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트 Bera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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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알바니아 | ||
지역 | 베라트주 | ||
면적 | 421.6㎢ | ||
인구 | 62,232명 | ||
시간대 | UTC+1 (서머타임: UTC+2) | ||
베라트 (알바니아) | |||
1. 개요
베라트는 알바니아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베라트 주의 주도이다. 베라트 전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예로부터 천 개의 창문을 가진 도시라는 별칭을 지녔다. 그래서 알바니아의 독재자 엔베르 호자는 베라트를 박물관 도시로 선포하기도 했다.2. 역사
베라트는 알바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이 일대에는 일리리아인들이 살았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인 카산드로스가 이 일대에 살고 있던 일리리아인들을 복속시켰고 안티파트리아(Antipatreia)라는 도시를 세웠다. 하지만 기원전 200년에 안티파트리아는 로마의 집정관인 레가투스 루키우스 아푸스티우스에게 정복당했다. 그의 군대는 병사들에게 도시의 약탈을 허용하였고 성벽을 허문 다음 도시를 싹 다 불태워버렸다. 그 후 로마가 점차 쇠락하자 안티파트리아는 비잔틴 제국의 국경 도시로 슬라브인들의 침략을 막는 주요 거점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 제1제국의 17대 칸인 프레시안 1세는 9세기경 안티파트리아를 점령하였고 도시 이름을 하얀 도시라는 뜻의 슬라브어인 벨그라드(Bel[i]grad)로 바꾸었다. 그 후 벨그라드는 앙주, 시칠리아, 세르비아, 무자카이 공국을 비롯한 많은 민족들이 점령하였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이 다시 벨그라드를 점령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였고 도시 이름을 베라트로 바꾸었다.
오스만 제국이 베라트를 점령하기 이전 부터 이 일대에 알바니아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1385년 베라트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당하자 알바니아의 무자카가문이 베라트의 통제권을 잡았고 베라트는 베라트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니 1417년 베라트는 다시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였다. 그러자 스컨데르베우는 베라트를 다시 차지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수백년 간 베라트는 쭉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원래 베라트는 기독교도들만 살았으나 무슬림들의 이주와 기독교도들의 개종으로 서서히 무슬림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알바니아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였어도 그 민족성은 계속 유지하였다.
베라트는 알바니이 국가 부흥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1833년부터 1839년까지 일어난 알바니아 반란은 그 정점이었다. 하지만 반란은 실패로 끝이났고 베라트의 성벽은 파괴되어 도시의 방어 기능이 상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라트는 19세기 후반 알바니아 민족주의 단체인 프리즈렌 동맹의 주요 거점 도시였으며 그 단체는 알바니아 지역의 완전함을 수호하기 위해 두 손으로 싸우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밝혔다. 1910년대 알바니아 독립 전쟁 및 제1차 발칸전쟁 과정에서 1912년 11월 28일 알바니아의 독립했다. 그 후 베라트는 알바니아의 도시가 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9년 베니토 무솔리니는 알바니아가 과거 로마의 영토라면서 알바니아를 병합하였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낀 유대인들은 베라트의 무슬림과 기독교 공동체에서 온 60가구의 집과 지하실에 숨어 살았다. 그 후 엔베르 호자가 이끄는 민족해방운동이 알바니아를 해방했고, 그는 베라트를 유배지로 썼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무너진 현재 베라트는 알바니아의 문화 수도로 자리잡았다.
3.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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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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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한국어 | 베라트·지로카스트라 역사 지구 |
영어 | Historic Centres of Berat and Gjirokastra | |
프랑스어 | Centres historiques de Berat et de Gjirokastra | |
국가·위치 | 알바니아 베라트 & 지로카스트라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2005년 | |
등재기준 | (ⅲ)[1], (vi}[2] | |
지정번호 | 569 |
- 성 삼위일체 교회 (Kisha e Shën Triadhës) : 비잔틴 제국 시절 세워진 알바니아 정교회 교회.
- 성 마리아 블라헤르나 교회 (Kisha e Shën Mëri Vllahernës) : 13세기 비잔틴 제국 시절 세워진 알바니아 정교회 교회로 프레스코화와 이콘이 유명하다.
- 성 미카엘 교회 (Kisha e Shën Mëhillit) : 베라트시 언덕 꼭대기에 세워진 알바니아 정교회 교회로 비잔틴 제국 시절 세워졌다.
- 고리카 다리 (Ura e Goricës) : 알바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오스만 제국 시절 다리로 베라트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석조 다리이다.
- 학사 모스크 (Xhamia e Beqarëve) : 1828년 세워진 모스크로 알바니아의 공산주의 시절에는 여성 속옷 가게로 사용되었다.
- 리드 모스크 (Xhamia e Plumbit) : 1554년 세워진 모스크로 높고 얇은 미나렛으로 유명하다.
- 술탄 모스크 (Xhamia e Mbrett) : 1492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2세가 베라트에 살고있는 무슬림을 위해 세운 모스크.
- 할와티야 테케 (Halveti Tekke) : 1782년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 아흐메트 쿠르트 파샤가 건축한 모스크로 이슬람의 소수 분파인 할와티야 교단에 속해있다.
- 솔로몬 박물관 (Muzeu Solomon) : 베라트에 살던 유대인 공동체의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현지인들이 2,000명의 유대인을 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독특한 박물관이다.
- 오누프리 박물관 (Muzeu Ikonografik "Onufri") : 16세기 알바니아의 성화와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
3.1. 베라트 성 (Kalaja e Beratit)
5세기 동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2세가 성을 세웠고,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13세기 에피로스 친왕국의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증축했다. 정문인 북문은 2중으로 방어되고, 내부에는 주민들을 위한 20개의 정교회 교회와 함께 오스만 시기에 수비대를 위해 세워진 1개의 모스크 터가 있다. 베라트 성은 알바니아 10 레크 화폐의 도안으로 쓰였다.
[1] 베라트와 지로카스트라는 발칸 지역 도시들의 다양성을 보여 주며, 오늘날 거의 사라진 옛 생활양식을 간직한 탁월한 유적이다. 지로카스트라의 도시 배치와 가옥은 중앙의 권력층의 이해관계와 직접 연관을 맺고 있는 영향력 있는 지주들이 건설한 요새 마을이다. 베라트에는 더욱 독특한 생활양식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는 수공예 장인들과 상인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2] 베라트와 지로카스트라 두 도시는 이전의 다양한 중세 문화에 이어서 오스만 시대의 토착 가옥과 다양한 형태의 탁월한 연속 유산을 보여 준다. 특히 베라트에는 대규모의 기독교 소수 집단과 평화롭게 공존하였음을 말해 주는 유산들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