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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산대학교의 상징에 대해서 정리한 문서.2. 상세
2.1. 심벌마크(UI)
부산대학교 심벌마크 |
2.2. 슬로건
Arise PNU, 같이 더 높게
2024년 6월 취임한 최재원 총장의 슬로건이다.#2.3. 효원(새벽벌)
부산대의 또 다른 이름으로는 효원(曉原)이 있다. 효원은 순우리말로는 '새벽벌' 또는 '샛벌' 이다.효원(曉原)의 유래는 1954년 8월 윤인구 초대 총장이 장전동 신교지 현장답사를 할 때 여기가 '샛벌(曉原)'이며, 같은 금정산 줄기에 있는 범어사(梵魚寺)의 원효암(元曉庵)은 일찍이 신라의 원효대사가 수도한 곳으로 효원(曉原)은 원효(元曉)의 벌(原)이라는 의미와도 상통했다. 이리하여 공사가 정지단계에 들어갔을 때 새벽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먼동이 트고 있던 그곳의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이곳이 과연 새벽벌, 즉 효원(曉原)이라는 이름과 부합한다고 생각하여 윤인구 초대 총장이 '효원(曉原)'이라고 명명했다.[3]
흔히 사용하는 '효원인'이란 말에는 이러한 새벽공기 같은 참신함과 원효대사 같은 수도 정진과 성취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산대학교의 상징동물인 독수리를 "효원의 독수리"라고 부른다.
2.4. 독수리(동물)
부산대학교 웅비의 탑 |
일명 “효원의 독수리”. 구 정문 근처에는 독수리 동상이 정상에 있는 '웅비의 탑'이 있다.
국내에서 공군사관학교, 연세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대학상징물로 사용하고 있는 독수리는 부산대학교에서 최초로 사용했다. 미국의 세계적인 명문대학인 시카고대학교(The University of Chicago), 보스턴칼리지(Boston College), 아이오와대학교(University of IOWA at Iowa City), 미국 남부의 ‘하버드’라고 불리는 에모리대학교(Emory University) 등 미국대학의 상징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동물 1위가 독수리이다. 그것은 독수리가 미국의 국조(國鳥)(흰머리 독수리 bald eagle 1782.6.20. 지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대학교의 독수리는 일명 “효원의 독수리”라고 불린다.(참고로 연세대학교의 독수리는 “신촌독수리”라고 불린다.[4]) 이것은 독수리를 같은 국조(國鳥)로 사용하고 있는 독일에서는 “흰꼬리 독수리(White tailed Eagle)”, 미국에서는 “흰머리 독수리(bald eagle)”라고 애칭으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산대학교는 학교의 상징동물을 기념하기 위해 독수리탑을 세웠다. 1965년부터 7년 동안이나 논의되어 오던 독수리탑의 건립문제가 결정된 것은 1972년 5월이었고, 기공식은 26돌 개교기념일인 1972년 5월 15일 11시에 가졌다. 220일간의 신중한 공사를 거친 후 1972년 12월 21일에 제막식을 가졌다.[5] 출처 링크
부산대학교가 독수리를 상징동물로 채택한 연혁은 1948년 6월 부산대학 건설 회원권, 부산대학 후원회 배지, 구 교기 등에 ‘부산대학’이라는 교명을 크게 부각하여 작은 독수리를 그려넣은 교기, 교표 등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1949년 후반기에 가서 학도호국단 규정에 따른 군사훈련이 처음 실시되었을 때, 당시 윤인구 학장이 직접 구상하여 교련모에 제작한 바 있던 베레모에도 교표로써 독수리상은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교표 ․ 모표 ․ 교모 등이 정식으로 제정된 것이 아니고 군사훈련용의 임시적인 것이었다.
1953년 4월 부산대학교의 종합대학 재승격에 대해 대통령 재가가 떨어지자 곧 교기가 제정되어 서대신동 교사의 강당에서 그 전수식이 거행되었다. 이 전수식에서는 교기 도안을 직접 작성했던 윤인구 총장이 교기 제정의 경위와 도안에 관한 해설을 하였다. 즉, 교기의 바탕은 청록색으로 그것은 부산의 앞바다를 상징하고 있으며, 거기에 학교의 상징인 힘찬 독수리 마크를 넣었는데, 이것은 대학의 기상을 나타내는 것인 바, 이때 비로소 상징동물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것이다. 그 후, 1965년부터 7년간이나 독수리탑 건립 문제를 논의해오다 1972년 비로소 건설된 것이다.
부산대는 금정산 산기슭에 터 잡아 금정산 용호봉에 많이 서식하던 금정산독수리에서 그 유래를 따왔고, 독수리를 상징동물을 삼았던 이유 또한 "학생들에게 독수리의 기상과 혜안, 웅비를 본받으라"는 취지를 독수리송에 담아 웅비의 탑에 새겨 대학 상징동물 선정 배경에 그 유래와 의미를 밝혔다.
<금정산 독수리의 전설>
주영택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이 펴낸 ‘그 터에 얽힌 금정이야기’에 따르면, “금정산 용호봉의 건너편에 있는 부채모양의 ‘부채바위’가 옛날에 독수리가 서식하였다고 하여 ‘수리덤(등성)’이라 불리었으며, <수리바위>라고도 한다.”고 밝히고 있다. 【출처】 주영택, '그 터에 얽힌 금정이야기', 금정구청, p59 참조
주영택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이 펴낸 ‘그 터에 얽힌 금정이야기’에 따르면, “금정산 용호봉의 건너편에 있는 부채모양의 ‘부채바위’가 옛날에 독수리가 서식하였다고 하여 ‘수리덤(등성)’이라 불리었으며, <수리바위>라고도 한다.”고 밝히고 있다. 【출처】 주영택, '그 터에 얽힌 금정이야기', 금정구청, p59 참조
2.5. PNU(영문)
부산대의 영문명칭은 PUSAN NATIONAL UNIVERSITY이고 영문 약칭 PNU로 표기한다.※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개정내용 ····· 국립국어연구원
제1장 표기의 기본 원칙 (개별조항 생략)
제2장 표기 일람 (개별조항 생략)
제3장 표기상의 유의점
제1항~제6항 (생략)
제7항 인명, 회사명, 단체명 등은 그동안 써 온 표기를 허용한다.
제1장 표기의 기본 원칙 (개별조항 생략)
제2장 표기 일람 (개별조항 생략)
제3장 표기상의 유의점
제1항~제6항 (생략)
제7항 인명, 회사명, 단체명 등은 그동안 써 온 표기를 허용한다.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Busan이지만[6] 국어의 로마자표기법 제3장 제7항(학교 등 단체명칭은 기존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써 온 표기를 허용)에 따라, 부산대학교는 학내 구성원들의 의견을 물은 결과 기존의 표기방식인 "PUSAN"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기존 표기를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다.[7] 비슷한 경우로 베이징대학도 영문 표기는 병음 Beijing이 아닌 'Peking University'이고, 칭화대학도 Qinghua가 아닌 'Tsinghua University'를 영문명으로 쓰고 있다. 부산대학교(PNU) 이외에도 경북대(KNU), 전남대(CNU) 등 국내 대다수의 대학들이 "고유명사인 경우 관례대로 그동안 써 온 표기를 허용하는 국어의 로마자표기법의 취지에 따라" 모두 원래 표기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여담으로 부산대가 이미 PNU를 사용하고 있어 부경대는 약자로 PKNU를 사용하게 되었다.
2.6. 문창대(文昌臺)
부산대학교 문창대 |
동쪽으로 바라보며 탁 트인 공간에 자리잡고 있으며, 1954년 10월 22일 부산대학교를 방문한 이선근 문교부 장관(대한민국 제4대 문교부장관)이 효원의 학문을 상징하는 문창성(文昌星)이 비치는 곳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고, 문창성은 과운(科運)을 장악하는 별이니, 과운은 문운(文運)으로 통하고 문운(文運)은 학문(學問)으로 직결된다. 학문의 전당을 세우는 부지에 붙여진 뜻있는 명칭이 바로 문창대(文昌臺)이다. 신라 대문장가 최치원은 그가 죽은 뒤 고려시대에 가서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謚號)를 받았는데, 그는 동방 한학의 태두를 이루었고 중국에 까지 혜성처럼 빛난 존재였다. 이곳 효원 문창대에 제2의 최치원과 같은 '위대한 인재(文昌星)'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선근 문교부 장관이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이선근 문교부 장관은 부산대 캠퍼스 부지를 돌아보며 현 약학대학 교사 앞에 이르렀을 때 그 곳에 마무리된 능선 끝의 구릉상에서 기암촉석을 발견하고 문창대는 이곳과 잘 어울리며 신라의 대문호 고운 최치원에게 문창후라는 벼슬을 내렸던 사실과 효원의 문운과 학문을 상징하는 북두칠성의 다른 이름 문창성이 비취는 곳이라는 것도 고려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출처】 부산대학교 60년사, 세종문화사, p89 참조.
2.7. 인문관(人文館)
부산대학교 인문관 |
2014년 10월 30일,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부산대학교 인문관(옛 본관)(2,631㎡)’을 대한민국의 문화재로 등록(등록문화재 제641호)하였다. 이미 부산대 인문관은 부산광역시에서『부산의 근대건조물 제1호』로 지정(2012년 7월)하여 부산의 근대문화유산으로 보호하고 있는데, 문화재청의 문화재 등록의 의미는 부산대학교 인문관을 문화재로 등록하여 '대한민국의 근대 문화유산'으로 보호하겠다는 의미이다.[8]
부산대 인문관(옛 본관)은 1957년 7월에 착공해 1959년 10월에 준공했으며, 1995년까지 대학 본관으로 사용됐다. 총 길이 140m,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현재 인문대학 강의실 및 연구실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한국 현대건축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여천 김중업(1922~1988)이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문하에서 사사한 뒤 프랑스에서 귀국,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원리를 그대로 적용해 최초로 설계한 대표적인 초기작품으로 높은 천정과 회전식 계단 등 당시로는 파격적인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축학도라면 김중업(“김중업은 한국 현대 건축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 정인하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과 김수근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고, 김중업을 공부하려고 한다면 그가 세계적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밑에서 유학한 후 최초로 설계한 '부산대 인문관(옛 본관)'을 답사하고 순례하지 않을 수 없는 필수공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건축의 정신을 보여주는 ‘ 부산대 인문관 ’ - 서울대 김민수 교수의 評
부산대 인문관은 모던건축의 선구자 르 코르뷔지에에게 직접 배운 김중업이 설계한 것으로, 그가 프랑스에서 돌아와 설계한 첫 작품이다. 20세기 부산에 세워진 현대 건축물 중 역사적·미학적으로 소중한 가치를 가진 건물의 하나다. 1959년에 완공된 인문관에는 르 코르뷔지에의 전성기는 물론 후기에 수정된 건축관이 중첩되어 있다. 특히 중앙홀에 들어서면 직선과 사선이 교차하며 4층까지 올라간 계단이 높은 층고의 공간감과 어우러져 경쾌한 느낌을 준다. 외부의 빛을 투과시킨 공간 효과는 육중한 벽체의 견고함과 중량감을 상쇄시키며 마치 ‘롱샹’ 교회(1950~1954)를 방불케 한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 교회와 같은 후기 건축에서 초기의 기계적 건축관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근원적 관계에 대한 자성을 반영했다. 이는 현대건축의 독단과 비인간성에 대한 반성을 예고한 것으로 바로 이 정신이 인문관 건물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독재정권에 저항한 197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 인문관에서 촉발된 것은 건물에 담겨진 ‘건축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아마도 부산대 출신들에게 인문관은 단순한 건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교정의 독수리탑과 함께 부산대의 상징이자 과거 민주도시 부산의 정신을 대변하는 상징 건축물로 여길 것이다. 이처럼 건축은 단순히 재료와 구조의 공학적 산물을 넘어서 정신이 합해질 때 비로소 철학과 예술로 승화된 생명체가 된다.
부산대 인문관은 모던건축의 선구자 르 코르뷔지에에게 직접 배운 김중업이 설계한 것으로, 그가 프랑스에서 돌아와 설계한 첫 작품이다. 20세기 부산에 세워진 현대 건축물 중 역사적·미학적으로 소중한 가치를 가진 건물의 하나다. 1959년에 완공된 인문관에는 르 코르뷔지에의 전성기는 물론 후기에 수정된 건축관이 중첩되어 있다. 특히 중앙홀에 들어서면 직선과 사선이 교차하며 4층까지 올라간 계단이 높은 층고의 공간감과 어우러져 경쾌한 느낌을 준다. 외부의 빛을 투과시킨 공간 효과는 육중한 벽체의 견고함과 중량감을 상쇄시키며 마치 ‘롱샹’ 교회(1950~1954)를 방불케 한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 교회와 같은 후기 건축에서 초기의 기계적 건축관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근원적 관계에 대한 자성을 반영했다. 이는 현대건축의 독단과 비인간성에 대한 반성을 예고한 것으로 바로 이 정신이 인문관 건물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독재정권에 저항한 197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 인문관에서 촉발된 것은 건물에 담겨진 ‘건축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아마도 부산대 출신들에게 인문관은 단순한 건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교정의 독수리탑과 함께 부산대의 상징이자 과거 민주도시 부산의 정신을 대변하는 상징 건축물로 여길 것이다. 이처럼 건축은 단순히 재료와 구조의 공학적 산물을 넘어서 정신이 합해질 때 비로소 철학과 예술로 승화된 생명체가 된다.
2.8. 교가 및 교훈
1) 동영상 제작: 안원하, 2) 참여: 부산대학교 음악학과 및 예술문화영상학과 학생들
부산대학교 교가
금정산 산기슭에 새벽벌 닦아노니
하늘도 넓어지고 포부도 높아져라
진리와 이상으로 불타는 젊은 학도
외치노니 학문의 자유
이 곳이 우리들의 부산대학교, 부~ 산~ 대~ 학~ 교~~
한희동 작사, 박태준 작곡 교가 음원 교가 악보
금정산 산기슭에 새벽벌 닦아노니
하늘도 넓어지고 포부도 높아져라
진리와 이상으로 불타는 젊은 학도
외치노니 학문의 자유
이 곳이 우리들의 부산대학교, 부~ 산~ 대~ 학~ 교~~
한희동 작사, 박태준 작곡 교가 음원 교가 악보
부산대학교의 교훈이자 건학이념은 ' 진리, 자유, 봉사 '이다.
윤인구 초대총장이 "진리, 자유, 봉사"를 부산대 건학이념으로 삼게 된 배경은 이렇다. 진리와 자유는 일제강점기 구포 3.1운동 주동으로 퇴학당하면서 일본 경찰에 감시를 받는 등 억압적인 환경 하에서 동경 유학을 통해 신학의 길로 들어서면서 생각했던 종교적 세계관이 반영된 성경(요한복음 8:31~32)에서 따왔고, 봉사는 일본 유학시절 '사선(死線)을 넘어서’의 작가이자 일본 양심적 지식인 카가와 토요히코(賀川豊彦, かがわ とよひこ)의 동경 피난민 구제 사업에 봉사활동으로 참여하여 실천적 봉사가 온전한 사람의 본분임을 깨닫게 되면서 이는 대학생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소양으로 보아 부산대 건학 이념(교훈)에 새겨넣게 된 것이다.[9] 현재 부산대학교 제2도서관 벽에 윤인구 초대총장이 직접 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글귀의 액자가 걸려 있다.
(1)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1~32)에서 “진리와 자유”
이 문구는 동경 유학시절 내내 청년 윤인구를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윤인구 총장 자신이 동래고보 3학년때 구포시장 3.1운동 주동으로 퇴학당하는 등 실패를 경험했던 까닭에 조선민족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줄 어떤 수단과 방법도 없는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진리(眞理)’가 있으면 우리 민족이 “자유(自由)”를 누릴 수 있음을 믿게 되었고, 진리 탐구를 위한 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자유의 사전적 의미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며 윤인구 총장은 이것을 '만사에 구애받지 않음'이라고 설명했다. 즉,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적인 환경 하에서도 우리민족에게 참된 '진리'만 있다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구속하는 일체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이러한 윤인구의 정신이 부산대학교 교훈에 반영되었다.
따라서 진리에 어긋나는 불의에 항거하고 독재로부터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4·19혁명과 1979년 10·16 부마항쟁, 1987년 6월 항쟁 등 역사의 고비마다 부산대 학생들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이러한 건학이념과 무관하지 않고 "어떤 불의에도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옳곧은 저항정신"이야말로 부산대를 관통하여 흐르는 대학정신이며, 효원인들의 피속에 내재되어 있는 유전자이자 성숙한 시민의 민주정신이다. 이러한 항쟁정신은 자유를 침해받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소통의 정신과 그들을 넉넉하게 품고 안았던 관용의 정신을 포함하고 있다.
(2) 카가와 토요히코(賀川豊彦)[10]의 만남을 통해 봉사의 의미를 알다.
카가와 토요히코는 코베 신학교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귀국후 목사이자 사회운동가로 그리스도교 전도 및 사회봉사활동을 하면서 노동운동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반전운동(反戰運動) 혐의로 일본 헌병대에 감금되는 등의 탄압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 집권 시절 한국에 방문하여 일본인으로서 처음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해 사죄하였다. 저서로 자전적 소설인《사선(死線)을 넘어서》(1921)와 《새벽이 오기 전에》(1924) 등 다수가 있다. 1954∼56년 3년 연속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라 1960년에도 후보로 추천됐다. 그리고 1947, 48년 2번에 걸쳐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카가와가 쓴 작품 '사선(死線)을 넘어서'(死線を越えて, 1921년)는 청년 윤인구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도쿄 메이지학원 신학부 시절 카가와 도요히코의 도쿄 피난민 구제사업에 봉사활동으로 참여하면서 실천적 봉사가 온전한 사람의 본분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실천적 봉사활동 경험은 대학생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보아 부산대의 건학 이념(교훈)으로 삼게 된 것이다.
[1] 부산대 홈페이지, 부산대 심볼마크 참조[2] 사실 지방거점국립대학교 중엔 한글 자음을 응용해 로고를 만든 사례가 꽤 있다. 전남대학교, 전북대학교, 충북대학교가 그 예시.[3] 부산대학교 60년사, 세종문화사, p89[4] 고려대학교에서는 신촌독수리를 신촌참새라고 낮추어 부른다.(연세치킨도 있다. 이쪽은 고려대학교 응원가 제목으로도 쓰인다.) 여기에 연세대학교는 안암호랑이를 안암고양이로 부르며 반격한다.[5] 부산대학교 60년사, 세종문화사, p196[6] Taegu→Daegu, Kyŏngnam→Gyeongnam, Cheju→Jeju 등으로 바뀜[7] 사족에 가깝지만, 부산대의 영문 약자 PNU는 학내에서 보통 '피누' 로 읽는데 이를 'BNU' 로 바꾸면 '비누' 가 되어 버린다(...) 마이비누[8] 이로 인해 문화유산 기록 및 보존을 담당하시는 분들이 인문관 내부와 외부를 종종 촬영한다.[9] 부산대학교의 교훈이 윤인구 총장에 의해 지어 졌듯이 대학의 교훈은 초대총장이 짓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대의 경우, Veritas Lux Mea. 라틴어로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뜻인데, 국립서울대학교의 초대 총장이었던 해리 앤스테드(Harry B. Anstead) 박사가 지었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 홋카이도 대학의 표어(Motto) "Boys, be ambitious"도 이 대학의 전신(前身)인 삿포로 농업학교(札幌農学校) 교감이였던 윌리암 클라크(William Smith Clark, 1826~1886) 박사의 훈화에서 따왔다고 한다.[10] 1888년 코베(神戸)출생. 1960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