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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랑티누아 여공작 샤를로트 공녀

<colbgcolor=#fff8dc><colcolor=#000000> 발랑티누아 여공작 샤를로트 공녀
Princesse Charlotte, Duchesse de Valentinois
파일:IMG_3996.jpg
이름 샤를로트 루이즈 쥘리에트 그리말디
(Charlotte Louise Juliette Grimaldi)
출생 1898년 9월 30일
프랑스령 알제리 콩스탕틴
사망 1977년 11월 16일 (향년 79세)
프랑스 파리
배우자 피에르 드 폴리냑 (1920년 결혼 / 1933년 이혼)
자녀 앙투아네트, 레니에 3세
아버지 루이 2세
어머니 마리 쥘리에트 루베
1. 개요2. 작위3. 생애4. 가족 관계
4.1. 남편4.2. 자녀
5. 기타

1. 개요

루이 2세의 딸. 레니에 3세의 어머니다.

2. 작위

  • 샤를로트 드 모나코 Charlotte de Monaco (1898년 9월 30일 ~ 1911년 7월 18일)
  • 샤를로트 그리말디 드 모나코 Charlotte Grimaldi de Monaco (1911년 7월 18일 ~ 1911년 11월 15일)
  • 마드모아젤 드 발랑티누아 Mademoiselle de Valentinois (1911년 11월 15일 ~ 1919년 5월 16일)
  • 발랑티누아 여공 저하 Son Altesse Sérénissime la duchesse de Valentinois (1919년 5월 16일 ~ 1922년 8월 1일)
  • 모나코의 세습 공녀 저하 Son Altesse Sérénissime la princesse héréditaire de Monaco (1922년 8월 1일 ~ 1944년 5월 30일)
  • 모나코의 샤를로트 공녀 저하 Son Altesse Sérénissime la princesse Charlotte de Monaco (1944년 5월 30일 ~ 1977년 11월 15일)

3. 생애

세탁부 출신이었던[1] 마리 쥘리에트 루베(1867년~1930년)와 모나코 공 루이 2세의 사생아 딸로 1898년 9월 30일 태어났다. 루이 2세는 엄연히 프랑스 여배우 출신인 지슬렌 도망제와 정식으로 혼인한 상태에서 마리 쥘리에트 루베와 불륜으로 샤를로트를 낳았기 때문에 샤를로트는 모나코 공녀는 커녕 그리말디 가문의 일원으로도 인정되지 않았다. 그렇게 부친에게 금전적 지원만 간간히 받으며 평생 나서지도 못하고 살 운명이였지만, 프랑스에게 합병당하지 않기 위한 모나코의 비책으로 하루아침에 공녀가 되어 신분이 벼락상승한다.

그러나 비루한 모계 때문인지 공위는 넘겨받지 못했고 아들 레니에 3세에게 계승권을 넘겼다. 더군다나 애초에 정식 혼인이 아닌 불륜 관계에서 태어나 사생아였던지라 상류사회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이런 샤를로트가 모나코 공위의 계승자가 되면서 유럽 상류사회 내에서 졸부 취급을 받던 그리말디 가문의 격은 더욱 떨어지게 됐다. 이후 어머니 마리 쥘리에트 루베는 사진작가인 아쉴 델마에와 결혼하고 샤를로트의 이부동생들인 조르주(1884~1955), 마르그리트(1886~1894)를 낳았지만 1893년 1월 14일에 이혼하고 그후 카베레 가수 생활을 했다.

파일:Monaco-decouvrez-les-parents-hors-du-commun-du-prince-Rainier-Photos.jpg
이후 루이 16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신이었던 폴리냑 공작부인의 막내아들 멜키오르 드 폴리냑의 후손인 피에르 드 폴리냑과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다. 하지만 그의 동성애 기질로 인해 별거하였으며, 이후 샤를로트는 의사이자 이탈리아인이었던 연인 Dalmazzo와 함께 살았다. 마침내 1934년 아버지 루이 2세의 조례에 따라 합의 이혼하였다.

1944년 5월 30일, 모나코의 공위 계승권을 아들 레니에 3세에게 양도했다. 말년에는 대학에 진학하여 사회 사업학위를 받았다. 1949년, 아들 레니에 3세가 공위에 오른 후 샤를로트는 파리 외곽의 그리말디 영지인 샤토 드 마르쉐로 이사했다. 그녀의 안전을 두려워하는 자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샤를로트는 자신의 사유지를 전과자들을 위한 재활 센터로 바꿨다.

4. 가족 관계

4.1. 남편

  • 발랑티누아 공작 피에르 공자(1895년 10월 24일~1964년 11월 10일) - 1920년 샤를로트와 결혼하면서 발랑티누아 공작위와 모나코의 공자 직위를 받고 슬하에 1남 1녀를 낳았으나 1933년 이혼했다.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신 폴리냑 공작부인의 현손자이다.[2] 본명은 피에르 마리 자비에 라파엘 앙투안 멜키오르 드 폴리냑(Pierre Marie Xavier Raphaël Antoine Melchior de Polignac)이며 샤를로트와 결혼하면서 성을 그리말디로 바꿨다.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부부 사이는 나빴고 샤를로트 공녀는 외도, 피에르는 동성애 성향이 있었다. 아이를 낳고 1920년대 중반부터 비공식적으로 별거, 1930년부터 공식적으로 별거했다. 샤를로트의 아버지 루이 2세는 딸과의 이혼에 빡쳤던지 피에르의 모나코 입국을 막았다고 한다.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마시 여남작 앙투아네트 공녀[3]
(Princess Antoinette, Baroness of Massy)
1920년 12월 28일 2011년 3월 18일 알렉상드르 아테나세 노헤스[4]
슬하 1남 2녀
장 샤를 레이[5]
존 길핀[6]
1남 모나코 공 레니에 3세
(Rainier III, Prince of Monaco)
1923년 5월 31일 2005년 4월 6일 그레이스 켈리
슬하 1남 2녀[7]

5. 기타

  • 며느리 그레이스 켈리를 근본없는 미국인 평민이자 배우 출신이라고 죽을 때까지 무시했다고 한다. 웃긴 건 정작 샤를로트도 일개 세탁부와 모나코 공 루이 2세의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였고 모나코의 공녀로 신분상승한 뒤에도 그 사생아 신분이 발목을 잡아 상류사회에서도 천대받았다는 것이다.[8]

[1] 이 세탁부 신분조차 위조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2] 폴리냑 공작부인 → 멜키오르 드 폴리냑 → 샤를 드 폴리냑 → 막상 드 폴리냑 → 피에르 드 폴리냑[3] 자신보다 3살 어린 남동생 레니에 3세가 태어나기 전까지 모나코 공국의 유력 계승자였다. 더군다나 레니에 3세가 즉위 후에도 한참동안 결혼을 하지 않자 자신의 아들을 후계로 세우고 자신은 섭정을 맡을 음모를 꾸미며 레니에 3세의 결혼을 방해해왔다. 하지만 레니에 3세가 미국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를 만나 1956년 결혼하고 카롤린, 알베르 2세, 스테파니 등, 1남 2녀를 낳으면서 그 계획은 실패하고 앙투아네트 본인과 그녀의 자손들도 모나코 계승권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그레이스 켈리도 시누이를 몹시 싫어해 앙투아네트를 쫓아버렸고 조카 알베르 2세가 즉위한 현재에는 모나코 현 군주의 직계자손만 인정하는 법에 따라(따라서 모나코의 현 후계자는 알베르 2세의 두 적자녀인 자크 공세자가브리엘라 공녀 뿐이다) 앙투아네트의 자손들은 모나코의 계승권에서 제외되었다.[4] 결혼 전부터 오랫동안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며 3명의 자녀를 낳았고 1951년 결혼하면서 자녀들 모두 적자로 인정받았으나 1954년 이혼했다.[5] 1974년 이혼.[6] 영국의 발레 무용수 겸 배우로 앙투아네트와 결혼 후 6주만에 사망했다.[7] 하노버의 왕자비 카롤린, 알베르 2세, 스테파니 공녀[8] 적어도 그레이스는 사생아는 아니었고 아버지가 필라델피아의 지역 유지로 군림하던 엄연한 부잣집 딸인 금수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