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1 04:47:20

블라디미르 로스키

<colbgcolor=#000><colcolor=#fff> 블라디미르 로스키
Влади́мир Ло́сский | Vladimir Lossky
파일:vladimir lossky.jpg
이름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로스키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Ло́сский)
출생 1903년 6월 8일
독일 제국 괴팅겐
사망 1958년 2월 7일 (향년 54세)
프랑스 파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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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틀:국기|]][[틀:국기|]][1]
가족 아버지 니콜라이 오누프리예비치 로스키[2]
배우자 막달리나 로스카야
학력 소르본 대학교 (중세 철학)
종교 러시아 정교회
직업 신학자, 교수
1. 개요2. 생애3.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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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출신이며 프랑스로 망명한 정교회 신학자. 신교부 종합[3] 파리 학파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정교회 신학의 주요 원리로 신화[4]를 강조했고, 그의 저술들은 20세기 정교회 신학의 고전으로 불린다.

2. 생애

1903년 6월 8일 독일 제국 괴팅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이 로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철학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예술학부에서 공부하다가, 레닌의 두 차례에 걸친 인텔리겐치아[5] 추방으로 인해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추방당했다. 이때 소련정교회 박해로 인해 순교한 페트로그라드의 베냐민 대주교의 재판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프라하에서 공부를 이어갔고, 1924년 파리로 이사해 소르본 대학교에서 1927년에 중세 철학 전공으로 졸업했다. 1928년 6월 4일에는 막달리나 로스카야와 결혼하여 슬하에 자녀 넷을 두었다. 1925년부터 1926년 사이에는 프랑스에 정교회를 전파하기 위해 세운 트료흐스뱌치첼 예배당의 총주교 포티야 명의의 수도사제단에 들어갔다. 이 시기부터 러시아 정교회의 정통적 전일성을 수호하기 시작했고, 저작 활동에 들어갔다. 1939년에는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부터 1944년 사이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하고, 1944년 12월에 프랑스가 해방된 후 파리에 프랑스 정교회[6]의 성 디오니시우스 신학 연구소가 설립되자, 그곳의 초대 학장을 지내며 1953년까지 교의신학과 교회사를 강의했다. 1947년부터는 에큐메니컬 협회인 성 알반과 성 세르기우스 협회[7]의 회원이 되었다.

생애 말기에는 서구 유럽 총주교구 산하 사제 과정에서 강의를 하며 신학철학 학술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6년에는 러시아를 방문했고, 1958년 2월 7일에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신학


[1] 1939년 시민권 취득[2] 러시아 철학자[3] neopatristic synthesis[4] θέωσις, 테오시스[5] 지식인[6] Église catholique orthodoxe de France[7] Fellowship of Saint Alban and Saint Sergius, 성공회정교회의 접촉을 촉진하는 데 목적을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