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베르나르 드 라 살 Bernard de la Salle |
출생 | 1339년경 |
프랑스 왕국 아쟁 | |
사망 | 1391년 6월 |
이탈리아 폰테 | |
아내 | 리카르다 비스콘티 |
자녀 | 베르나르도, 앙투안 |
직위 | 콘도티에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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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출신의 이탈리아 콘도티에로(Condottiero: 용병 부대 지휘관). 처남인 존 호크우드와 함께 백년전쟁에서 활약하다가 이탈리아로 넘어가서 용병대장으로 이름을 떨친 것으로 유명하다.2. 생애
1339년생이며, 프랑스의 아쟁 출신인 것 외에는 출신 신분이 알려지지 않았다. 1359년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와 장 3세 드 그레일리 휘하에서 용병으로 복무했고, 1360년 5월 브레티니 평화 협약 이후 백년전쟁이 중단되면서 용병 계약이 만료되자 자유 용병대에 가담해 프랑스 각지의 농촌과 도시들을 약탈했다. 1360년 12월 28일 퐁생에스프리를 공략한 뒤 여러 귀족을 살해하고 수많은 숙녀를 강간한 뒤 약탈을 자행해 막대한 부를 챙겼다. 1364년 4월 6일 자유 용병대 진압에 착수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브리네 전투에서 격파하는 데 일조했으며, 잉글랜드 용병대장 로버트 놀스와 합류해 생푸르세인의 포도원을 황페화했다.1363년 카를로스 2세 휘하 군대에 기용되었고, 그해 10월 샤리테쉬르루아르를 기습해 공략했다. 그러나 1364년 5월 코르슈렐 전투에서 패배한 뒤 프랑스군에 포위되자 샤레티쉬르루아르를 반환하고 더이상 카를로스 2세를 돕기 않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다. 1365년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부대에 가담해 엔리케 2세가 페드로를 몰아내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으로 등극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1367년 2월 흑태자 에드워드의 페드로를 복위하기 위한 카스티야 원정에 가담해 엔리케 2세를 몰아내고 페드로를 복위하는 데 일조했다.
1369년 8월 중순, 흑태자 에드워드 휘하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시어머니인 이자벨[1]이 거주하고 있던 벨페르쉐를 공략했다. 1369년 9월 피에르 1세 드 부르봉, 루이 드 상세르 등이 이곳을 포위했지만 1370년 5월까지 항전한 끝에 물리쳤다. 1370년 9월 흑태자 에드워드의 리모주 공방전에 참여해 그곳을 철저하게 약탈했다. 1371년 10월 14일 피작을 공략한 뒤 이곳의 영주가 되었다가 1373년 여름 120,000 프랑을 받고 잉글랜드 측에 영지를 넘겼다.
1372년 여름, 부하들을 이끌고 안두젠케로 진군해 그곳을 약탈한 뒤 한동안 거주했다. 9월 3일, 그를 따르던 용병 분견대가 장 코크가 방어하는 튀렌 자작의 요새인 바뇰쉬르세즈를 공략하려 했으나 격퇴되었다. 그 후 베르나르는 교황령의 일부이며 프로방스 지역인 콤타트 베네신으로 진군해 구호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 후안 페르난데스 데 에레디아와 여러 차례 맞붙었고,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그러다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회유를 받아들여 교황군 용병대장이 되었고, 1375년 전반기 동안 오라녜 공 레이몽 데 보의 교황령 침공에 맞서 지공다스, 종키에르, 수지라루스 요새를 공격해 인근 시골을 약탈했다.
1375년 말, 그레고리오 11세의 요청에 따라 교황 특사이자 추기경인 기욤 노엘레에게 고용된 뒤 이듬해 7월에 볼로냐를 포위했다. 1377년 1월 14일 교황이 로마에 귀환한 뒤, 교황의 조카이자 교황군 지휘관 레이몽 드 튀렌은 베르나르를 오른팔로 삼고 그레고리오 11세에 반대하는 도시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원정을 수행했다. 그해 4월 레이몽은 비테르보와 볼세나를 공략했고, 5월에는 베르나르가 솔라로에서 아스토레 만프레디를 격파했다. 그해 5월 말,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에서 발발한 폭동을 피하기 위해 아니니로 이동했다. 교황은 레이몽과 실베스트르 부데스, 장 드 말레스트로이에게 자신에게 반항하는 피렌체로 진군하라고 명령했지만, 말레스트로이는 거부하고 교황군이 피렌체에 진군하지 못하도록 막은 뒤 급료 인상을 요구하기 위해 수비아코까지 진군했다. 이에 실망한 교황은 아비뇽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12월 5일 조카 레이몽에게 프랑스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레이몽은 지휘권을 베르나르에게 맡긴 뒤 떠났다.
1378년 3월 26일,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에서 급사했다. 1378년 4월 7일 저녁, 추기경들이 새 교황 선출을 논의하기 위해 콘클라베를 열었을 때, 폭도들이 이탈리아인 교황을 세워서 로마에 앉히라는 압력을 가하기 위해 콘클라베 회의장을 포위했다. 베르나르는 이들을 막으려 애썼지만, 폭도들의 기세가 워낙 대단했던 터라 감히 진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콘클라베는 대중의 압력에 굴복해 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를 선출했고, 그는 우르바노 6세를 칭했다. 그 후 새 교황은 기존 추기경들이 너무나 부패하고 불순종한 모습을 보인다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에 추기경들이 반감을 품고 우르바노 6세를 폐위하고 새 교황을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1378년 5월, 비테르보에서 우르바노 6세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베르나르는 우르바노 6세의 군대에 합류한 뒤 그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해 볼세나로 진군했다. 그러나 그는 6월 말에 우르바노 6세에게 더 이상 복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7월 말레스트로이와 손잡고 로마로 진군해 살라리오 다리에서 로마군과 충돌했지만, 로마 진입엔 실패했다. 그 후 우르바노 6세에 대적하는 추기경들은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아비뇽 인근에 위치한 오페드, 모르나스, 카데루스 영지의 수입을 그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해 9월 20일, 베르나르가 이끄는 용병군의 포위 하애 폰디에서 새로운 콘클라베가 열렸다. 그 자리에 모인 추기경들은 만장일치로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다. 이리하여 서방교회 대분열이 발발했다.
1379년 4월, 베르나르는 우르바노 6세를 따르는 존 호크우드와 대결한 끝에 패배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다. 이후 로마로 끌려간 그는 클레멘스 7세를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다. 클레멘스 7세는 더 이상 베르나르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자, 이탈리아에 더 있다간 위험하겠다고 판단하고 아비뇽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교황청을 별도로 세웠다. 베르나르는 12월 말에 아비뇽으로 가서 오페드, 모르나스, 카데루스의 영주로서 클레멘스 7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레이몽 드 투렌으로부터 생레미앙프로방스 인근의 투르카니약과 마블랑 성을 구입했다.
1380년 6월 이탈리아로 돌아온 베르나르는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그러던 1381년 6월 1일, 우르바노 6세는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는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를 폐위하고 카를로 3세를 나폴리 국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6월 24일, 카를로 3세의 군대가 조반나 1세의 남편인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의 군대를 격파하고 나폴리에 입성했다. 오토는 베르나르를 고용한 뒤 나폴리 탈환 작전에 착수했지만, 그해 7월 나폴리의 카푸아나 성문 앞에서 카를로 3세에게 패배했다. 항복을 강요받은 베르나르는 1년간 카를로 3세와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다.
1382년 가을, 베르나르는 마달로나에서 클레멘스 7세에 의해 나폴리 국왕으로 봉해진 앙주 공작 루이 1세와 합류했다. 1383년 초 몬테피아스코네를 공략했으며, 뒤이어 오르비에토를 약탈했다. 이후 마렘마를 약탈했으며, 로마 장관 프란체스코 디 비코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던 1383년 3월 1일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가 사망하면서 아비뇽을 지키던 사보이아군이 해산되자, 클레멘스 7세는 그를 급히 소환해 콤타트 베네신을 지키게 했다. 1383년 9월 루이 1세와 합류한 베르나르는 한 달 동안 산탄토니오 아바테, 아베르사, 카소리아를 공격한 후 아프라골라를 약탈해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한 뒤 카세르타에 보관했다. 이후 풀리아로 이동하여 군사 활동을 수행했으나, 루이 1세가 1384년 9월 20일 비셸리에에서 병사하자 나폴리 왕국과의 전쟁을 중단하고 귀환길에 올랐다.
1384년 12월,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와 함께 아비뇽으로 갔고, 1385년 5월 21일 클레멘스 7세가 루이 1세의 아들인 앙주의 루이 2세의 나폴리 국왕 대관식에 참여했다. 이후 클레멘스 7세의 교황군 사령관에 고용된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비테르보를 탈환한 뒤 1386년 1월 타란토로 진군했지만 공략에 실패했고, 5월에 케토나와 피사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그해 초여름에 프란체스코 디 비코와 재차 동맹을 맺은 뒤 테베리나의 산 미켈레에서 우르바노 6세의 교황군을 격파했다. 8월부터 비테르보를 거점으로 삼았고, 1387년 6월 기병 400명을 이끌고 오르비에토를 급습해 우르바노 6세 지지자들을 추방했다.
1387년 8월, 베르나르는 페루자 테베리나의 산미켈레, 치비타베키아, 리스팜파나를 약탈했으며, 12월에는 피렌체의 요청에 따라 발다르노를 점령한 후 산타고스티노와 산기우스토 알레 모나체를 공략했다. 피사 주민들은 자기들까지 약탈당할 것을 우려해 8,000 플로린의 몸값을 지불했다. 베르나르는 뒤이어 체볼리아와 카스키아나를 공략해 약탈했고, 시세나 주민으로부터 9,000 플로린을, 루카로부터 4,000 플로린을 받아냈다. 그해 말에 파브리카와 나자티코를 공략한 뒤 볼테라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1388년 1월 볼테라에서 피렌체로부터 용병으로 고용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부했다. 하지만 4월 24일 피렌체가 거액의 돈을 주며 토스카나 내 피렌체의 경쟁 도시들을 쳐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먼저 시에나를 압박해 12,000 플로린을 받아냈고, 피사로 진군해 1388년 6월 1일 피사의 영주 피에로 감바고르타로부터 13,000 플로린을 받아낸 후 칸나라로 돌아왔다. 1389년 1월 피렌체에서 봉사하러 갔던 처남[2] 존 호크우드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와 함께 시에나로 진군해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그해 3월 나폴리를 공략하기 위한 루이지 2세의 원저에 참여한 그는 4월에 아벨리노 일대를 평정하고 나폴리에 성공적으로 입성했다. 이후 베나노를 포위했고, 5월 한 달 동안 테베리나, 파브로, 살세, 코르바라를 약탈했다.
1389년 여름, 베르나르는 피렌체로부터 다시 한 번 시에나를 약탈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받아들였지만, 시에나 주민들의 항전으로 공략에 실패하자 나폴리 왕국으로 돌아온 뒤 루이지 2세에 맞서는 라디슬라오 추종자들에게 포위된 카니노 시를 구원한 뒤 클레멘스 7세에 의해 헤리티지의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9월 토디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통치를 행사했으며, 10월 15일 우르바노 6세가 사망한 뒤 11월 2일 보니파시오 9세가 새 교황에 취임하자 로마냐로 진군해 로마로 향하는 모든 북부 경로를 차단하고 11월 한 달 동안 로마의 새 교황을 지지하는 여러 사람을 붙잡아 살해했다.
1390년 8월 클레멘스 7세의 부름을 받고 망드로 향한 베르나르는 레이몽 드 튀렌과 클레멘스 7세간의 전쟁 종식을 위한 협약에 증인으로서 서명했다. 1390년 10월 포르토 피사노에 상륙한 뒤 피사인들로부터 무료 통행을 승인받고 본거지로 돌아온 그는 1391년 4월 로마를 본격적으로 포위하려 했다. 그러던 중 아르마냐크 백작 장 3세 다르마냐크가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에 의해 감금되어 있던 여동생 베아트리스를 구출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일으키자, 잔 칼리아초 비스콘티는 그에게 아르마냐크 백작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아르마냐크 백작이 쳐들어오면 그동안 롬바르디아에 구축했던 자신의 세력이 저해될 것을 우려했고, 밀라노 공작의 요청에따르기로 했다.
1391년 5월 프랑스로 돌아온 베르나르는 5,000가량의 창병대를 모집한 뒤 6월 알프스산맥을 넘어 몬체니스에 이르렀다. 그러나 폰테 계곡을 통과하던 중 아르마냐크 백작의 분견대가 매복 공격을 해오는 바람에 그를 추종하던 병사 절반 이상이 전사하고 300명이 생포되었다. 그는 가까스로 빠져나갔지만, 숲으로 도망치던 중 그를 따라가던 세 기병이 그를 배신하고 쳐 죽였다. 이리하여 26년간 이탈리아에서 맹위를 떨쳤던 용병대장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3. 가족
- 리카르다 비스콘티: 밀라노 영주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사생아.
- 사생아
- 베르나르 드 세레스(1359 ~ 1413): 아버지처럼 용병대장으로 활약했으며, 아비뇽 교황의 교황군 대장, 피렌체 총독, 나폴리 대립왕 루이지 2세의 나폴리 총독을 역임하면서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오에 대적했다. 이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에 의해 아스티 총독을 맡았고,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에 대적했다. 또한 말 라우센, 몰랑, 노베스 영주를 역임했다.
- 앙투안 드 라 살(1388 ~ 1462): 앙주 공작 루이 3세에 비서로 고용되었고, 앙주의 르네의 아들인 장 2세 드 로렌의 가정교사를 맡았다. 이후 생폴 백작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의 궁정에 들어가서 <리파리 섬으로의 여행>, <시빌 여왕의 낙원> 등 여러 풍자 소설을 집필했다.
[1]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누이이자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 드 부르봉의 아내[2] 존 호크우드는 밀라노의 영주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사생아인 돈니나 비스콘티를 아내로 두었고, 베르나르 역시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딸인 리카르다 비스콘티를 아내로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