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사직(社稷)은 유교를 받아들인 동아시아 전제 왕조에서 토지를 지키는 신인 「사(社)」와 곡식을 지키는 신인 「직(稷)」을 통칭하는 말이자 이들에게 드리는 유교식 제사를 이른다. 농경 사회에서 토지와 곡식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는데, 고로 이를 지키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종묘와 더불어 왕조로서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행위였다.동아시아 왕조에서 국가의 운명을 상징하는 용어로도 자주 쓰였는데, 현대 사극에서도 자주 나오는 "조선 500년 종묘사직", "사직을 보존하시옵소서!" 같은 식이다.
2. 역사
사직은 중국의 주나라 때부터 시작된 제사이며 한반도에는 삼국시대 때 수입돼 제사 지내기 시작했다. 사직 제사도 급이 나뉘어 있다. 천자의 사직 제사명은 대사(大社)·왕사(王社)인데, 사직제도가 만들어졌을 땐 중국 왕조엔 황제호가 없었으므로, 왕호만이 천자를 대표할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제후는 국사(國社)·후사(候社), 제후 밑의 대부(大夫)급은 치사(置社)라고 한다.삼국 시대의 사직 제사 방식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삼국사기 잡지에서 삼국의 사직 관련한 여러 부족한 기록들을 모아두고 있다.# 고려 왕조의 사직 제사 방식은 고려사 예지 사직에 상세히 나와있다. 성종 대에 절일, 태묘, 원구단(圜丘壇), 방택(方澤) 등을 설치할 때 같이 설치했으며 대사(大社)라 불렀다. 오방색의 흙을 쌓아 단을 만들었고 대사(大社), 대직(大稷)의 신위를 만들어 후토구룡씨(后土勾龍氏), 후직씨(后稷氏)를 배향해서 제사 지냈다. 성종 이후 충혜왕까지 제사 지낸 기록이 있다.
조선 개국과 거의 동시에 서울의 현위치에 사직단을 설치하고 가장 중요한 국가의례로 계속 치러져 왔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격상하고 환구단에 가장 중요하단 자리를 뺏겼으나 여전히 중요했고, 이내 일제강점기 시대 개방하고 모든 역할을 잃은데다 신사(신토)까지 설치되고 말았다. 해방 후 전주 이씨 종친회가 사직 의례를 재개하지만 부지가 축소된 채 공원으로 쓰이다가 2021년부터 조선 시절 모습 복원이 시작되었다.
3. 무형문화재
사직대제라 하여 사직에 대한 제사는 현대 한국에서 중요무형문화제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자체나 유교 관련 단체들이 사직을 지내야 할 때가 되면 사직단에 모여서 제례를 올리기도 한다.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지역 축제처럼 다루어질 때도 있는 모양.4. 여담
- TV 프로 알쓸신잡 시즌 2에선 과거 왕조 시대의 풍요와 물질적 욕망을 기원하는 상징물이 사직단이었다면, 현대엔 아파트나 마천루가 이에 비견되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 국가 주관 사직 제사를 더 이상 지내지 않는 오늘날에는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전국 여러곳에 있는 사직동은 당연하고, 서울 사직터널과 부산 사직 야구장이 그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