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로구 출신 독립운동가, 박내홍
성명 | 박내홍(朴來弘) |
생몰 | 1894년 9월 3일 ~ 1928년 10월 5일 |
출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
사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내홍은 1894년 9월 3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박인호의 양자로 일찍이 천도교에 입교했고, 천도교청년당(天道敎靑年黨)과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 등을 결성하면서 천도교의 청년운동을 지도했다. 그러다가 1926년 공산주의 세력과 연합해 6.10 만세 운동을 계획했다. 만세 운동의 구체적인 계획 수립 및 준비는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단체에서 동시에 활동하고 있던 박내원에게 맡겼고, 자신은 그를 후원하면서 조직과 자금에 대한 지원 활동을 벌였다.
6.10 만세시위 계획은 거사 직전 일제에게 발각되고 말았지만,당시 천도교 측은 지도층이 관여한 사실을 철저히 숨겼고, 그 덕분에 그는 일제의 검거망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박내홍은 1927년 민족협동전선체로서 신간회를 결성하고 창립 간사로서 활동했다. 그런데 1928년 10월 5일 경운동 천도교회 사무실에서 교인들에게 설교하던 중 단도를 든 서을봉(徐乙鳳)에게 암살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내홍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하동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내홍
성명 | 박내홍(朴來洪) |
이명 | 박중래(朴重來) |
생몰 | 1897년 10월 11일 ~ 1937년 6월 28일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
본관 | 밀양 박씨 |
사망지 | 경상남도 하동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내홍은 1897년 10월 11일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에서 부친 박준형(朴準亨)과 모친 신상남(申相南)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사숙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익혔으며, 뒤이어 논어, 맹자, 대학을 숙달했다. 그러다가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광경을 지켜본 그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수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기원필(奇元必)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기로 하고 기원필의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발행한 공채증권을 발부하기도 했다. 이때 이들은 암호로 통신 연락을 해 자신들의 행동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러나 1902년 11월 박내홍은 우체국에서 기원필에게 1천원권 공채 증권 1장과 1백원권 공채 증권 2장을 발송했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우체국 직원이 신고하는 바람에 일제 경찰에게 검거되었다.
일제 경찰은 배후를 밝힐 것을 요구하며 고문을 자행했지만, 그는 조국을 되찾겠다는 욕심에서 임시정부를 도우려 했을 뿐이라며 구체적인 내용은 실토하지 않았다. 그 후 박내홍은 1921년 6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그해 7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그대로 확정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봄에 출옥한 박내홍은 독립 의지를 꺾지 않고 임시정부를 돕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간주하고 감시하다가 1935년 5월에 또다시 체포했고, 그는 고등계 형사들에게 거의 죽게 될 지경이 될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그해 7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범죄 처벌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1936년 6월에 출옥했지만 그로부터 1년 후인 1837년 6월 28일에 자택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내홍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0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