다.

2. 생애

1942년 2월 19일 구마모토현 아마쿠사군 가와우라정에서 정치인 소노다 스나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치바현으로 이주해 나라시노 고등학교와 니혼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1]

이후 어업회사 니치로(ニチロ)의 평사원으로 입사해 근무했다. 1984년 아버지 스나오가 후계자 선정 없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양어머니 소노다 텐코코와의 지분 다툼이 벌어졌고, 1986년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구마모토 2구에서 히로유키는 보수계 무소속으로 출마, 텐코코도 보수계 무소속으로 출마해 이 대결은 어머니와 아들의 모자대결으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선거결과는 아들 히로유키의 승리로 끝났고, 당선 직후 자민당에 입당해 나카소네 야스히로파에 소속되었다.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고, 1993년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불신임의안 투표에서는 반대표를 던졌지만 얼마 가지않아 다케무라 마사요시, 하토야마 유키오 등이 창당한 신당 사키가케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신당 사키가케에서는 간사장직을 맡으면서 신생당오자와 이치로와 같은 거물 정치인과도 당당히 맞서며 "군사"라는 호칭을 얻었다. 실제로 호소카와 내각 말기 다케무라 마사요시의 후임 내각관방장관 자리에 소노다를 기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소노다는 그 자리를 고사했다.

1994년 무라야마 내각 출범 당시 내각관방부 부장관직에 임명되어 당시 연립여당인 자민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사사 연립정권을 지탱하는데에 큰 역할을 하는 등 무라야마 내각의 관방 장관 자리에 필적하는 역할을 했다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2]

1998년 신당 사키가케가 해산되자 무소속을 유지하다가 자민당으로 다시 복당했고, 2000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가토 고이치 굉지회 대표를 리더로 삼아 모리 요시로 총리의 불신임의안에 찬성하는 가토의 난에 동조했지만, 정작 반대표는 던지지 않고 본회의에 결석해 투표를 기권했다. 2002년 중의원 법무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다니가키 사다카즈유린회에 소속되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국정 과제인 우정민영화 정책을 추진하는 자민당 우정개혁 합동부회 좌장으로 취임해 우정민영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2007년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자 당시 총리였던 아베 신조를 강하게 비판하며 즉각 퇴진 및 내각 총 사퇴를 요구했다. 아베 내각이 해산 한 뒤 동년 12월 북한과 일본 간의 국교 정상화 추진 및 대북정책에 대한 연구 위원회인 자유민주당 한반도문제소위원회에 창설 맴버로 참가해 부위원장을 맡았다.

2008년 아소 내각에서는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대리 역을 맡으며 당 재정개혁연구회의 회장인 요사노 가오루와 함께 재정 재건파의 대표로 활동하며 세금 인상파인 나카가와 히데나오 전 간사장 등의 인사를 견제했다. 2009년 다니가키 총재 하에서도 정무조사회장 대리직에 유임되었지만, 집행부와 당 노선을 두고 마찰을 빚어 요사노 가오루 등과 함께 탈당, 이시하라 신타로, 히라누마 다케오 등의 인사들이 결성한 극우정당 일어나라 일본의 창당에 참여해 초대 간사장을 맡았다.

2012년 태양당(일어나라 일본에서 당명변경)이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지사를 필두로 하는 일본유신회와의 합당에 참가했고, 동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자신의 두터운 지반을 자랑했다. 2014년 유신회가 구 민주당계 인사들과 함께 유신당을 창당하자 참여하지 않고 기존 유신회 인사들[3]과 결별하였으며, 태양당 시절 함께한 이시하라, 히라누마 등과 함께 극우정당 차세대당의 창당에 합류하였다.

2015년 당 내 의견 차이로 차세대당을 탈당해 그동안 껍데기만 남아있던 태양당에 다시 합류해 당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해 5월 1일 태양당이 해체됨에 따라 다시 차세대당으로 복당하였다. 하지만 1달뒤인 2015년 6월 자민당 복귀를 목표로 차세대당을 탈당, 9월 25일 히라누마 다케오와 함께 복당 신청서가 받아들여지면서 정식으로 복당했다.

2018년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구마모토현의 선거구가 5개에서 4개로 줄어듬에 따라 본인의 선거구인 구마모토 4구를 가네코 야스시에게 넘겨주고 비례 규슈블록으로 이동했다.[4] 그러나 2017년부터 지병인 폐암 투병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정치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2018년 11월 11일 도쿄도의 병원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소속정당

<rowcolor=#fff>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86 정계입문


1986 - 1993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3 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

1993 - 1998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8 정당해산


1998 - 2010 복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0 당내 의견 차이로 인한 탈당

2010 - 2012 창당

2012 당명변경

2012 - 2014 합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4 당내 의견 차이로 인한 탈당

2014 - 2015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5 탈당

2015 복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5 정당해산

2015 복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5 자민당 복당을 위한 탈당


2015 - 2018 복당
사망

4. 선거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선거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구마모토현 제2구

[[무소속(정치)|
무소속
]]
73,252표 (17.0%) 당선 (1위) 초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6,456표 (14.7%) 당선 (4위) 재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5,464표 (22.4%) 당선 (2위) 3선[5]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마모토현 제4구 117,441표 (58.96%) 당선 (1위) 4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9,156표 (79.18%) 5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7,428표 (73.62%) 6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6,380표 (68.34%) 7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3,900표 (59.17%) 8선
2012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2,975표 (65.92%) 9선
2014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1,581표 (75.92%) 10선
2018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비례 규슈 블록

2,181,754표 (-%) 11선[6]

5. 기타

  • 신당 사키가케 간사장, 자민당 정조회장 대리직을 역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 생활 동안 단 한번도 내각에 입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는 세습 정치가로서 "정치 명문가"의 이미지만 믿고 대신직이나 당의 중책에 임명되는데 유리하다는 인식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주위에서 당 요직이나 입각 요청이 들어와도 정중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 구마모토현 제4구의 중의원 의원 가네코 야스시가 그의 비서 출신이다.

[1] 나라시노 고등학교 재학당시, 동 학교의 야구부 창단 멤버로 활동했다. 소노다의 야구부 후배로는 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인 오가와 준지한신 타이거스의 명 내야수인 카케후 마사유키, 치바 롯데 마린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후쿠우라 카즈야 등이 있다.[2] 이때의 공로로 신당 사키가케에서 분당되어 창당된 구 민주당에서도 소노다를 민주당으로 영입시켰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 야권 지지자들이 많았고, 사키가케에서 함께했던 에다노 유키오, 마에하라 세이지, 겐바 고이치로 등의 인사를 떠나 보내면서 "너희들은 민주당으로 옮겨 살아남아라, 우리는 언젠가 또 함께 하자."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3] 하시모토 도루, 마쓰이 이치로 등의 오사카계 인사들[4] 본래 자민당에서는 73세 이상의 의원은 비례명단에 들어갈수 없다는 정년제가 있었지만. 차세대당에서 온 소노다의 경우는 예외로 취급되었다.[5] 일본 중의원 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6] 2018.11.11 임기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